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열한 살 생일?
이거, 느낌이 싸한데…….
내가 읽은 건 무난히 치러진 아벨의 후계자 공표식이 아니었다.
[그의 열한 살 생일 때였다. 비로소 전부 발현한 네 가지의 이능들은 충 돌하기 시작했다. 정신 붕괴는 순식 간이었다. 극한의 고통이 어린 몸을 차마 가눌 수 없게 만들었다.]
[아벨이 정신을 잃기 전에 본 것은, 아버지 루버몬트 공작의 다급한 얼굴이었다.]
그 따위의 비극적인 내용이었지.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능력들의 충 돌. 그건 생리현상처럼 어쩔 수 없는 거였나?’
아니, 생각해 보면, 아벨이 정신 붕 괴로 고통스러워할 때에는 항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데보라가 납치당했을 때라든가.
당장 전쟁터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서, 부상당한 데보라의 상태를 알게 되었을 때라든가.
‘뭐, 그랬었지.’
아벨의 안에서 능력들이 충돌할 때는, 뭔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벨의 정신을 흐트러뜨 리게 만드는 상황들.
하데스는 내게 가르쳤다.
마력을 사용할 때는 정신을 집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그것은 다시 말해 시전자의 정신 상태가 마력을 발현하는 데 크게 관여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아벨에게 ‘첫’ 정신 붕괴를 일으킨 상황은 무엇인가?
‘아벨은 공표식 때까지 발화의 능력을 개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거야.’
공표식을 앞두고도 화속성의 능력을 개방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초조 함.
그리고 그 초조한 어린 마음을 부추 긴 건…….
‘빌어먹을 늙은이.’
공표식 전까지 여러 번 성을 찾아와 아벨을 닦달했을, 가스펠 백작이 틀림없었다.
문득 저쪽 세계에서 어릴 때 재미나 게 봤던 만화영화 하나의 장면이 머 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뭐 대충, 선택받은 지구의 아이들이 디지털 세계로 뚝 떨어져서 작고 귀 여운 몬스터들과 힘을 합쳐 세상을 지키는 내용이었는데…….
친구 몬스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데에 강박적이었던 주인공의 닦달로, 친구 몬스터는 잘못된 진 화를 하면서 폭주하고 말지.
뭔가 능력들이 폭주해 정신 붕괴를 겪은 우리 아벨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자고로 아직 덜 자란 어린아이들에게는 훈계나 닦달보다 격려와 응원이 훨씬 효율적인 법이거늘.
‘가스펠 백작의 잘못된 교육 때문이 었던 게 분명해.’
확신한 나는 피어오르는 화를 감출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벨 앞에서 티를 낼 순 없어서, 겨우 억지웃음을 띤 채 말했다.
“공자님.”
“네, 영애.”
“제 말 잘 들어요. 공자님은 지금 물의 힘도, 바람의 힘도, 땅의 힘도 쓸 수 있잖아요? 그것도 2차 개방까 지 마쳤죠?”
“네에…….”
“그게 무슨 뜻이냐면, 불의 힘을 2 차까지 개방할 수 있는 마력도 충분 히 있다는 거예요. 그냥 불의 힘을 시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지 못한 것뿐이지. 이해했어요?”
“……네.”
“아예 가능성이 없다면 모르겠지만공자님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러 니까 절대로 초조해할 필요 없어요. 공자님은 공표식 전까지 분명히, 전하처럼 멋지게 봉화할 수 있을 거예요.”
내 말에 아벨은 조금이지만 자신감을 얻은 듯, 뺨을 붉히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해. 나는 아벨의 머리를 쓰다듬 어주며 칭찬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곧 성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늙은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여념 없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하데스가 원작에서 죽었던 이유는 가스펠 백작 때 문인 거 나 마찬가지다.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었으나 화가 안 날 수가.
내 아들을 아프게 하고, 내 남편을 요절하게 만든 게 그 깡마른 늙은이의 입방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니.
“가스펠 백작께서 언제 오신다던가 요?”
나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붙잡 고, 위협적으로 팔을 붕붕 휘두르며 물었다.
아벨이 흠칫하며 침을 한번 꿀꺽 삼 키더니 말했다.
“이를 후에…….”
“아이고, 저번에는 제가 경황이 없 어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는데 이번 에는 아주 정성스럽게 대접해드려야 겠어요.”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허튼소리로 아벨을 신경 쓰이게 한 다면 나는 기꺼이 그 늙은이의 뺨이 라도 한 대 올려붙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교 사상 충만한 동방예의지국 출신이 아무리 그래도 어찌 연장자의 뺨을 칠 생각을 하냐고?
웃기지 말라 그래. 나이 허투루 먹 은 건 어른 대접해 줄 필요 없다 배 웠다.
‘가스펠 백작, 진짜 이번엔 임자 만 났다. 죽었다, 넌.’
나는 코앞에 가스펠 백작이 있다고 상상하며 연신 팔을 푸는 데 집중했다.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벨의 시선이 갑자기 비껴간 건 그때쯤이었다.
“어!”
“공자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인기척이랄 게 없었는데?
화들짝 놀라 돌아본 곳에는 큰 석상 하나가 있었다.
아니, 석상이 아니구나.
“허억…….”
2m는 되어 보일 법한 커다란 키.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다는 큼지막한 석상이구나, 착각할 정도로 어마무시한덩치.
정돈되지 않은 채 흐트러진 타오를 듯 붉은 머리칼과, 섹시하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
얼굴 위로는 콧등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와 함께 자잘한 영광의 상처들이 가득했다.
끝으로, 얇은 남성용 실내복이 터질 듯 늘어나 살려달라고 외치는 듯한 환청이 들리는 가슴 근육까지 확인한 나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자르!’
그였다. 아자르 로만.
어제 새벽에 돌아왔다는 토벌대의 대장.
아벨의 전쟁터 동지.
하데스부터 아벨까지 이어지는 루버몬트 공작들의 최측근.
“아자르!”
아벨이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치며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쪼르르 달려오는 아벨을 아자르가 거뜬히 안아들었다.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응!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제가 언제 다치고 돌아온 적 있었 습니까.”
아자르는 빙긋 웃으며 아벨의 뺨을 한번 쓱 쓰다듬었다.
아벨의 머리통보다 큰 주먹이 그의 뺨을 스칠 때 나는 흠칫했지만, 다행 히도 걱정되진 않았다.
성의 고용인들 전부를 어려워하던 아벨이 저렇게나 잘 따를 정도라면, 이미 둘의 유대는 지금부터 완성되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호감을 가진 인물들 중 하나이 기도하지만, 일단 아벨에게 호의적 인 사람은 내게도 아군이었다.
내적 친밀감을 물씬 느낀 내가 아자르에게 인사하기 위해 멍하니 앉아있 던 몸을 일으켰다.
“아자르는 처음 보지? 이쪽은 에스클리프 영애셔.”
아자르는 나를 한번 힐끔 보더니 꾸 벅 고개를 숙였다.
무뚝뚝한 성격이었나?
호탕하고 괄괄하고 말 많은 상남자 스타일이었던 것 같은데…….
첫 만남이라 긴장한 걸까?
아무튼, 나는 화답하기 위해 웃으며 살짝 허리를 기울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로만 경. 아이샤 에스클리프라고 해요. 지금은 공작 전하의 은혜로 잠시 성에서 신세지고 있답니다.”
최대한 상냥한 귀족 영애답게 첫 인 사를 건넸건만, 왜인지 아자르는 건 방지게 고개를 한번 끄덕할 뿐이었다.
……뭐지?
그의 반응이 의아해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아벨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자르? 영애가 어떤 분이냐면, 아버지와 결혼을 앞두고 계신 남부 에스클리프 영지의 귀족이셔.”
“그래서요?”
“어, 어? 그래서라니? 음……. 그러 니까 영애는 곧 루버몬트의 안주인이 되실 분이라는 말이야. 공작부인 말이야. 그리고 내 어머니이기도 하 고 …….”
“아직 아니잖습니까?”
“뭐, 뭐?”
“해야 하는가 보다, 하는 거지요. 아직 도장도 안 찍었을 텐데 뭘 공작부인입니까? 뒷말하기 좋아하는 하녀 애들이 수군거리니까 호칭 가려 쓰십 쇼.”
허어…….
뭐지? 이 맥락 없는 적의는?
우리가 언제 만난 적 있었나? 아니 면 우리 가문에 뭐 원수라도 졌나?
나는 아자르의 선명한 적의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성격상, 이유 없이 저렇게 굴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아벨이 빽 소리 질렀다.
“왜! 왜 그렇게 영애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거야? 다, 당장 사과해줘! 아, 아자르는 바, 바보 멍청이야.”
내가 충격 받을까 걱정됐는지, 아벨 은 연신 내 쪽을 힐끔거리며 아자르 에게 화냈다.
아자르는 꼭 태양처럼 빛나는 선명 한 금안으로 나를 꿰뚫을 듯 바라보 다가, 꾸벅 고개 숙였다.
“무례했다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그게 무슨 …….”
사과인지 시비인지 모를 아자르의 태도에 아벨은 정신이 쏙 빠진 모양이었다.
아벨은 곧 내려달라며 허우적거렸 지만, 아자르는 되레 그를 안은 팔에 단단히 힘주곤 홱 돌아섰다.
“가시죠. 애들이 오랜만에 공자님 얼굴 본다고 기대하고 난리도 아닙니다.”
“싫어! 내려줘!”
아자르는 그대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아벨의 절규를 들으며 나는 황당함에 한참,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
아벨의 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아이샤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아자르가 미워서 오는 길에 울며불며 난리를 쳤던 탓이다.
방에까지 와서야 겨우 아자르의 품에서 벗어난 아벨이 작은 솜주먹으로 그의 허벅지를 퍽퍽 치며 울었다.
“왜! 왜 그러냐고! 왜!”
“공자님. 저 여자가 공자님의 어머, 님이 될 일은 없으니까 괜히 정 주지 마십쇼.”
“그걸 왜 아자르가 정하는데! 왜! 영애처럼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 없는 데, 아자르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 늘 처음 만나봤으면서!”
“아뇨. 저 여자만큼 수상한 사람 없 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어차피 지금부터 전하께 가서 고 할 생각이니, 먼저 말씀드리죠.”
아자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어떤 기억을 더듬었다.
“토벌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제가 사냥을 했지 뭡니까. 전령새 한 마리를 잡았거든요.”
“그게 뭐가 …….”
“보통 전령새는 아니고, 아주 음침 한 마물 까마귀였습죠.”
차분한 아자르의 음성을 따라 아벨의 훌쩍임도 멎어들었다.
아이샤에게 무례하게 군 건 참을 수 없었지만, 아자르는 확실히 이유 없 이 그렇게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다.
겨우 제 말을 들을 준비가 된 듯한아벨을 내려다보며 아자르가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보통 인간들은 마물을 전령새로 못 부립니다. 아주 음흉하고 못된 검 은 마법사들이나 전령새를 부리거든요.”
“그게 영애랑 무슨 상관인데?”
“그 마물 까마귀로 검은 마법사와 내통하던 인간이, 저 여자의 아비거 든요.”
“……뭐?”
“백속성 가문이라고 들어서 하마터 면 저도 깜빡 속을 뻔했습죠. 중간에 수상한 그 까마귀 새끼를 못 잡았으 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
“검은 마법사. 그러니까…….”
아자르는 무릎을 굽혀 아벨과 눈높 이를 맞춘 뒤, 그를 겁주듯 눈에 힘주 고 말했다.
“저 여자의 가문은 암속성 능력자 와 내통하고 있어요. 아주 무섭고 수 상한 사람이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