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몸이 약한 그대에게 딱 필요한 거 야.”
“와! 뭐 영양제 같은 거예요?”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효 능이지. 아무래도 마법으로만이든 거 니 까 말이야.”
하데스는 한층 더 뿌듯해진 목소리 로 덧붙였다.
“기력 회복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체력 증진에 근력 보호까지 완벽한 그대 맞춤형이야. 주문하는 데 고생 좀 했다고.”
“세상에……. 그런 건 어떻게 만드 는데요?”
“꽤 능력 있는 녀석이 있어. 전에 억제제의 성분을 분석해준 놈이지.”
“오오……!”
나는 감탄하며 약병을 들고 살폈다.
은은하게 일렁이는 푸른색 액체는 그저 물약 같은 느낌이었다.
평범해 보이는데 그런 대단한 효능이 있다니…….
“색이 엄청 예뻐요…….”
“그쵸?”
반짝이는 눈으로 함께 약병을 지켜보던 아벨의 말에 내가 동의했다.
“재주가 좋으신 분인가 봐요.”
“약 만드는 재주만 좋은 것도 아냐? 아는 것도 많고 능력도 좋고, 무엇보 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녀석이니 약의 효능은 의심하지 않아도 돼.”
“에이, 당연하죠. 누가 의심한대 요?”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하데스의 표 정이 미묘해졌다.
“뭔지도 모르고 마력억제제를 먹어 와 놓곤, 태평한 소리 하기는.”
“마력 억제제요?”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옆에 애도 있는데 별말을…….
나는 살짝 눈을 찡긋해 하데스에게눈치 줬지만, 그는 홍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입을 쭉 내밀고 내가 중얼거렸다.
“믿는다 그래도 뭐라 그러시네, 참…….”
“항상 경계하는 걸 멈추지 말란 뜻이야. 누가 그대를 위협하려고 들지 모르는데 그렇게 안이하게 굴 면…….”
“이건 전하가 준 거잖아요.”
말을 자르고 단호히 끼어드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의 말대로 주변 경계는 열심히 하는 중이에요. 그건 걱정 마세요. 그렇지만 저도 마음 편히 고민 없이 믿어도 될 만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 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
“네! 저는 전하가 주는 거라면 뭐든 의심할 생각 없어요! 설사 이게 독이 라고 해도 기쁘게 마실 수 있다고요.”
그 말에,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하데스가 시선을 비틀며 붉어진 뺨으로 헛기침했다.
“하, 진짜…….”
사이에서 나와 하데스를 번갈아 바 라보던 아벨이, 왜인지 뺨을 붉히며 헤헤 웃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귀엽게 양손으로 턱을 괴어 꽃받침 하곤 나를 향해 말 했다.
“그래도 독은 마시면 안 돼요. 아버지는 믿으셔도 되지만.”
“맞아요. 전하가 제게 못 먹을 걸 주시겠어요?”
“헤헤 …….”
“으음, 그나저나 천만 노르트나 하는 걸 꿀꺽하려니 조금 죄송하고……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되나 싶긴 하지만 …….”
작은 충격에도 픽픽 휘청거리는 안 쓰러운 몸이긴 했지만, 전생에도 그 랬듯 건강에 딱히 신경 써본 기억은 없었다.
그건 여기 와서도 그랬다. 앤이 하 도 극성이라 조금씩 운동은 하긴 했 어도…….
어쨌든 이렇게 챙김 받은 적은 처음 이 었던지라, 조금 감동이 었다.
감사인사를 덧붙이려는데 코가 쭉 올라간 하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뭐든 받아도 돼. 앞으로도 계속. 적어도 그대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80억 노르트보다는 훨씬 대단 한 것들을 해줄 테니까.”
“풉.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이거, 그냥 마시면 되는 거죠?”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데스를 보며 나는 약병을 열었다.
제법 달콤한 냄새가 났다.
주저 없이 약병을 기울여 한입에 털 어 넣자, 냄새만큼이나 달콤한 맛이 혀끝에 느껴졌다.
“음…….”
“어때? 뭐가 좀, 달라진 게 느껴져?”
“바로 반응 오는 거예요?”
영양제 같은 게 아니라 먹자마자 뭔가 달라지는 악마의 열매 같은 건 가…….
그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차가운 느낌만 났을 뿐, 특별히 바로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의아해하는 하데스를 마주보며 나도 함께 고개를 갸웃하는 와중이었다.
문득 뱃멀미를 하듯 머리가 어지럽 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
“……왜? 무슨 …….”
“영애?”
그 순간이 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듯하 더니, 한순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 간 것처럼 시야가 암전되었다.
“아이샤!”
“여, 영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지러움은 거짓말처럼 사라졌지만 암전된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듯 소리치는 하데스와 아벨의 목소리가, 꼭 귀청을 꿰뚫을 것처럼 엄청난 데시벨로 들려왔다.
나는 연신 아이샤! 하고 외쳐대는 하데스의 목소리를 피해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귀청 떨어질 것 같아…….
그리고 조금씩, 시야가 익숙해졌을 때 깨달았다.
시력을 잃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두웠는데 적응하고 보니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이불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달 까?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내 위에 덮여있던 큼지막한 무언 가가 황급히 걷혔다.
한순간 밝아진 시야에 찌푸린 눈을 겨우 떴을 때.
나는.
“아아아악! 이게 뭐야!!!”
무시무시한 거인처럼 커진 하데스와 아벨의 놀란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 치지 않은 그야말로 태초의 모습이었 으므로.
“악!”
무작정 알몸을 가리며 몸을 움츠리 자 둘이 황급히 몸을 트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 움직임마저도 굉장히 위협 적이었다.
인간들의 발아래 기어 다니는 개미의 기분이 이러할 텐가.
“이게! 악! 이게 뭐…….”
당황한 마음에 허둥거리자 하데스 도 똑같이 우왕좌왕했다.
“이, 이, 이, 이게 대체, 일단, 일단, 어…….”
“영애! 이거요!”
패닉에 빠져 몸을 튼 채 허둥거리는 하데스보다는 아벨이 빨랐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튼 채로 목에 걸려있던 자기 크라바트를 풀어 내게 건넸다.
당장은 몸을 가릴 것이 필요했기에 나는 아벨이 건네는 하얀색 크라바트를 냉큼 받아들었다.
그마저도 무거운 이불처럼 느껴지는 터라 받아들면서도 힘에 부쳤다.
받아든 크라바트로 대충 몸을 가리 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하데스와 아벨이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커진 줄 알았는데, 내가 크라바트 한 장도 못 되는 크기로 줄어든 거였다.
아니, 대체 왜? 갑자기?
‘약 …….’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는 하데스가 기력보충제랍시고 준 물약이었다.
“이 개자식이 …….”
여전히 고개를 비튼 채 하데스는 무 시무시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그 또한 적잖이 당황한 얼굴인 걸 보면, 내게 이 약을 알고 먹인 건 아 닌 듯했다.
그러면 이 약을 만들어줬다는 사람 이 장난을 친 건가?
“아버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 요?”
놀라 묻는 아벨을 마주보며 하데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었다.
“아무래도, 그게 …….”
“이게, 이게 뭐예요, 전하…….”
끼어드는 내 작은 목소리가 들렸는 지 하데스가 입술을 우그러뜨렸다.
그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 었다.
험악하게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욕 지거리를 중얼거리다가, 곧 낭패라는 듯 얼굴을 쓸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약 때문에 그런 거 맞죠?”
“아마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서요!”
“하, 젠장…….”
하데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 클어뜨렸다.
아벨의 크라바트로 대충 몸을 가렸 음에도 여전히 시선을 비틀고 있던 그가, 쭈뼛쭈뼛 다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꼭 제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작 아진 나를 응시하며 허, 하고 탄식했다.
“어떻게 내 믿음을 1초 만에 배반할수있어!”
“빌어먹을 …….”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하데스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숨지 었다.
“당장 그 사람 데리고 와요! 이거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있는 거죠?”
“어어, 가능은 한데 그게…….”
“가능은 한데?”
“당장은 힘들어.”
“네?! 왜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아니, 그, 그게 말이 돼요? 그럼 얼마나 이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건데 요?”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며 생각하던 하데스가 말했다.
“지금부터 한…… 일주일 정도는…….”
“뭐어라고요?!”
“나도 미치겠군!”
“악!”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하데스에 또 고막이 터질 뻔했다.
“아버지, 조용히 좀 말해주세요.”
똑똑한 아벨은 눈치껏 하데스를 진 정시켰지만, 흥분한 그는 그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귀를 막고 몸을 움츠리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안절부절못했다.
“왜, 왜 그래?”
“모, 목소리 좀 작게 해주세요. 귀 가 너무 아파요.”
“아! 젠장! 그래, 그렇겠군. 알았어. 미안. 미안해.”
하데스는 곧바로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며 사과했다.
그는 곧 정신 사납게 턱을 문지르며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영애 …….”
아벨은 허망한 표정으로 내 앞에 무 릎 꿇고 눈 맞추며 중얼거 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젠장, 젠장, 젠장…….”
하데스는 뭔가 해결책을 떠올리려는 것 같았는데, 표정을 보니 당장은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 었다.
덩달아 답답해진 내가 소리 쳤다.
“대체 무슨 이상한 사람을 믿는다고 데리고 계신 거예요!”
“맞아요!”
울상이 된 얼굴로 아벨이 맞장구 쳤다.
한순간에 죄인이 되고 만 하데스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믿을 만한 녀석이긴 해. 나한테 죽고 싶은 생각이 아니었다면 고의는 아니었을 거야. 워낙 가지고 다니는 약이 많다 보니 내게 다른 걸, 잘못 준 모양인데.”
“아니, 애초에 이렇게 작아지는 약 은 왜 만든 거래요? 어디 쥐구멍에 들어갈 일이라도 있나? 다시 커지는 약도 있는 거 아니예요?”
“……있지.”
“전령이라도 보내서 받아오면 되잖 아요.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답답해진 내 물음에 하데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놈이, 그러니까 말이야. 제국 황실이 쫓고 있는 지명수배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