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 아버지…….”
아벨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 곁에 무너져 앉은 채로 하데스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멍한 눈으로 한참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그의심리상태를 엿보는 건, 그 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자기가 세뇌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평정심을 잃고 당황스러 워하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제아무리 하데스라 할지라도, 처음 만나보는 암속성 능력자에 대한 두려 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거다.
말도 없이 아벨이 사라졌다는 걸 알 았을 때, 아마 심장이 툭 떨어진 기분이었겠지.
정신이 나간 것처럼 한참 침묵하며 숨만 고르는 하데스가 안타까웠다.
“전하…….”
“후…….”
그는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안심이 된 듯, 눈을 가린 채 한 숨지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흐트 러진 그의 모습은, 전혀 그답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꼭 그다웠다.
아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울먹거 리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대체 왜…….”
눈을 가린 손을 내리고 하데스가 아벨을 응시했다.
안도하는 표정이었지만, 아벨을 향한 걱정은 여전했다.
역시, 아벨이 소설의 종막까지 하데스를 그리워했던 데에는 이유가 없을 수 없었다.
이런 아버지를 어떻게 잊을 수 있었 겠어.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키는 거냐? 응?”
“……죄송해요.”
주눅 들어 사과하는 아벨을 가만히 응시하던 하데스가 천천히 팔을 열었다.
“이리 와라.”
훌쩍이던 아벨이 기다렸다는 듯 하데스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죄송하다며 울먹거리는 아벨을 안 고 하데스는 지그시 감은 눈으로 다시 숨을 골랐다.
서로가 소중한 그 마음이,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졌다.
그저 그들을 보고 있을 뿐인 내 마음까지 절절해질 정도로…….
‘나도…….’
저들 사이에 있을 수 있을까?
문득,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대로도 둘은 행복하지 않을까, 그 런 생각이 들어서.
저 모습을 곁에서 보고 같이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사람일까?
나도 내가 누군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지기 만할뿐이었다.
***
그날 저녁, 정말로 미하일은 돌아가 겠다던 자신의 말을 지켰다.
얼른 갔으면 좋겠다고 방에 틀어박 혀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는데 효험 이 아주 톡톡했다.
멀리서 성을 나서는 신전의 행렬을 보며 얼마나 안도했던지.
물론 마냥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갑자기 마음 바뀐 미하일이 당장이 라도 나를 보쌈해 신전으로 데려가면 어쩌나 싶어 겁먹었지만, 하데스는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아무 생각 말라며 내 걱정을 일축했다.
사실 미하일뿐 아니라, 그를 만나고 나서 꾼 꿈 때문에 고민할 거리가 한 둘이 아니었던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안이한 성격은 아니었 는데…….
하데스가, 걱정할 일을 만들지 않겠 다고 말하면, 정말로 그럴 일을 없애 버릴 사람이라서일까?
누구도 못 믿겠는 페르소나 속에서 그를 향한 나의 의존도가 점차 커지 고 있었다.
이러다가 하데스 없으면 혼자 밥도 못 먹는 거 아닌가…….
아무튼 신전 일은 그에게 맡겨두기 로 했고, 하나 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성에 머물고 있던 아버지.
자기도 남부로 돌아가겠다며 전해온 아버지에게 하데스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물론, 나는 절대 데려갈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아버지는 분해하는 듯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단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영지라도 영주없이 오래 비워둘 수는 없었으니, 어 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터.
떠나기 전에 그의 상태를 한번 보고 세뇌를 풀어보겠다는 내 요구를, 하데스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퍽 합리적인 가정으로 나를 만 류했다.
「한 명의 대상에게 한 가지 세뇌밖에 걸 수 없다고 했잖나? 뻔하지. 그 대에게 마력억제제를 꾸준히 먹이라 고 세뇌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루버몬트 공작가와는 절대 엮이지 말게 하라는 명령이었을 거야. 」
「뭐가 됐든 세뇌가 아닌 부분은 에스클리프 남작의 의지였을 테고. 」
「에스클리프 남작에게 무슨 세뇌 가 걸려있든 그는 내게 위협이 못 돼. 괜히 그대의 마력을 낭비할 필요 없단 얘기야. 」
「보아하니 아주 오랫동안 세뇌 상태였던 것 같은데, 잘은 모르지만 그런 깊은 세뇌를 풀려면 그대의 마력 이 더 많이 필요하겠지. 절대, 안돼. 」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했다.
마력을 사용할수록 주변에서 시전하는 마법을 감지하는 데 무뎌지므 로, 하데스는 내가 웬만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절대 능력을 사용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아버지의 세뇌를 풀 필요는, 확실히 없어지긴 했다.
출처도 모르는 약을 딸에게 꾸역꾸 역 먹여올 사람은 아니었으니, 분명 약을 복용시키라는 세뇌를 당했을 거다.
그렇다면 약의 성분을 알게 된 지금 은, 정말로 세뇌를 풀 이유가 없었다.
반복적으로 걸어 엄청 짙어졌을 세뇌를 또 풀었다간 분명, 무효화를 사 용했을 때만큼이나 힘들 테고…….
그렇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고, 결혼 허 락을 받아야 하는 거였는데!
「그, 그럼 우리 결혼 안 해요? 무 르는 거 아니죠? 아니면 역시 탈적하는 게 나을까요? 」
「그건 걱정하지마. 」
하데스는 예의 그 자의식 넘치는 표 정으로 웃으며 내게 품 안에서 꺼낸 한 장짜리 전서를 내보였다.
그걸 읽은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친애하는 루버몬트 공작. 공의 서 신은 잘 받아보았소.
공이 지적한 크레센타 제국 혼인 제도의 문제점에 짐도 동의하는 바요.
하여 레지슬라스(*크레센타 제국의 입법기관)에 혼인법을 개정하도 록 황명을 내려두었소. 다만 법 개정 에는 일정 기간이 필요한 바, 약간의 시일이 걸리는 점은 공이 감안해주어 야겠소.
길지는 않을 것이니 법이 개정되는 대로 연락 주겠소.
루버몬트 영지에 무한한 영광과 발전이 있기를 바라며, 황제 발록 프랑 세즈 크레센타.]
나라법도 마음대로 개정해버리는 비선실세가 있다?!
“진짜 아직도 안 믿기네.”
오랜만에 평화를 찾은 이튿날 아침, 나는 하데스가 내게 안겨다 준 황제의 ‘친필’ 서신을 읽고 또 읽는 중이 었다.
놀라움에 절로 고개가 내저어졌다.
벌써 스물여섯 번은 넘게 읽는 중인 데, 읽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부모의 허락 없이도 혼인과 관련한성인의 자유의지가 인정되도록 법을 개정해달라는 요구를 한 듯한데 …….
이걸 아버지도 모르고, 나도 모르 고, 아벨도 모르고, 가신들도 모르게 황실에 연락 넣은 것부터가 놀라웠다.
전령들이 황실과 루버몬트 영지를 오가며 서신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을 따져봤을 때, 아버지가 와서 결혼을 반대하자마자 연락을 취한 게 틀 림없었다.
치밀한 남자 같으니라고.
게다가 서신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무려 ‘황제’씩이나 되시는 분의 절절매는 모습!
‘소설에선 얼마 등장 안 해서 몰랐 는데, 대체 이제국에서 얼마나 큰 권 력자인 거야?’
모르긴 몰라도 하데스는 아마, 계급 장 따위 안 떼도 황제를 어찌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황제를 하지…….”
아무튼 하데스는 말만 번지르르한 남자가 전혀 아니 었다.
자꾸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며그냥 아무런 걱정 없이 배부른 곰처럼 있기를 바라곤 하는데, 실제로 그 래도 될 것만 같았다.
생각할 게 많은 와중에 아버지의 반 대에 부딪힌 결혼 문제는, 애초에 막 막해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황제의 서신을 건네주며 하데스가 의기양양하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 라,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자, 결혼. 」
누가 들으면 멋대가리 없는 프러포즈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얼굴이 개연성이었으므로 나는 그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괜히 부끄러워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 누군가 내 얼굴을 본다면 놀랄 것이 분명했다.
난, 잘 빨개지는 편이었으니까.
열기가 가라앉기 전에 누군가가 내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무색하게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샤.”
어우,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데스라니.
“저, 전하?”
“들어간다.”
“자, 잠깐. 아…….”
별 효과는 없을 듯하지만, 나는 달 아오른 얼굴 위로 손부채를 파닥거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하데스가 나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그는 성큼성큼 거리를 붙여오더니 물었다.
“얼굴에 화염구라도 맞았어?”
역시나 손부채 정도로는 식힐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게요. 저한테 능력 사용하신 거 아니예요?”
“흐음…….”
왜인지 음흉하게 웃던 하데스가 내 맞은편에 털썩 몸을 앉히고는 말했다.
“뭐, 뻔하지만 내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나 보지.”
와……!
저 재수 없는 자의식 과잉……!
그러나 사실이었던지라 반박할 수 가 없었다.
멋쩍게 코를 쓱 훔치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오셨어요?”
“오면 안 돼? 이제 부부 사이인데.”
“아직 결혼 안 했잖아요.”
“금방 해. 누구 부탁인데 황실이 질질 끌겠나? 지금쯤 레지슬라스에서는 법전 다시 쓰느라 정신없겠군.”
“그냥 황제 하시지.”
“귀찮아.”
안 귀찮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건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치는 나를 보며 마주 웃던 하데스가, 역시나 찾아온 이유가 있었던 듯 입을 열었다.
“그…… 저번에 말했던, 테그롯 산 맥에 토벌 보냈던 군대 말인데.”
“아, 맞다!”
“어제 새벽에 돌아왔거든.”
“어머, 그랬군요.”
“음……. 그런데 말이지.”
“저도 한번 만나봐야 하는 거 아닐 까요? 전하가 아끼는 정예 부대 아닌 가요?”
하데스의 말을 듣자마자 어렴풋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아자르. 아자르 로만.
그러니까 아벨의 충신이나 다름없 던 전쟁터 동지, 풍속성 제국인으로 활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자였다.
원래 그는 하데스의 군대를 통솔하는 대장격 전투병이었는데, 하데스가 죽은 뒤론 쭉 아벨의 곁에 남아있었다.
아벨과 같이 루버몬트를 지키고 출 정 행렬에도 빠진 적 없던, 퍽 비중 있는 조연.
그는 사막 국가의 피가 섞인 혼혈 로, 짙은 구릿빛 피부와 거구의 덩치를 지녔다고 자주 묘사되곤 했다.
저쪽 세계에서 그 비슷한 느낌의 외 국 배우를 덕질해 본 기억 있는 나는, 북부에 올 때 아자르와의 만남도 내 심 기대했었다.
그러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아마 테그롯 산맥에 토벌보냈던 군대에 끼어있겠지.
나는 조금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만나고 싶어요! 저도!”
“어, 그래……. 안 그래도 그것 때 문에 온 거야. 새벽에 오자마자 예비 공작부인을 내놓으라고 잠도 안 자고 나를 들들 볶길래…….”
앗.
하데스의 군대가 나를 보고 싶어 한 다는 말에 조금 설렜다.
뭐랄까…….
대한민국 전통 결혼식에는 그런 게있었지.
초롱불 켜고 함 가지고 들어오는 남편과,그 친구들 만나기 전의 느낌이 랄까?
“볼래요! 볼래요!”
“아니, 그놈들 성격이 좀 거칠어 서……. 평생 전쟁터에서만 굴러먹던 녀석들이라 난폭하고, 예의도 모르 고 …….”
“이해해요! 이해해요! 볼래요!”
흥분해 테이블을 쾅쾅 내려치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불만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