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순간 놀란 아자르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아무리 불쾌한 감정의 오오라라도, 검은빛은 본 적이 없었다.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암속성의 오오라다.
당황한 아자르와 아이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암속성 능력자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는데, 그녀 자체가 암 속성 능력자였다고?
아니,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고유의 오오라는 숨기거나 속일 수 없다. 여자는 분명 백속성의 능력자였다.
‘백속성 능력자라고? 그러면, 저 가 장자리에서 불쾌하게 꿀렁이는 검은 빛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두 가지의 속성을 가진 제국인?
듣도 보도 못했다.
아자르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붙잡으며 계속 아이샤를 응시했다.
왜인지 자신을 풇어져라 바라보는 아자르에, 아이샤는 적잖이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
‘가중스럽기는!’
무심코 그녀와 딱 달라붙어 앉은 아벨이 걱정되었다.
아벨에게로 슬쩍 시선을 돌린 아자르는 이번에도 놀랐다.
‘뭐지? 아까 내 앞에서 능력을 개방한 게 아니 었던가?’
아벨은 분명 에스클리프 남작의 전 서를 태울 때 발화의 능력을 사용했 었다.
발화는 화속성의 2차 개방 능력이다.
자신과 하데스를 비롯해 주변에 워 낙 능력자가 많아 그렇지, 2차 개방 능력도 엄청난 마력 수치를 요구했다.
그렇게 따지면 아벨의 주위에도 하데스와 같은 적색의 오오라가 나타나 야 했는데…….
‘달라진 게 없잖아?’
아벨의 주위에는 여전히 기분 좋은 빛들이 뒤섞인 감정의 오오라뿐이었다.
‘내 눈이 뭔가 잘못된 건가?’
여러모로 틀린 것들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데…….
혼란에 잠겨있던 아자르의 시야에 불쑥 하데스의 얼굴이 끼어들었다.
그는 퍽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말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확, 눈을 파줘야 정신 차릴래?”
“아…….”
당황한 아자르가 눈을 한 번 깜빽여 천리안에 쏟고 있던 마력을 거두었다.
비로소 단조로워진 시야에, 자길 씹 어 먹을 듯 무시무시한 표정의 하데스만 잡혀 들어왔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꼴을 보니 우스운 질투였다.
제 아내 될 사람을 무례할 정도로 빤히 쳐다본 게 적잖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쯧.’
역시 하데스답지 않다. 아자르는 속으로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뭐? 다른 생각?”
“아, 말실수.”
“너, 이……. 제대로 말 안 해? 무슨 다른 생각?”
“아, 거……. 예비 공작부인의 미모 가 대단하신지라 잠시 정신 좀 팔았 습니다. 됐습니까?”
“뭐?!”
발끈하는 하데스를 무시한 아자르의 시선이 다시 한번 아이샤를 스쳤다.
‘대체 저 여자는, 뭐지?’
아자르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여자.
역시, 너무나도 의심스러웠다.
***
하데스의 전쟁터 동지들, 루버몬트의 ‘정예군’이라 일컬어지는 병사들 과의 저녁 식사는 무난했다.
딱 한 사람, 대체 내게 왜 적의를 표 하는지 모를 아자르 로만, 그와의 사 건만 빼고.
「죽고 싶나?! 대놓고 내 앞에서 그 런 말을 해? 감각이 짐승 같은 놈이 니 눈알만 태워도 밥값은 하겠지? 」
「아, 그러시든가요. 누구 손핸지 한번 봅시다. 」
한 마디도 안 지는 그의 괄괄한 성 격은 원작 그대로였다.
하데스는 능청스러운 아자르의 모습에 부글부글 속 끓는 듯했지만, 정말로 그의 눈을 태우거나 하지는 않 았다.
티격태격하기는 했어도 둘 사이에 서 느껴지는 깊은 유대감이나 신뢰를 읽지 못할 내가 아니 었다.
[하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거룩 한 사막의 전사 아자르는, 슬픔에 잠 긴 자신의 어린 주군에게 무릎 꿇으 며 새로운 충성을 맹세했다.]
하데스의 사후에 아벨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그 장면.
그것을 기점으로 눈물 닦고 일어난 아벨의 화려한 영웅담이 시작됐지.
그때도 얼마나 전율이 일었던가.
내가 괜히 아자르를 만나고 싶어 했 던 게 아니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사막의 전사!
그 용맹함과 어울리는 멋진 충성 심!
그만큼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도 손에 꼽을 것이다.
그리고 하데스와 아벨에게 명백한 호의를 가진 측근이었고…….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
난 정말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왜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유라도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좋을 텐데, 아자르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씩씩거리는 하데스를 무시하 고 식사 내내 나를 힐끔거리다가, 접 시를 비우자마자 휭 식당을 나섰을 뿐이다.
‘가서 대놓고 물어봐?’
속으로 열심히 고민하던 중에, 손가 락 끝에 작은 온기가 느껴 졌다.
“아!”
아벨과의 약속대로 정원에 산책을 나온 길이었다.
저녁 산책은 많이 해본 적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른 곳이라면 추워서 엄두도 못 낼 텐데…….
따뜻한 온실, 빛을 내는 화려한 수목들 위로 요요히 내려앉은 달빛까지 저녁의 정원은 실로 완벽한 분위기였다.
이상한 아자르의 태도만 아니라면, 걱정 없이 아벨과 산책을 즐겼을 텐 데 …….
“후 ……. 공자님, 미안해요. 제가 또 다른 생각을 했나 봐요.”
“아자르 때문이시죠?”
“아, 아니예요.”
“걱정하지마세요. 아직 영애랑 친 해지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을 다 내다본 듯, 아벨은 해맑 게 웃는 얼굴로 나를 위로했다.
이런 천사 같으니…….
“아, 맞다. 할 얘기 있다면서요? 산 책 나오면 해주기로 했었죠?”
“네! 그거 말인데, 헤헤 ……. 제가 불의 능력, 그거, 연습하고 있었잖아요.”
“맞다! 나도 그 얘기하려고 했는 데! 이번에 가스펠 백작님이 오시면 요, 공자님. 백작님이 연습 도와줄 필 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세요.”
“……네?”
그 늙은이가 아벨을 구박하는 꼴을 절대 두고 볼 수 없다.
아벨이 폭주하게 된 계기일지도 모를 그 늙은이의 도 넘는 참견을 곱게 보고 넘겨줄 생각, 추호도 없다, 이 말씀이야.
당황하는 아벨과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곤, 내가 말했다.
“연습은 계속 해야 하겠죠? 그건 이제 내가 도와줄게요.”
“네?”
“앞으로 제가 매일매일 공자님이 연습하는 거 옆에서 봐준다는 말이에요. 가스펠 백작님 말고, 내가 도와줄 거예요.”
“아…….”
“그러니까 내일 백작님이 오셔서 봐주신다고 하면, 제도움받고 있으 니 굳이 도와주실 필요 없다고 꼭 말 씀하세요. 아셨어요?”
내 말에 아벨이 큰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영애가…… 매일매일?”
“네. 저한테 비밀도 털어놨으니 문 제 될 거 없잖아요? 아, 그리고 제가 말했던 거 기억하죠? 전하께는…….”
“네. 영애한테 사실대로 말한 거 숨 길게요.”
“네. 저는 모르고 있는 거예요? 공자님이 무속성이라는 것도, 전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도 전부.”
“네, 네. 알겠어요.”
아벨은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끔씩 서운한 표정을 짓곤 하는 하데스를 떠올렸다.
아닌 척해도, 짧은 시간에 빨리도 친해진 나와 아벨이 신경 쓰이지 않을수 없을 테다.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벨의 세계에는 거의 하데스뿐이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나와 아벨이 안 친해졌으면, 하고 바랄 하데스는 아니었다.
하나 이 중요한 비밀을 만난 지 고 작 한 달 된 내게 아벨이 술술 털어놓았다는 걸 안다면?
나한테라면 상관없지만, 아벨에게 서운해하거나 실망할 하데스의 모습 은 왜인지 보고 싶지 않았다.
최애와 차애의 애틋한 부자 사랑에 훼방 놓을 순 없지.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공자님의 비밀을 말해준 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전하께서 서운해하 실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내 맘 이해하죠?”
“그럼요. 저도 아버지께 혼날까 봐사실 조금 걱정되긴 했어요.”
“으이구,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말 하지 말라니까.”
양 뺨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으며 말하자 아벨이 배시시 웃었다.
“네, 앞으로는 잘 숨길게요. 물론 영애께는 아무것도 안 숨길 거지만.”
안 숨겨도 다 아는 나지만…….
그래도 좋다고 나를 잘 따르는 아벨의 모습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 했다.
“아무튼 능력을 연습하는 건 저랑 하는 거예요. 사실 제가 뭐 가르쳐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옆에서 매 일매일 응원해줄 테니까…….”
“그, 그걸로도 충분해요!”
아벨은 작은 주먹을 꽉 쥐고 흥분한 얼굴로 곧바로 소리 쳤다.
“그쵸? 그러니까 가스펠 백작님이 오면 꼭…….”
“네! 네! 필요 없다고 말할게요!”
조금 망설일 줄 알았는데 아벨은 들 뜬 얼굴로 단호하게 소리쳤다.
암, 그래야지. 이렇게 강하게 나와 야지.
기특해진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아벨이 기분 좋은 듯 배부른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렸다.
‘으…….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던 내 손을 잡아 제뺨에 비비적대던 아벨이 생긋 웃어 보였다.
“허윽…….”
또 심장에 무리가 와…….
가슴을 불잡고 아픈 척을 하자 아벨 이 작게 코웃음 쳤다.
“이제 안 속아요.”
“오오…….”
역시 우리 아벨, 눈치 빠르기까지!
“아, 그런데 무슨 말 하려고 했었 죠? 그게 제일 궁금했는데, 얘기하다 보니 딴 데로 새버렸네.”
“아…….”
내 말에 잠시 멍하니 탄성을 내뱉던 아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굴렸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방긋 웃고는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별 거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