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나와 아벨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두런두런 이 야기를 나눴다.
아벨은 내게 파르넬리 공저에서 무 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는데, 당연 히 사실 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미하일을 조심하라는 얘기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잠깐.
“공자님!”
벌떡 몸을 일으킨 내가 다급하게 아벨을 불렀다.
같이 울어주느라 눈이 퉁퉁 부은 채 아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젠장 …….
울어서 눈 부은 얼굴도 이렇게 귀여 우면 반칙이잖아.
너무 귀여운 걸 보면 코끝이 찡해지 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그 기분을 아는가?
심각한 상황인 것도 잊고 덥석 아벨을 끌어안자 그가 작게 웃는 게 느껴 졌다.
“왜요, 영애?”
“아! 전하께서 별말씀 없으셨어요?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든가…….”
“…….”
아벨을 떨치고 물으니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깜빡깜삑, 눈을 감았다 뜨는 얼굴을 보니 앙큼하게 뭔가를 숨기는 모양이 었다.
“했죠, 전하가?!”
“음…….”
“말을 들었어야죠! 혹시 여기 오는 길에 대신관을 만나지는 않았어요?”
“아무도 안 만났어요. 그리고 영애 방 앞을 지키던 호위도…….”
아벨은 우물쭈물하더니 멋쩍게 옷으며 말했다.
“영애의 방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 게 지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저는 아버지의 허락을 맡았다고 하니까 열어 줬어요.”
“아, 다행이다. 전하께 허락 받고온 거였구나?”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내 모습에 아벨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아버지 방에서 절대로 나가 지 말라고 하셨는데 …….”
“……네?”
“영애가, 걱정되어서요. 나중에 혼나겠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화낼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아벨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시선을 피했다.
하데스의 말을 어긴 건 분명 잘못이 었지만, 내가 걱정되어서 여기까지찾아왔다는 이 천사에게 어찌 화를 내겠는가?
나는 한숨 쉬며 아벨의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그런데 전 정말 괜찮아요. 앞으론 아빠 말 안 들으면 안 돼요.”
“네에 …….”
“약속.”
몸을 떼고 새끼손가락을 들이밀자 아벨이 망설였다.
“그치만…….”
“응?”
“아버지가 영애를 만나지 말라고 하는 말은 듣기 싫어요. 약속할 수는 없어요.”
“아…….”
그건 사실, 나도 그래.
하데스의 말이라면 뭐든 듣겠지만, 아벨이랑 만나지 말라고 한다면 그건 좀…….
내가 못하는 걸 아벨에게 약속시킬 수는 없지.
나는 속으로 합리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이 아벨의 앞에 들이밀었 던 손을 내리고 나는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좋다고 품으로 파고드는 온기에 가 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런데 전하의 눈을 어떻게 피해 서 나온 거예요? 같이 있었던 거 아니예요?”
아벨을 안은 채로 묻자, 그가 내 품 안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있다고 잠시 나가셨어요. 그 틈에…….”
“아유, 진짜.”
나는 다시 아벨을 품에서 떼어내고 눈을 맞췄다.
“전하께서 방에 꼭 붙어있으라고 했던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예요. 오면 서 별일 없었죠, 정말?”
“네. 그런데 정말, 공저에서 아무 일도 없으셨던 것 맞아요? 왜 아버지 도, 영애도 대신관님을 무서워하는 느낌인지 모르겠어요.”
“아, 그건…….”
다시 미하일 이야기가 나오자 마음 이 착잡해졌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 데…….
나는 아벨을 당겨 다시 침대 위에 누이고는,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자연스럽게 안겨드는 아벨을 꼭 안고 나는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살짝 가져다 붙였다.
약간의 마력을 운용해 세뇌 상태를 파악했지만, 하데스 때와는 달리 느 껴지는 게 없었다.
다행히 아직 미하일이 아벨에게까 지는 손을 뻗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분명 아벨에게 허튼짓을 하려고 하겠지?
이유가 뭘까…….
“음, 별일은 아니고요. 대신관님께 서 제게 신전으로 들어오라고 하셨거든요.”
“아!”
아벨이 놀라며 품 안에서 파닥거렸다.
“여, 영애의 힘 때문인 거죠? 백속성 사람들은 다 신전에서 살아야 하 니까.”
“아……. 다는 아니지만, 저는 그래 야만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저는 공자님이랑, 전하랑 여기 계속있고 싶어서…….”
“안 돼요!”
“……네? 뭐가?”
“가지 마세요! 안 돼요!”
벌떡 몸을 일으킨 아벨의 표정을 보 고 나는 놀랐다.
날카로운 하데스의 눈매와는 달리 강아지처럼 동글동글했던 아벨의 눈 이 왜인지 날카로워져 있었다.
게다가 붉은 눈동자가 꼭 타오르는 것처럼 일렁이는 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제 아빠랑 꼭 닮아 있었다.
아벨이 정말로 하데스와 피 안 섞인 양자가 맞는지, 진실을 알면서도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제가 대신관님을 만나서 말하고 올게요. 아무리 대신관님이라도 절대 로 영애를 데려갈 수 없어요.”
아벨은 엄청나게 무서운 표정으로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갔다.
내가 다급하게 아벨을 잡아 세웠다.
“안 돼요! 대신관님이랑 그냥 마주 치는 것도 안 된다니까요!”
입술을 물며 돌아보는 아벨의 표정에 나는 흠칫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무심결에〈페르소나〉의 내용 어느 한 부분 이 떠올랐다.
설렘사할 뻔했던 그 장면.
「내가 너를 그 사지에 보낼 것 같 아? 절대로 안 도가. 너는 내 옆에 있어 야 해. 나 말고 널 지킬 수 있는 사람 은 없어. 」
크레센타 제국 황실에서 전쟁 통에 신전에 인력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착한 여주 데보라는 기꺼이 부상당 한 병사들을 위해 그 사지로 가기를 결심했으나, 아벨은 단호했다.
루버몬트 공작가를 견제하기 위해 병력 요청을 하지도 않고 자존심 세 우며 고전하던 황실이었기에, 지루하 게 반년 넘게 이어오고 있던 전쟁.
아마 그때의 출정은 미하일의 세뇌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데보라가 고생하는 게 안타까웠던 아벨은 결국, 군대를 이끌고 떠난 지 일주일 만에 전쟁을 종결시키고 돌아왔었지.
사랑하는 내 여자를 향한 집착!
절대 너 위험할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다정남에 가까웠던 아벨이 박력 있 게 데보라를 위해 출정을 결심했을 때, 그 사람 설레게 만들던 대사!
「너는 내 옆에 있어야 해. 」
“커헉…….”
호흡 곤란에 본능적으로 가슴을 붙들자 아벨이 금세 놀란 눈이 되어 내게로 달려들었다.
“왜, 왜 그러세요?”
박력은 다 자라고 나서야 갖추는 줄 알았더니, 이미 어렸을 때부터 완성된 것이었나?
하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당연하지.
“제가, 공자님 옆에 있었으면 하는 거죠……?”
“아뇨.”
“으잉?”
“있었으면 하는 게 아니라, 있어야 돼요. 영애는 어디 못 가요. 가지 마 세요.”
아벨은 울 것처럼 흔들리는 눈에 힘을 빡 주고는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 렸다.
세상에…….
항상 다정했던 아벨에게 박력 넘치 게 집착 당하는 기분…….
새롭고 짜릿해.
“네, 네……. 조, 좋아요. 공자님에게라면 얼마든지요. 감금해주세요.”
“……네?”
아니, 이 입방정.
“아, 아니요. 이게 아니라. 아무튼…….”
나는 여전히 당장이라도 미하일에게 달려갈 기세인 아벨을 잡아 눕혔다.
아벨은 당장 미하일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주었다.
나는 아벨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
“공자님은 아직 어리잖아요.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아요. 전하 가 다 해주실 건데 무슨 걱정이에 요?”
“…….”
“걱정하지마세요. 전하께서 약속했어요. 대신관이 저를…… 데려가지 못하게 해주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나는 걱정스러웠다.
꿈을 꾼 이후로는, 신전으로 가게 될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꿈을 꾸면서 알아낸 사실들이 두려웠다.
그게 그저 망상이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페르소나〉작가의 필명이 프로크레아토르라는 게, 그저 우연이 아니라면?
나는 제누스라는, 신에게 버림받은 암속성 능력자의 기억을 엿보았다.
그것이 그저 그녀의 기억을 엿본 것인지, ‘내’ 기억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확신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도 모르고…….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내가 그저 이 세계로 끌려 들어온 평범한 독자가 아니고, 혹시나, 혹시 나…….
‘내가 제누스라면.’
빌어먹게도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자식을 죽였던 날이 기억 속에 선 명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식의 목을 조르던 그녀의 벼 랑 끝에 내몰린 심정이, 놀라우리만 치 내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나를 괴 롭혔다.
머릿속에 아벨라의 기억이 떠올랐을 때, 전혀 공감할 수 없던 심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었다.
“영애.”
문득 내 손을 꽉 잡아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아벨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운 상상.
‘만약 내가 정말 그녀가 맞는다면 말이야, 아벨…….’
신에게 받은 벌로 반복되는 삶에서 항상 자식을 죽여야 하는 운명인, 그 녀라면.
‘이번 생에서 내가 죽이게 될 그 아이는 누굴까?’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알 게 될 것이다.
전생뿐 아니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그 빌어먹을 능력은, 사랑하는 자 식을 죽이고야 마는 불쾌한 운명을 보여줄 테니까.
“영애.”
아벨이 다시 한번 나를 불렀지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때 문득 얼굴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창을 열어놓은 것도 아닌데 가만히 불어온 바람은 가볍게 내 뺨을 어루 만지듯 맴돌았다.
내 뺨을 스친 바람은 뭔가를 홀어내 며 계속 휘돌았다.
왜인지 젖어있던 뺨이 말랐고, 눈앞 에는 작은 물방울 몇 개가 떠올랐다 가 말라 사라졌다.
“아…….”
나도 모르는 새 울고 있었던 모양이 었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내 눈물을 닦아준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왔는지 알것 같았기에 더 놀랐다.
작풍 (作風).
바람을 만들어내는 풍(風)속성의 능력.
이곳에 풍속성 능력자는 없었지만, 능력을 사용한 게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아벨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기울여웃으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아직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제가 더 강해질게요.”
“…….”
“저는 영애를 꼭 지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