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하데스의 말에, 나와 아벨은 동시에 넋이 나갔다.
“뭐라고요?”
“오해는 마. 뭐, 딱히 죽을죄를 지 어 지명수배자가 된 건 아니니까.”
“아니…….”
“해서 몸을 숨겨야 하지. 이 근처에는 머무를 수가 없어서 거처가 꽤 먼 곳에 있어. 전령을 보내면 가는 데 한 달 반, 오는 데 한 달 반이야.”
“대체 …….”
나는 황당했다.
절로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끼 며 내가 중얼거렸다.
“지명수배자씩이나 되는 분이 퍽이 나 믿을 만하겠네요…….”
“하아 …….”
허망한 몸짓으로 의자에 앉은 하데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내질렀다.
나는 의아한 점이 있어 바로 물었다.
“그럼 대체 저번에 마력억제제 성 분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아 오신 건데요?”
“그건, 그러니까 …….”
의자 위에 다소곳이 서 있는 나를 보며 입술을 물던 하데스가 말했다.
“녀석은 마법으로 포털이라는 걸 열 수 있어. 순간적으로 이동이 가능하니 그때는 빨리 불러낼 수 있었 지.”
“포털요?”
한가롭게 놀랄 상황은 아니 었지만, 꽤 흥미로운 주제였다.
포털로 순간이동까지 가능한 세계 관이었던가?
잠시 놀랐지만, 생각해보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와……. 혹시, 토속성 능력자인가 요? 그 사람 …….”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면 분명 토속성의 최종 개방 이 능인 창조일 터였다.
내 질문에 하데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토속성 최종 개방 능력자 지.”
“어머.”
귀가 솔깃했다.
제국에 몇 없다는 최종 개방 능력자 가, 벌써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몇 명이야?
하데스에, 곧 최종 개방에 성공할 아벨, 그리고 아자르…….
또 하데스의 최측근이라는 그 얼굴 모를 능력자까지.
대단한 인물들과 아주 단단히도 얽 혀 있는 사람이 었구나, 하데스는.
그런데 일단 감탄하기 전에…….
“그럼 그 포털이라는 거 열고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하라고요!”
“그게! 그게 문제가, 좀 있어.”
“무슨 문제요!”
“포털은 심심할 때마다 마음대로 열 수 있는 게 아니야. 마력 소모가 엄청나서 한 번 열면 며칠 정도는 마력 회복 기간이 필요하지.”
“그게 …….”
……일주일이나 걸린다는 말이었구 나.
나는 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창조라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면, 세계관 최 강자는 그 사람으로 묘사되었을 거다.
아벨 또한 창조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지만,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한 줄의 설명만 있을 뿐 딱히 그 능력을 사용하는 에피소드는 없지 않았 는가.
여 러 속성 중 가장 전능함에 가까운 만큼 막대한 마력치를 요구하기에, 생각보다 쓸모없는 능력.
순간이동 가능한 포털 하나 만드는 데에도 일주일이나 되는 쿨타임이 필 요하다니.
허망하게 내가 중얼거렸다.
“그럼 전 그동안 어떻게 해요. 어떻 게 하냐고요 …….”
힘없이 늘어지는 나를 빤히 바라보 던 하데스가, 천천히 다가와 무릎 꿇 고 가만히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엄청나게 커진 얼굴이 부담스러웠 지만 그나마 잘생겨서 다행이었다.
원망으로 가득한 내 눈을 마주보며 하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당분간은…….”
“…….”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뭐요?”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황당한 표정으로 하데스를 보고 있는이데 그는 지극히 진심인 모양이었다.
진지한 눈으로 작아진 나를 바라보 며 고민하던 하데스는, 이내 긴장한 듯 꿀꺽 침을 삼키며 손을 뻗어왔다.
그가 날 위협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엄청난 크기 차이에 절로 몸이 움츠 러졌다.
무서워서 살짝 감았던 눈을 떠보니 앞에는 하데스의 손바닥이 펼쳐진 채 놓여있었다.
“뭐……. 올라오라고요?”
하데스는 답이 없었다. 긍정인 모양이었다.
뭐 이리 황당한 상황이…….
더 말할 힘도 없어진 나는, 망토처럼 몸에 두른 아벨의 크라바트를 단 단히 붙잡고 천천히 그의 손 위로 올라갔다.
꿀꺽.
그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까지 귀에 선명히 들릴 정도였다.
하데스는 나를 손바닥에 올린 채 천천히 무릎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으앙…….”
하데스의 손 위는 제법 안정적이었 으나 엄청난 높이에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크라바트를 불잡 고, 한 손으로는 하데스의 손가락 하 나를 쥔 채 그의 손바닥 위에서 오들 오들 떨었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케이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개미 같은 꼴로 일주일이나 버텨 야 한다니.
‘가스펠 백작은?’
당장 오늘 도착할 백작을 혼쭐내주 겠다는 내 계획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억울해진 내가 빽 소리쳤다.
“전하는 바보야!”
“미, 미안…….”
붉어진 뺌으로 사과하는 하데스에 나는 그저 한숨지었다.
알고 그랬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가 걱정돼 천만 노르트나 들여 약을 공수해온 그였으니 계속 탓할 수 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어떡할 거예요? 곧 가스펠 백작님도 올 텐데.”
“어쩔 수 없지. 그대는 몸이 아파서 방에 있는 걸로…….”
“안 그래도 절 못마땅해하는 분이 뭐라 구시렁거릴지 뻔하네요.”
“아프다는데 뭐라겠어? 일단은, 일 단은 일주일 동안 잘 숨어 지내 고……. 그리고 일단, 그 …….”
하데스는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다가, 곧 귀를 붉힌 채 고개를 틀 며 말했다.
“……내 주머니에 있자.”
“제가!”
그때 아벨이 펄쩍 뛰며 끼어들었다.
“제가 할래요! 영애는 제가 주머니에 넣고 다닐게요!”
황급히 끼어드는 아벨을 내려다보 던 하데스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안 돼. 잘못하다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 바보 아니예요!”
“안 된다니까?”
“싫어요. 제가 데리고 다닐게요. 저 도 영애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요.”
“네가? 이 아비보다?”
심각한 상황인 것도 잊고 하데스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뭐야, 유치해.
“저도 할 수 있다고요!”
“내가 할 거라니까?”
“그만!”
내가 빽 소리를 내지르자 둘의 시선 이 그대로 모여왔다.
와…….
붕어빵인가? 뭐 이렇게 닮아 있지?
안 그래도 닮았다곤 생각하고 있었 지만, 거인처럼 커진 두 얼굴을 번갈 아 보니 심히 놀라웠다.
나는 잠시 둘의 잘생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사람한테 선택 권을 줘야 하는 거 아니예요?”
내 말에, 하데스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아벨을 슬쩍 내 려다보았다.
아벨은 왜인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하데스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깜빡, 깜빡.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던 하데스가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대에게 선택권은 없어.”
“뭐래!”
“그게 뭐예요, 아버지! 억지예요!”
“억지 아니다! 까딱 잘못해서 떨어 뜨리기라도 했다간 개죽음이란 말이야. 아벨이 나만큼 그대를 안전하게 데리고 있을 수 있겠어?”
“할수있다니까요?”
“조용! 일단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몸이 작아져 그런지, 내 목소리가 둘에게는 위협 적으로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말하면 잘 들어주려 하는 건 다행이었다.
다시 내게 모인 두 쌍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리고 말했다.
“일단, 앤을 좀 불러주세요. 옷부터 어떻게 좀 하게.”
***
하데스의 비상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앤은 연신 바느질하며 잔 소리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전하 도 전하세요. 잘 알아보고 먹이셨어야죠. 성안 사람들에게 보이기라도 하면 뭐라고 변명하시려고요? 네?”
하데스는 꾸중 듣는 아이처럼 앤과 마주앉아 머쓱한 듯 뺨만 긁적일 뿐이었다.
앤의 옆에 나란히 앉아 나를 걱정스 러운 눈으로 보고 있던 아벨마저 하데스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앤이 말하는 족족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불퉁한 표정으로 하데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뭐라고요? 제약사업 하다 가 지명수배자가 된 마법사요?
허……. 왜 그런 위험한 사람이랑 연 락하고 계시는 건데요?”
“위험한 놈은 아냐 …….”
“아니긴요. 전 이렇게 사람을 개미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는 마법사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아가씨가 이렇게 된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그분은 무사하시겠어요? 그분과 연락하고 지내시는 전하는요? 어휴, 대체 가…….”
앤은 적잖이 화가 난 듯했다.
아버지가 에스클리프로 돌아가고 난 이후, 우리는 하데스의 허락 아래극적으로 재회했다.
영문도 모른 채 감금된 나를 걱정하 느라 며칠 새 살이 쪽 빠진 앤이었는 데, 그새 또 사달이 나니 어 지간히 하데스가 미운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높으신 공작 전하인 데, 앤은 꼭 그의 엄마처럼 잔소리하는 데 거리낌 없었다.
“제가 봤을 때 전하께서는 조금 신 중하지 못하신 경향이 있어요. 이번 일도 제게 귀띔 좀 해주실 수 없었나 요?”
“어, 그…….”
“아가씨가 아무 말 하지 말라셔서 참고는 있었는데, 아가씨 감금하셨을 때 말이에요. 세상에 무슨 이런 무뢰 한이 다 있나 싶어서 정말 놀랐답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을 각오하고서 아가씨를 데리고 여기서 도망가고 싶 었다고요.”
신전이나 아버지의 얘기를 앤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진 못했다.
다만 감금 사건은 이러저러한 이유 로 하데스와 짜고 친 거라는 해명을 했을 뿐이다.
이해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앤은 여전히 하데스에게 불만이 남은 모양이었다.
날 아끼는 앤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지 하데스는 삼십 분 넘게 이어지는 그녀의 잔소리를 그저 묵묵히 들었다.
“자, 다 됐어요. 아가씨.”
솜씨 좋은 앤의 손에서, 하얀색 손 수건 한 장이 한 벌짜리 옷으로 완성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벨의 크라바트를 두르고 있던 내가 하데스를 물끄 러미 돌아봤다.
이제 이걸 갈아입어야 하는데.
내 눈빛을 이해했는지 하데스가 허 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앤의 옆에 앉아있던 아벨도 마 찬가지였다. 그도 후다닥 몸을 일으 켰다.
부자는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창 가를 바라보며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