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밖과는 집무실을 사이에 두고 있어 소리가 새어나갈 일까지는 없었지만, 하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닫힌 서재 문을 힐끔 확인했다.
“목소리 낮춰라.”
“아니, 아니……. 어, 어떻게 이 상황에서 목소리를 낮추지라? 이건, 세, 세상에…… 마, 말도 안 되는…….”
하데스가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게 굴었을 뿐이지, 사실 이런 록사의 반응은 당연했다.
백속성의 인재들이 모인 신전을 이 끄는 수장이, 암속성 능력자라니.
록사가 방정맞은 걸음을 이리저리 움직이 며 호들갑 떨 었다.
“이런! 와! 세상에! 어머니!”
“…….”
“맞네. 맞지라. 대신관, 능력이라곤눈곱만큼도 쓰지 못하는 자였지라. 우와, 와, 이게 말이 됨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발발거리던 록사가 문득 몸을 딱 멈추곤 하데스를 보며 물었다.
“하믄 영애께 마력억제제를 먹인 것도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닌가 예?”
“그래.”
“아니, 대체 왜…….”
의아해하던 록사의 표정이 금세 놀라움에 물들었다.
“설마, 설마, 설마.”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 약을 끊고 나서 대충 느끼긴 했지만, 아이샤는 최대 개방은 거뜬할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었어. 어쩌면 나보다도 더 큰 수준일지도 모르겠고, 앞으로도 더 늘겠지.”
“음마야.”
록사가 두 손을 들어 입을 딱 틀어 막았다.
“그라믄 그, 그, 대신관이 영애의 마력을 미리서 알아보고 억제제를 꾸 역꾸역 먹여온 거지라?”
“그렇겠지. 세뇌를 부려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을 텐데, 아이샤가 무효 화를 개방한다면 방해가 될 건 뻔하 니까.”
“아악! 대체 뭘 계획하고 있단 말이 지라?!”
“그것까진 모르겠고. 이제부터 알 아내야지. 아직 성에 있다.”
“예?”
암속성 능력자, 미하일이 성에 있다는 말에 록사는 얼빠진 표정으로 가 만히 눈을 깜빡였다.
한참 멍청한 표정으로 하데스를 웅 시하고 있던 그가 슬그머니 뒤돌았다.
그 순간 허공이 뒤틀리고, 다시 한번 포탈이 열렸다.
미하일의 정체를 알자마자 꽁지를 빼고 도망가려는 꼴을 보니, 암속성 능력자가 여간 무서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하데스가 뒤돈 록사의 로브를 쭉 잡아당겼다.
“컥! 컥! 놔주시지라! 지는 가늘고 길게 살다가 가고 싶단 말이라예!”
“아직 이렇게 벌벌 떨 정도로 강한 건 아니니 걱정하지마.”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아시는데 예?! 꼭 암속성 능력자 여럿 만나본 것처럼 말하시는데…….”
“아직 1차 개방밖에 하지 않은 상태야. 세뇌의 능력도 생각보다 자유 자재로 부릴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더 군.”
“그러니까 그걸 전하가 어찌 아시 지라? 아니, 것보다, 세뇌 능력이 1 차 개방인 건 맞슴까? 그런 사기적인 능력이 겨우 1차 개방일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디…….”
중얼거리는 록사의 표정을 가만히응시하던 하데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 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도 특별히 더 아는 것은 없어 보였다.
아이샤에게 들은 것 외의 정보를 알 아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 데…….
“너 뭐 아는 거 더 없어?”
록사는 고개 저었다. 그의 반응에 하데스가 침음을 삼켰다.
“그럼 역사서 구간에 실린 게, 암속성 능력자들에 대해 알려진 전부란 건가.”
“그렇지라. 한데…….”
“한데?”
뭔가 걸리는 듯 말을 삼키는 록사에, 하데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개정판 집필 전에 스승님께서…… 암속성 능력자에 대해 한 번 언급하 신 적은 있었지라.”
“그래?”
하데스가 눈을 빛냈다.
록사가 말하는 ‘스승’이란, 현재 제 국에서 하데스 다음으로 높은 수준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 알려진 토속성의 대마법사, 위그노어 메이도우였다.
그가 바로 현재 제국에 존재하는 토 속성 최종 개방 능력자 중 한명이었다.
황실 소속인 마탑의 주인으로, 당연 한 말이지만 하데스라도 쉬이 만나기는 힘든 자다.
얼굴을 한번 보려면 분명 황실에 아 쉬운 소리를 해야 할 텐데…….
“그……. 뭐라더라. 스승님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조상님의 비본(秘本) 이 있다고 했어라.”
“비본?”
“메이도우가문이 거의 신처럼 모시는 그 조상님 얘기 모르셔예? 마력 이 화수분처럼 피어나는 대단한 능력자셨다고 하지라. 스승님 말씀에 따 르믄, 신이 음청 아끼셔가지고 자신의 전능함을 나눠준 수준이 었다 하시 대예.”
“확실히…… 마력만 넘쳐난다면 토 속성 능력자들은 신이나 다름없지.”
“아무튼 스승님이 입버릇처럼 하시 던 말씀이 있지라. 때가 되면 가문의 비본에 쓰인 내용을 알려야 할 것이 라고 하셨어예.”
“그 내용이 …….”
“예. 암속성 능력자에 관한 내용이 라고 하셨지라. 그거 빼고는 저도 아는 게 없어예.”
“그렇군. 그럼 위그노어 메이도우, 그자를 만나볼 수밖에 없겠어.”
뜻밖의 수확이 었다.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게 있다면, 하데스는 귀찮음을 감수하고라도 대마법사를 찾아갈 생각이 었다.
“큰 도움이 못 되어서 이거 참, 송구하지라. 안타깝게도 스승님이 따 악, 그 부분을 집필하실 때쯤 제가 사 고 치고 쫓겨났던 것 같으니……. 궁금하시면 마탑을 방문해보시는 게 가 장 나을 것이지라. 스승님이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은 아니시지만, 전하 라믄 문제없지 않겄어예?”
안타까운 듯 록사가 말했다.
그래도 꽤 중요한 사실을 알아내 다 행이었다.
하데스는 괜히 혀를 차며 장난스럽 게 록사에게 핀잔줬다.
“쯧, 도움 안 되는 녀석.”
“에이, 뭐 그리 섭하게 말하시지라? 전하께서도 이 약쟁이 덕 톡톡히 보 고 계심서.”
록사가 히죽 웃었다.
원래 록사 트리볼트는 마탑에서 일 하던 마법사였다.
크레센타 제국 황실에 소속되어 있는, ‘마탑’. 최종 개방 능력자들은 극상의 대우를 받으며 이마탑으로 스카우트되었다.
황실 산하의 기관이기에 능력 사용이나 행동에 제약을 받지만, 그만큼의 부와 권력으로 보상받는 자리였으 므로 웬만한 고수준의 마력 보유자들 은 하나같이 마탑에 입성하길 원했다.
마탑 출신의 록사는 마탑주인 대마법사 위그노어 메이도우의 제일 수제 자였다.
물론 다 과거의 영광일 뿐.
지금의 그는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는 지명수배자신세에 불과했다.
아마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숨겨준 하데스가 아니었다면 진작 황실의 명에 따라 목이 잘렸을 터였다.
이유인즉…….
“아무튼 지가 더 아는 것은 없고, 요거나 팔고 얼른 돌아가 볼라예.”
록사가 품에 숨겨놓았던 작은 약병을 다시 꺼내며 말했다.
그래, 이유인즉, 바로 그가 추진하 려 했던 이 '제약사업' 때문이었다.
토속성의 최종 개방 능력은 '창조'.
상상하는 모든 것을 실재화(實在 化)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으로, 앞서 하데스가 록사를 불러냈던 통신구 나 그가 열었던 포탈도 전부 창조를 통해 만든 것이었다.
물론 대단한 능력이기에 다른 속성의 능력들보다 훨씬 더, 마력의 수치에 구애받는다.
현재 록사의 마력 수치로 어린아이 팔뚝만 한 크기의 포탈밖에는 구현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마저도 포탈은 한 번 열면 일주일 정도는 마력을 충전해야 할 정도로 고량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하여 이 잔꾀 많은 마법사는, 최소 한의 마력을 소모해 창조의 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방 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바로 제약사업.
이 제약사업의 기본 골자는, 타인의 마력으로 발현된 능력을 일시적으로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화속성의 1차 개방 능력 인 ‘발열’이 발현될 때의 힘을 수집한 뒤, 록사는 머릿속에서 그것을, 누구 든 사용할 수 있는 약의 형태로 구축해 창조해낸다.
그러면 사용자가 복용했을 때, 육체의 온도를 높여주는 발열 능력을 지 닌 약물이 탄생한다.
이론적으로는 마법을 수집할 필요 없이 ‘복용 시 발열이 가능한 약을 창 조한다.’ 하고 창조 마법을 시전할 수도 있겠으나, 자신의 속성을 벗어나는 마법을 구현하는 데에는 어마어마 한 마력량이 필요하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록사의 이제약사업은 실로 혁신적이었다.
마력이 거의 없는 일반인들도 편리 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하나 이것을 상업화하는 데 황실은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용신의 후손으로서 막강한 마력 수 치를 자랑하는 황실의 상징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나 록사는 마법을 독점하려는 황실의 행태를 못마땅해했고, 결국 이제약사업을 몰래 추진하다가 마탑에 서 추방되었다.
정확히는 마탑 밖에서도 제약사업을 추진할까 걱정해 황실에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그의 능력을 눈 여겨본 하데스의 도움을 받아 지금은 황실의 눈을 피해 제약 연구를 하고 있었다.
“원래 선불 거래이기는 한디…….”
일전에 백속성의 능력을 닮은 기력 보충제를 만들어보라던 하데스의 주문에 만들어온 약을 건네면서, 록사 가 웅얼거렸다.
하데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해했다.
“돈 안 준댔어? 따라와. 챙겨 줄 테 니.”
“아니, 아니! 아니지라! 지가 전하를 몇 년을 보고 지냈는디 거래는 신 뢰가 기본이 되어야지 않겠어라? 나 중에 대신관이 돌아가믄 다시 한번 찾아뵐 것이지라.”
“……어지간히 무섭긴 한가 보군.”
록사는 서재에서 한 발짝도 나가고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좋다는 돈도 마다할 정도라니.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약병을 하데스의 손에 쥐여주곤 재빨리 포탈을 열었다.
“하도 포탈을 많이 열어 대서 이번 에는 일주일하고도 이틀은 쉬어야겠 어예.”
“통신구 가동시킬 마력도 안 남았 나?”
“당연하지라. 아까 도망가려고 한 번 또 열었어서…….”
“하아…….”
멋쩍게 웃은 록사가 포탈을 열었다.
다시 한번 로브 안에서 새로운 약병을 꺼내 또 그것을 털어 넣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몸이 요정 같은 크기로 줄었다.
해맑은 인사와 달리 록사는 쫓기듯 급하게 포탈 속으로 쑥 뛰어들었다.
“수고하셔라, 전하! 지는 대신관 일 다 정리되고 또 부르셔라!”
***
자신의 연구실로 열린 포탈을 타고 돌아온 록사는, 도로 몸을 키우기 위 해 로브 안에 챙겨둔 약병을 꺼내 무 심코 마셨을 때에야 깨달았다.
갑자기 몸 안에 휘도는 정순한 기 운.
그것은 소 열 마리도 앉은 자리에서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북 돋아주었다.
“어라라라…….”
그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탄성이 터 졌다.
이것은 나흘 밤낮 걸려 만든, 하데스가 주문한 기력보충제가 아닌가?
원래라면 하데스가 예비 공작부인 에게 먹이려고 주문했던 그 알약의 효능이, 왜 지금 자신의 몸에 나타나 고 있는 것인지?
록사가 다급하게 로브 안에 있던 몇 개의 약병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확인했다.
“크, 크, 큰일났구만이라. 내가 뭘 주고 온 것이지라?”
아마도 포탈에 들어갈 때 복용하는 육체축소형 물약이었던 듯한데…….
급히 하데스에게 연락하려던 록사가 멈칫했다.
엄청난 마력이 소모되는 포탈을 세 번이나 열었기에, 통신구를 가동시킬 마력도 안 남아있었다.
록사가 낭패라는 듯 허허 웃었다.
하데스의 노발대발한 얼굴을 상상하던 록사가 힘없이 허공에 대고 중 얼거렸다.
“저, 전하. 나중에 목숨만 살려주시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