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문득 웃음이 나와서 나는 잠시 둘의 똑같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앤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일주일? 일주이이 일? 하아 …….”
움찔하는 하데스의 등이 왜인지 왜 소해 보였다.
나는 부들부들 떠는 앤의 손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달랬다.
“앤, 그만해. 전하도 알고 그런 건 아니잖아.”
나는 한참 작아진 듯한 하데스의 등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앤이 건네 준 옷을 후다닥 뒤집어 입었다.
다행히도 몸에 꼭 맞았다. 드레스보 다 훨씬 편했다.
“아무튼, 아가씨는 제가 모시고 있을게요.”
“어어?”
놀란 하데스가 돌아보려다가 멈칫 했다.
“아이샤, 다 입었어?”
“네.”
내 대답에 재빨리 몸을 튼 하데스가 고개 저었다.
“이봐. 나 때문이니까 내가 …….”
“전하가요? 일주일이나 되는데 일 일이 아가씨 씻겨주시고, 똥마렵다 하면 눌 때까지 봐주시고, 그러시게 요?”
“아…….”
“그건 내가 목욕물 준비해주면 알 아서 할 수 있어, 앤.”
민망한 표정으로 끼어들자 앤이 뭔 가 더 말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 었다.
“일단은 전하, 가신들이 곧 도착하 지 않겠어요? 전하는 가신들을 직접 맞이하셔야 하잖아요.”
“그렇지…….”
“이 꼴이 돼서 나가지도 못할 텐데, 전하가 변명이라도 제대로 해주셔야 죠. 절 데리고 있으면 신경 쓰여서 힘 들 거예요.”
“괜찮은데…….”
“억지 부리지 마시고요. 나중에 가신들 보내고 데리고 있어주세요. 당장은…….”
나는 하데스의 옆에서 눈만 깜삑이 고 있는 아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아벨은, 공표식 준비에 열을 올릴 가스펠 백작과 어 떤 식으로든 독대하게 될 것이었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일지 모를 가스펠 백작과 아벨을 단둘이 남겨두는 건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비록 이 꼴이 되어 대신 한마디 해 줄 수는 없게 됐지만, 그래도 아벨의 옆에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공자님이랑 같이 있어도 될까 요?”
***
하데스는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지금 아벨과 정원 한 편에 자리를 잡고 노는 중이었다.
가신들은 낮이 되기 전에 도착했다.
가스펠 백작을 비롯해 루버몬트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나머지두 백작들도 방문한 모양이 었다.
듣기로는 공표식 준비를 위해서라 지만, 이런 방문은 자주 있다고 했다.
아벨이 후계를 잇고도 가신들의 간섭은 대단해서, 나는 얼굴은 본 적 없 어도 그들이 대충 어떤 지위를 휘두 르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우선, 루버몬트 다음으로 제국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한다는 가렌 백작이.
강력한 군벌의 우두머리였던 가렌 백작 1세의 유지를 이어오고 있는 곳.
이렇게 설명하니 뭔가 화려하고 멋 있는 것 같은데, 쉽게 말해 꽉 막힌 군대 문화를 표방하는 가문이 었다.
내가 기억하는 백작가의 수장, 로마 르디오 가렌 백작은 사사건건 루버몬트군의 기강을 대신 잡으려 하던 사람이었다.
군 문제 빼고 성가시게 구는 가신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루버몬트 정예군을 통솔하는 아자르를 죽어라 미워했 던 기억만은 확실했다.
가스펠 백작도, 가렌 백작도 영 상 종하기 싫은 타입이었다.
그렇다고 하나 남은 데인 라즐리 백작은 좀 괜찮은 사람인가? 하면, 글 쎄…….
가스펠 가문이 오랜 위명과 역사를 자랑하는 혈통으로 유명하고, 가렌 가문이 군사력으로 유명하다면 라즐리 가문은 엄청난 재벌가였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나라의 경제 흐름을 좌지우지할 만한 수준의 삼 X,현X 같은 대기업 몇 개를 보유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대대로 라즐리 가문의 수장 들은 명석했고 경제 흐름에 눈이 밝았다.
내가 재산 불리기 놀이를 할 때 직 접 맞부딪치며 겪어본 바로 가늠하자 면, 알려져 있는 재산 말고도 검은 경 로로 보유하고 있는 재산이 수십억은 더 될 터였다.
그런고로 현재 대기업 회장급이신 데인 라즐리 백작은, 안주인이 없는 루버몬트 가문의 재정 관리에 지나치 게 간섭하려 들었다.
물론 가렌 백작도, 라즐리 백작도 꽉 막힌 늙은이지만, 루버몬트를 향 한 충성심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에 나쁜 의도는 아닐 테다.
그걸 아니까 아벨도 가신들이 날뛰 게 두었던 거겠지만…….
‘가스펠 백작만 문제가 아니겠네.’
대체 군 기강이 왜 이따위냐며 아자르에게 죽어라 욕 퍼부을 가렌 백작 과, 재정 관리는 제대로 되고 있는 거 냐며 하데스를 달달 볶을 라즐리 백작을 떠올리자 내 머리가 다 아팠다.
‘힘내, 모두들 …….’
이 와중에 코딱지만 한 크기가 되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영애. 화가 많이 나셨어요?”
“네?”
정원의 풀밭에 얌전히 앉아있던 내게, 아벨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무래도 가신들을 떠올리던 내 표 정이 나도 모르게 굳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밝은 척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음…….”
아벨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입술을 조금 달싹이다가 말했다.
“저기…… 아버지 너무 미워하지마세요. 아버지가 알고 그러신 건 아 닐 테니까 …….”
“어머, 당연하죠. 막상 이렇게 됐을 때는 좀 황당했는데 이제는 전하 탓 할 생각 없어요. 삶은 언제나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죠. 전 괜 찮아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아벨이 눈을 빛냈다.
“와, 영애 뭔가…….”
“응?”
“엄청 멋져 보여요. 이렇게 마음까 지 넓은 분이셨다니…….”
“하, 하하 ……. 이게 뭐 별 건가.”
왠지 요즘 들어 나를 향한 아벨의 애 정도가 상승한 느낌이다.
뭐랄까, 내가 이 자리에서 똥을 싸 도 정말 잘했다고 박수 쳐줄 것 같아.
“지명수배자라곤 하셨지만 정말 대 단한 분이긴 한 모양이에요. 이런 마법도 쓰실 줄 알고 …….”
아벨은 몹쓸 약을 만들어다 준 얼굴 모를 하데스의 측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토속성의 최종 개방 능력자는, 마탑에 있다는 솜씨 좋은 대마법사 빼고는 소설 속에 나온 적 없었기에 나는 모른다.
그 대마법사조차 그냥 언급만 있을 뿐 등장도 한 적 없었다.
내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인물들 이 자꾸 등장하는 건 조금 걱정됐지만, 그래도 짱짱한 능력자가 측근이 라는 점은 다행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아벨이 무릎을 당겨 안으며 중얼거렸다.
“토속성의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마력만 충분하다면 아버지의 능력보다도 더요.”
“그렇겠죠. 그만한 마력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서 문제지만.”
“제가 조금 더 강했다면, 영애가 이 렇게 고생하지 않으셔도 될 텐 데……. 별 쓸모가 없어서 죄송해요.”
“갑자기 얘기가 왜 그렇게 돼요? 꼭 공자님 잘못인 것처럼 말하네.”
나는 바로 반박했지만 아벨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씁쓸한 듯 옷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더 강해지고 싶은데……. 아버지처럼, 최종 개방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틈만 나면 낮은 자존감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기 바쁜 우리 아벨을 보며 나는 한숨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 정독용, 소장 용, 일러스트 추가 한정판까지 세 부 나 보유 중인〈페르소나〉를 가져와 아벨에게 읽으라고 하고 싶었다.
곧 누구보다 강해질 자신의 미래를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 세계 관 최강자라니…….
“어휴, 공자님. 그런 걱정 좀 하지마세요. 공자님은 곧 전하보다 더 강 해지실 거예요.”
“헤헤 ……. 네.”
아벨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역시 믿는 눈치는 아니 었다.
됐다. 나중에 넘쳐나는 마력에 놀라 지나 말렴.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한숨짓고 있 으려니, 아벨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그런데, 죄송한 말이긴 한데 영애.”
“네?”
“영애가 너무 예뻐서, 어쩔 줄을 모 르겠어요. 원래도 요정 여왕님 같았 는데, 이렇게 작아지시니까 정말, 정말 예쁜, 예쁜 요정 같아요.”
뺨을 붉힌 아벨이 입술을 물며 부르 르 떨었다.
저건 귀여워 죽겠는 아벨을 볼 때마 다 내게서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저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아무리그래도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지.
.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라 니…….
과연 로판 남주의 대사다.
나는 괜히 뿌듯해진 마음을 감추며 머쓱해하던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나 말했다.
“제가 실제로 요정은 아니지만, 공자님. 사실 저한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특별한 능력이요?”
“후후…….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 고요, 저한테 소원을 빌면 나중에는 놀랍게도 다 이루어지거든요.”
“네에?”
“정말이에요. 그건 저도 그래요. 에스클리프에 있을 때 아아, 루버몬트 공자님이 그렇게 귀엽다던데 한번 만 나 뵙고 싶다,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 게 됐는 걸요.”
“하하……. 그게 뭐예요.”
“정말이에요. 속는 셈 치고 소원 한 번 빌어보세요. 무조건 공자님이 바 라는 대로 이루어질 테니까요.”
이 타이밍에 아벨이 빌 소원이란 뻔했다.
아버지처럼 강하게 해주세요. 얼른 화속성 능력을 개방하게 해주세요. 최종 개방 가능하게 해주세요.
뭐, 그중 하나겠지.
내가 소원 들어줄 능력 있는 요정은 아니지만, 저건 굳이 누군가에게 바 라지 않아도 이루어질 일이었다.
아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나는 당당하게 요정을 사칭하며 말했다.
그런 나를 보며 방긋 웃던 아벨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 다가 말했다.
“음, 그럼요.”
“네, 말만 하세요. 진짜 다 이루어 져요. 안 이루어지면 제가 책임질게요.”
“저는…….”
어차피 뻔할 아벨의 소원을 기다리 고 있던 나는, 덧불이는 그의 수줍은 말에 멍해지고 말았다.
“……영애가 아무 데로도 떠나지 않고, 평생 저랑 있어주셨으면 좋겠 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