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진심이 가득 담긴 아벨의 소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당연하죠, 라고 대답해야 했는 데…….
문득 떠오른 사실들이, 일부러 외면하고 있던 걱정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렸기 때문이었다.
〈페르소나〉의 작가, 프로크레아토르.
그가 구하고 싶어 했던 저주받은 자 식들, 제누스와 이그니스.
내게 그들의 기억이 밀려들어온 건, 그들에게 저주 내렸던 용신 가이오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아니, 확신하고 싶지 않아서 미뤄오고 있는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아벨에게 무작정 고개를 끄덕여줄 수가 없었다.
답이 없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아벨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덧붙였다.
“소, 소원…… 꼭 들어주신다고 하 셨잖아요. 안 되는 거 없어요.”
“아, 네. 공자님.”
금세 겁에 질려 떠는 작은 아이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말했다.
“당연하죠.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소원이 너무 아까운 거 아닌가 해서요. 다른 것도 빌어 봐요.”
아벨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 저었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거면 돼요.”
“어휴, 공자님도 참…….”
괜히 또 주책없이 눈물이 흐를까 봐 나는 태연한 척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마냥 행복한 듯 방긋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벨의 그림자 위 로, 더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공자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으악!”
이럴 수가.
아자르였다.
아니,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첫 만남 때부터 어쩌면 이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지?
잠시 그의 능력에 의문이 일었다가,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기척 없이 나타날 수 있는 능력, 분명 그에게는 있었다.
“아, 아, 아자르.”
화들짝 놀란 아벨이 뒤돌아 아자르를 마주한 채, 등 뒤로 손바닥을 펼쳤다.
올라오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냉큼아벨의 손 위에 올랐다.
아벨은 여전히 손을 등 뒤로 감춘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 갑자기 여, 여긴 웬일이야?”
“뭐 혼자 훔쳐 먹고 계셨습니까? 왜 이리 얼굴색이 창백해요? 못 들킬 거 들킨 사람처럼.”
“무, 무슨! 아니야!”
예리한 자식…….
나는 긴장한 아벨과 함께 덩달아 긴장해 벌벌 떨었다.
흐음, 하며 의심스러워하는 아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에 감춘 거 뭐예요?”
“가, 감추긴 뭘? 감춘 거 없는데?”
“뭐예요? 제가 좀 보면 안 됩니 까?”
“아, 숨긴 거 없다니까! 왜 이래!”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아자르를 피해 아벨이 필사적으로 몸을 뒤 틀었다.
와중에도 내게 무리가 안 가게 하려 는지 뒤로 뺀 손은 두 개였다.
한 손으로는 나를 받쳐 들고, 다른한 손으로는 혹여나 내가 떨어질까 감싼 채로 아벨은 연신 주춤거 렸다.
아벨의 배려가 눈물겨웠지만 안타 깝게도 내 머리는 핑글핑글 돌았다.
출렁이는 배 위에 탄 것처럼 흔들리는 아벨의 손바닥 위에서 나는 토하 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만 좀 하고! 왜, 왜 왔냐니까?”
“아, 공자님이 걱정되어서 달려와 봤죠.”
“걱정? 무슨?”
“가스펠 백작님이 주군 집무실에서 얘기 나누고 나오자마자 공자님을 찾지 뭡니까. 어디서 놀고 있냐면서 묻 기에 제가 모른다고 했죠. 당장 공자 님 찾아서 귀찮게 할 느낌이라 눈치 껏 도와드리려고.”
개복치 멘탈 수준으로 약한 내 몸을 예고 없이 바이킹 태우게 한 아자르는 괘씸했지만, 그가 아벨을 찾은 이유는 고마워해도 될 것 같았다.
아벨도 같은 생각인지 천천히 한숨 쉬며 대답했다.
“고마워. 그렇지만 난 괜찮아. 가스펠 백작님이 찾아오시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아자르, 일단 가 봐도 ……. 어?!”
갑자기 말 잘하던 아벨이 놀람과 동 시에.
나도 놀라고 말았다.
한순간, 아벨에게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던 아자르가 바로 내 눈앞에 있 음에 말이다.
‘망했다.’
어느새 아벨의 뒤로 옮겨온 아자르는, 정확히 나를 바라보며 놀라고 있 었다.
동공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그의 금색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
아자르 로만.
그가 기척도 없이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 있었던 이유.
풍속성 능력자의 2차 개방 이능은, 순간 이동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 내에서는 마력 수치에 따라 원하는 곳 어디든 이 동할 수 있었다.
순간순간 위치를 옮겨가며, 적을 향 해 퍼붓는 목표를 놓치지 않는 화살.
대체 어디서 날아드는지 모를 강력 한 화살촉에 심장이 꿰뚫리던 수많은 마수들.
나는 무척이나 멋있게 묘사되던 전 쟁터에서의 아자르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한숨지었다.
제 위치는 절대 들키는 법 없지만 적의 위치는 귀신같이 알아채 잡아내 고야 마는 능력자.
이런 괴물 같은 능력자의 눈을 어떻 게 피하나? 어림도 없지.
“역시…….”
사색이 된 아자르가 중얼거리자, 아벨이 황급히 몸을 틀었다.
이미 들키고야 만 나를 다시 감출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벨은 얼버무렸다.
“이, 이, 이게 말이야. 아자르, 어떻 게 된 거냐면…….”
“마녀죠, 이 여자.”
“뭐?”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을 가진 특이한 사람은 본 적 없습니다. 마녀 가 분명해요. 공자님은 잘 모르시겠 지만 제 모국과 가까운 쪽에, 기이한 능력을 가진 여자들이 모여 사는…….”
“그런 거 아니야!”
아벨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영애는 약을 잘못 마신 것뿐이야. 아버지가 기력보충제라고 가져다주 신 거였는데,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된 거야.”
“기력보충제요?”
“나도 잘 몰라. 아버지 아는 분이 만들어주신 거라는데, 어쩌다가 약이 뒤바뀌었나 봐. 영애는 마녀, 그런 거 아니야. 사과해줘.”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아벨에 잠시 미간을 좁히며 뭔가를 생각하던 아자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 약쟁이가 또 뭔가 문제를 저지른 모양이군.”
혼잣말하는 아자르를 보며 아벨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주 잘 알죠. 능력은 쓸 만한데 제가 별로 좋아하는 놈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저랑은 고양이와 쥐 같은 사이랄까요?”
“그래? 아무튼, 영애는 마녀 같은 거 아니니까 무례하게 군 거 사과해 줘. 빨리.”
난 괜찮은데, 아벨은 아자르의 사과에 무던히도 집착했다.
아벨은 아무래도 내가, 이 성에서 마음 상할 만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 다고 바라는 듯했다.
혹시라도 질려버린 내가 훌쩍 떠날 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장난스럽게 입을 삐죽이던 아자르 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여자, 여자, 하지마. 정중히 불러줘.”
“예이, 에스클리프 영애. 천것이 무 례했습니다. 용서하십쇼.”
“비아냥거리지도 마!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이이.”
“고, 공자님! 저 괜찮아요. 괜찮으 니까…….”
“여기 계셨습니까?”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는 와중, 우리 뒤에서 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 디서 들어본 듯한데 누군지 가물가물 했다.
아벨과 아자르가 화들짝 놀라 멈칫 했다.
아니, 루버몬트 성의 온실 정원은 뭐 정모 장소인가? 왜 이렇게 사람들 이 하나둘 모여들어?
당황해 뒤도 못 돌아보는 아벨 대신, 그의 어깨 너머 침입자를 아자르 가 먼저 확인했다. 그의 금안이 날카 롭게 빛났다.
곧 아자르가 아벨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늙은이가 공자님 냄새 하나는 기 가 막히게 잘 맡는군요. 영애는 제게 주십쇼.”
“어, 어?”
당황하는 아벨의 손에서 아자르는 순식간에 나를 낚아챘다.
그는 아주 재빠른 손짓으로, 태연하 게, 입고 있던 옷의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로 나를 쏙 밀어 넣었다.
와중에 놀라웠던 건 아벨의 손에 있을 때와 달리 흔들림 없는 시스스 침 대 같은 편안함이었다.
아벨의 손에서 나를 낚아채고, 훌쩍 고도가 올라 주머니 속으로 삼켜 지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에 토악질을 할 만도 했는데…….
‘능력인가?’
바람의 흐름을 다루니 아무래도 그 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의외의 배려에 나는 조금 놀랐다.
날 낚아챌 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손에 힘을 하나도 주지 않았던 것까 지.
혹시 라도 들킬까 봐 나는 아자르의 가슴팍 주머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귀만 열었다.
늙은이 어쩌고 말했던 거로 봐선, 갑작스러운 침입자가 누군지는 뻔했다.
가스펠 백작이겠지.
뭔 잔소리를 하려고 놀고 있는 아벨을 찾으러 정원까지 직접 행차했단말인가?
“공표식이 금방인데 이런 데서 천 것이랑 노닥거리고 계셨습니까? 정신이 아주 쏙 빠지셨군요.”
백작은 노한 목소리로 초장부터 독 설을 퍼부어댔다.
천것 운운하던 아자르의 말이 거슬 렸는데, 지금 보니 이래저래 그도 이런 대우에 시달려왔던 모양이었다.
‘저 경우 없는 늙은이, 진짜…….’
나는 한마디 해줄 수 없음이 원통해 몸을 떨었다.
“아, 죄송해요. 놀고 있던 건 아니었어요. 능력 개방 연습은 게을리 하 지 않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네 녀석은 공자가 있는 곳을 모른 다고하더니 …….”
“하하. 만나자마자 이렇게 괴롭히 실 게 뻔한데 충신 된 자로서 어찌 공자님 계신 곳을 날름 분답니까?”
역시 아자르는 유하게 네, 네,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사이다에 웃음이 났다.
백작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아무튼 천한 피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능력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래도 공자는 전하의 은혜로 루버몬트의 성이라도 뒤집어쓰게 됐으니, 지금부터는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
“저 집 지키는 개새끼를 무슨 충신이라도 되는 양 달고 다니지 말란 소 립니다. 전하가 공자를 교육하지 않 으니 나라도 말해야지.”
제발, 저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
나는 상승한 전투력이 한계치를 뚫는 걸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시야에 아자르의 얼굴이 잡혔다.
그는 아벨만큼이나 이런 독설에 익 숙한 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홀리 는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백작님, 아자르는…….”
“저놈은 쓰다 늙으면 버릴 사냥개 란 말입니다. 일일이 정 주지 마세요. 천것들은 대우해주면 기어오르는 법이니.”
“백작님!”
아벨이 뭔가 한마디 하려고 용기 냈 지만, 아자르가 말렸다.
“공자님, 근데 다 맞는 말입니다요. 그냥 네, 하십쇼.”
“아, 아자르…….”
“전하가 중책을 맡겨주니 아주 기세가 둥둥해져서는 ……. 쯧!”
“공자님이 어디 계신지 안 불어서 많이 불편하셨던 모양이네. 이거 죄 송하게 됐습니다.”
“저, 저 말대꾸하는 것 좀 보게. 제 국인의 피만 아니었으면 진창에서나 굴렀을 잡종 놈이…….”
“예이, 다 맞는 말씀입죠.”
아자르는 아무래도 백작의 독설에 데미지 입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그냥 어디서 개가 짖나, 하기.
그러나 그런 아자르를 알아봤는지, 뱀 같은 백작은 기어코 선을 넘었다.
“그래도 피부 꺼먼 제 어미가 큰일 하기는 했지. 천출 주제에 새끼 덕 봐 줄세해보려고 용케 제국인을 잘 낚았 으니…….”
미친.
진짜, 쌍욕 하면서 싸워도 해도 될 욕이 있고 하면 안 되는 욕이 있는 법이다.
그중 내가 제일로 치는 건 부모 욕이었다.
결국 참고 참던 내 입은 본능적으로 열리고 말았다.
“저 미친 …….”
너무 화가 나서, 지금 이 순간 내가 고상한 귀족 영애라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전부 날려버린 채.
“……늙어빠진 발바리 새끼가, 기 어코 선을 쳐 넘으시네.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 아주.”
아자르에게는 들렸겠지만, 백작과 아벨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 리였다.
멈칫한 아자르가 당황하며, 조용하 라는 듯 내가 든 주머니 위를 툭툭건드렸다.
뜬금없이 어머니 욕을 들어먹은 사실보다는 내 과격한 언사에 더 당황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