78화.
아자르는 눈에 띄게 놀라워했다.
내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을 거리였는데, 괜히 긴장한 모양이 었다.
그러나 그가 태연함을 찾기도 전에, 아벨이 2차로 폭탄을 떨어뜨렸다.
“백작님은 왜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세요?”
“뭐라고요?”
“귀족답지 않은 말을, 왜 그렇게 서 슴없이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백작부인은 제게 귀족으로 살고 싶으면 어 떤 상황이든 고고한 말투를 사용하라 고 가르치셨는데…….”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아벨은 한 마 디도 말을 더듬는 일 없이 야무졌다.
“백작부인의 가르침이 틀린 게 아니라면, 백작님은 귀족이 아닌 건가 요?”
와!
사이다! 사이다 파티!
나는 아벨의 성장에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다.
“잘한다, 공자님. 너무 멋있어. 미 쳤어.”
“이봐요.”
중얼거리는 내게 아자르가 당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 디 이게 그럴 상황인가?
내가 미처 나서지 못하는 대신 우리 사랑스러운 아벨이 사이다를 팡팡 터 뜨려주고 있는데.
“지, 지금 뭐라고…….”
“아자르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 중에 하나예요. 백작님께 사 냥개니 천출이니 나쁜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니예요.”
“공자, 뭘…… 잘못 드셨습니까?”
백작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오늘은 잘못 먹지 않았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뭔가 잘못된 걸 먹 어오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공자님, 그만하십쇼.”
아자르가 허둥대며 아벨을 말렸다.
도저히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아 아벨의 팔을 잡고 말렸는데, 작은 아이는 정말로 단단히 화가 났는지 그마저도 뿌리쳤다.
“놔 봐.”
헉……!
놔 봐, 라니 …….
나만 멋있어? 드디어 ‘남주’의 ‘패 기’가 ‘폭발’하는 것인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이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뭔가 더 화끈하게 내질러줬으면 하는 내 바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벨 은 어버버거리기만 하는 백작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앞으로 제게 귀족 대접받고 싶으시거든 백작님부터 귀족처럼 행동해 주세요.”
“뭐, 뭐라는…….”
너무 놀라운 사이다에 온몸에 전율 이 일었다. 이런 카타르시스는 오랜 만이었다.
동시에 고작 한 달 만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어버린 아벨이 대견했다.
나를 옹호해주는 것도 아닌데 밀려오는 감동의 물결.
당연히도 아자르는 더 감동받았을 터다.
역시, 슬쩍 올려다본 아자르가 흔들 리는 눈으로 물끄러미 아벨을 바라보 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자르를 얼마나 아끼는 지 백작님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자르를 이런 취급하시는 걸 아버지가 알면, 백작님께 무척 화를 내실 거예요.”
와우! 짱짱한 뒷배를 이용한 협박까지!
아니, 나는 이런 것까지는 가르친적 없는데 도대체 언제 이 정도로 발 전했단 말인가?
“지금…… 저를 협박하십니까? 전하께서 저 천출에게 몇 마디 한 걸 가지고 저를 내치기라도 하실 줄 아 시는 모양이지요?”
“그건 여쭤봐야 알겠지요. 아자르는 여러모로 루버몬트에 필요한 인재 거든요. 루버몬트군이 없으면 북부는 마수 때문에 난리가 날 거예요. 저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보이는 대로만 말하자면 …….”
“…….”
“백작님보다는 아자르가 훨씬 아버지께 도움되는 사람일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는 철저히 도움되는 사람 들을 아끼시고요.”
“이 무슨!”
드디어 참고 참던 백작의 뚜껑이 열 렸다. 사이다 뚜껑이 열리듯이, 펑— 하고.
“이제 보니 에스클리프 영애에게 그간 못된 것만 배운 모양이군요. 전에 제 부인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험 한 말들을 늘어놓았다는 걸 전해 들 었는데 …….”
“영애를 욕하지마세요!”
“공자의 예의 없음은 내 아주 잘 알 겠습니다! 전하께 당장 말씀드려 예 절 교육을 다시 시키시라 해야겠군 요! 이이 …….”
제 분을 이기지 못한 백작은 자리를 뜨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더 말을 섞어봐야 자기가 말하는 ‘천것’들 앞에서 우스운 꼴만 될 걸 내다본 듯했다.
마지막 사이다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지 같은 늙은이. 뒤로 넘어졌는 데 코가 확 깨졌으면 좋겠다.’
아자르의 주머니 속에서 큭큭 웃으 며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별안간 백작의 비명소 리가 들려왔다.
“억!!!”
뭐지?
소리만 들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아벨과 아자르의 목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배, 백작님?”
“허어 …….”
아벨이 후다닥 백작을 향해 달려가는 듯했고, 아자르도 급히 뒤를 따랐다.
“괘, 괜찮으세요?”
“으으…….”
“세상에나. 백작님, 코피 나시는뎁 쇼.”
뭐라고? 넘어진 거야?
정말로 마지막 사이다가 터졌단 말 인가?
나는 아자르의 주머니 위로 빼꼼 머리를 내밀고 백작의 꼴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삼켜야 했다.
“아니, 지금 자기 발에 걸려서 넘어 지신 겁니까? 그것도 앞으로도 아니 고 뒤로?”
아자르가 황당해하며 백작을 일으 키 려는 듯 움직였다.
“더러운 손 치우…… 으어억!”
“아니, 뭔 눈물까지 흘리시네. 그렇 게 아프십니까?”
“코, 코피가……. 코뼈가 부러지신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아벨의 목소리에 나는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대략, 정원을 나서려던 백작이 뜬금없이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진 상황인 거다.
‘진짜로 내가 바라던 사이다가 터 졌 다고? 마법이야, 뭐야?’
당황하던 아벨이 후다닥 몸을 일으 키는 게 느껴졌다.
“일단 내가 의원을 불러올게. 아자르, 잠시 백작님을 좀 봐 줘.”
“아, 예.”
아벨의 기척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만 깜 빡였다.
개연성은 작가 맘인 소설 속이라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그 순 간 나를 사로잡았다.
뭔가 싸한 느낌이 었다.
***
급하게 정원으로 온 의원의 말에 따르면, 백작은 정말로 코뼈가 내려앉 았단다.
충격에 코피가 난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뒤로 자빠져서 코가 깨진 거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백작은 처절하 게 응징당하고 말았다.
백작이 실려 가고 드디어 태평해진 정원 한편에 모여 앉은 나와 아벨, 아자르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반 이상은 꼴좋다, 가스펠 백작, 뭐 이런 내용이었다.
“아니,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네. 거기서 어떻게 뒤로 넘어지지? 운동 신경은 자기 집 개랑 바꿔 먹었나?”
“벌 받은거야. 나쁜 말해서.”
의아하다는 듯 아자르가 중얼거리는 말에 아벨이 샐쭉한 표정으로 대 꾸했다.
“아, 맞아요. 공자님. 대체 아까 백작에게는 왜 그러셨습니까? 그 늙은 이가 한두 번 그랬던 것도 아닌 데…….”
“한두 번 그런 거 아니면, 계속 그 런 말을 듣고 있어야 돼? 아버지가 이 일로 나한테 화내셔도 상관없어. 난 후회 안 해.”
“그럼요, 공자님! 당연하죠! 그리고 전하가 이 일로 화를 내실 분이에요? 잘했다고 엉덩이 토닥토닥 해주실걸요.”
“헤헤, 그쵸?”
“그럼요! 이리 와요. 내가 먼저 토 닥토닥 해줄게요.”
나는 옆에 앉은 아벨의 다리를 대견 한 듯 톡톡 몇 번 두드려주었다.
기분 좋은지 아벨이 코를 훔치며 헤 헤 웃었다.
“이제 보니 영애가 공자님께 이상 한 걸 가르치신 모양입니다.”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아자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상한 거라뇨?”
“이상한 거라니?”
“콧대 높은 늙은이들이 저런 말 하는 게 하루 이를 일인가? 일일이 상대하다 보면 일만 커진단 말입니다. 적 당히 넘어가는 게 신상에 편한 법인 데 …….”
손을 휘휘 저으며 아자르가 하는 말에, 나는 조금 속상했다.
소설을 읽은 나는 아자르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이런 말을 듣고 분을 삭 일 성격이 아니었다. 아마 처음부터조용히 입 닫고 있지는 않았겠지.
하나 지긋지긋한 늙은이들이 매번 던지는 독설과 무시에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타협하기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성격 숨기며 모진 소리 듣느라 엄청 고생했을 게 뻔했다.
“경의 말도 맞긴 해요. 우리가 똥 보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개가 짖나, 하고 넘어가면 정신건강에도 좋긴 하 지.”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아자르와 눈맞추며 나는 덧붙였다.
“그렇지만 가만히 듣고 있어도 될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잖아요. 백작 이 선 넘은 건 확실해요. 그런 말은 듣고 있지 말아요.”
“그게 뭐 별 건지……. 백작 말고도 하도 많이 들어왔던 거라, 별로 감홍없습니다. 제국인들이 자기만 잘났다 고 목 뺏뺏하게 구는 건 익숙하니까요.”
“저도 그게 놀랍네요. 능력 좀 쓸 줄 아는 게 뭐 대수라고 제국인 우상 주의에 물들어있는지. 천출? 천추우울? 갑자기 왜 알아서 잘들 사는 카 지트인들까지 후려치는지 하나도 이 해를 못하겠어.”
“저도요, 영애.”
아벨이 동의했다.
“돌부리 하나 없는 평지에서 뒤로 넘어져 코 깨지는 주제에 왜 경을 무 시하냔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한 주먹거리도 안 되면서.”
“맞아요, 맞아요.”
“다음엔 계급장 떼고 멱살 한번 잡 아줘요. 뒤처리는 내가 할 테니까.”
“맞아, 맞아.”
“허!”
아자르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 뜨렸다.
“영애가 뭘 어떻게 하시게요?”
“개소리 하는 백작 멱살 한 번 잡은 일로 전하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 면 데리고 와요. 내가 다 해결해줄 수 있으니까.”
“맞아, 맞아. 아버지는 영애 말이라 면 뭐든 들어줄 거야.”
과연 정말 그러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은 허세를 부리고 봤다.
패기 넘치게 내지르는 나와, 그 충실한 수하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아벨을 번갈아 바라보며 아자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공자님이 누구 보고 배웠 는지 알겠군요. 아까 조용히 욕질 할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 까?”
허, 웃는 아자르를 보며 아벨이 고 개를 갸웃했다.
“응? 욕?”
아니, 거기까진 안 돼.
나는 내 이미지를 사수하기 위해 필 사적으로 아자르의 굵은 발목을 잡고매달렸다.
“이봐요! 거기까지!”
“응? 뭔데?”
궁금해하는 아벨과 당황한 나를 바 라보며 아자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 뜨렸다.
“뭐어 랬을까?”
“경! 진짜 거기까지 하세요!”
큭큭 옷으며 나를 바라보는 아자르의 표정이 얄미웠다.
후…….
아주 큰 약점을 잡혀버렸다. 입은 좀 조심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