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아벨을 남겨두고 하데스는 자신의 집무실로 급하게 향하고 있었다.
걷는 도중에도 머릿속에는 수만 가 지 생각이 맴돌았다.
‘아이샤에게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
그녀가 암속성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아닐 확률이 컸다. 그녀는 백속성 능력자가 확실하므로.
두 가지의 속성을 가진 능력자의 이 야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아벨 같은 아이도 있으니.’
무려 네 가지의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될 무속성의 능력자도 존재하는 마당에, 만나보지 않았다 해서 없 다고 치부할 순 없었다.
다만 그녀의 속성을 확신할 수 없는 대신,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은 사실.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
그것만은 사실일 테고, 평범한 이들이라면 전생을 기억하지는 못하 니…….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어쩌면 아이샤 그녀조차도 모를 비밀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을 꿰뚫어본 것.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했던 ‘암속성 능력자’들의 능력과, 그 대처 방법까지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미하일에게서, 이상한 반응을 이끌어냈던 것.
전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만약 처음부터 아이샤의 핵석이 숨 겨져 있었다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그녀가 암속성이라고 확신했을 텐 데…….
한데 역시.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과 아이샤는 전혀 달라.’
암속성 능력자였기에 백속성의 이 능을 단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는 미하일과 아이샤는 달랐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부터 아이샤는 백속성의 이능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1차 개방 능력인 상쇄부터 시작해 서, 최종 개방 능력인 무효화까지.
자신의 살기에 놀라 본능적으로 미하일에게 무효화의 이능을 걸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두 번째로 미하일에게 자연 발화를 시전했을 때, 하데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력이 상쇄되는 경험을 했다.
확실히 놀라운 능력이 었다.
무효화.
‘그녀는, 정말, 아니야.’
아이샤가 울면서 말했던 대로, 암속성 능력자라고 의심되는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은 그녀를 죽이려 했다.
다만 그 이유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이샤가 성녀의 환 생이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 ‘무효화’의 이능이, 세뇌를 통해 타인을 다루려는 미하일의 목적에 걸 림돌이 됨은 자명한 사실이므로.
‘그러나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면…….’
사랑하던 전생의 연인을 죽여야만 하는 벌?
하데스는 지금 제 머릿속을 혼란스 럽게 만드는 제누스의 예언을 떠올리 며 입술을 짓씹었다.
‘차라리 그냥 아이샤가 성녀의 환생 이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다는 게 낫 겠군.’
찰나에 마주했던 미하일의 애절한 눈빛이 떠오를 때면 왜인지 속이 끓 었다.
하데스는 꼭 자기 자신을 세뇌하듯 속으로 거듭해 읊조렸다.
‘아이샤는 아니야. 아니어야만 해.’
집무실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힌 하데스는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 서 향한 곳은, 내부에 이어진 비밀스 러운 서재의 문이었다.
서재를 열자 펼쳐진 익숙한 풍경.
낡은 서적들의 군내가 가득한 그곳 에는 높다란 책장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미로 같은 그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 지르는 하데스의 발걸음은 퍽 다급했다.
고용인들의 출입을 엄금하는 루버몬트 공작의 서재.
이곳에는, 퍽 비밀스러운 것들이 많 았다.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며 하데스가 서재 깊숙한 곳까지 걸어 당도 한 곳은, 기묘한 무늬가 양각된 나무 장식장 앞이었다.
제법 큼직한 장식장의 크기와 달리, 그것을 열자 보인 것은 허리 높이의 진열대 하나.
그리고 그 위에 비밀스럽게 놓인, 어린아이의 머리통 크기만 한 무색투명의 수정구 하나뿐이었다.
‘약쟁이가 뭔가 쓸 만한 정보를 알 고 있다면 좋겠는데.’
그가 지금 만나고자 하는 이는, 아이샤가 갖고 있던 마력억제제의 성분을 알아내주었던 능력자다.
그는 퍽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였다.
통신의 능력을 가진 이 수정구도, 그가 만들어 낸 것이 었으니까.
익숙한 상대의 얼굴을 떠올리던 하데스는, 통신구 위에 손을 얹고 약간의 마력을 주입했다.
무색투명의 통신구가 시전자의 속성을 따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난 후.
하데스의 머릿속에 퍽 이상한 말투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전달되었다.
[아아, 우리 전하께서 또 무슨 일이 시지라?]
[포털 열고 와라. 얼굴 보고 얘기하 게.]
[아니, 대뜸 뭔 일이시지라?]
[잔말 말고. 급하니까.]
[하아……. 저도 바쁜 몸인디이라고 오라 가라 하시믄…….]
[그래서 안 오겠다고?]
[저번에 마력억제제 때도이라고 매너 없이 사람을 불러내시두니 만……]
[불만인가?]
[아이고, 아이고. 아니지라. 우리 전하 또 흥분하시는 거 보소!]
[말장난 할 시간 없다.]
[알지라, 알지라. 포털 열라믄 준비 좀 해야 허는 거 다 아시는 양반이 왜 무섭게 그라심까. 5분! 5분!]
험악한 하데스의 협박에 금세 꼬리 내린 목소리가 끊겼다.
동시에 통신구에 주입하던 마력을 끊어낸 하데스가 멀지 않은 곳에 놓 인 낡은 테이블을 질질 끌어와 장식 장 앞에 두었다.
이윽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장식 장 안쪽에서는 작은 마력의 뒤틀림이 생겨났다.
어른 팔뚝만 한 크기의 공간이 일그 러지는 듯하더니, 곧 칼로 베어낸 듯허공이 찢어지고 새카만 균열이 일어났다.
그곳에서 요정처럼 작은 몸을 한 남자가 훌쩍 튀어나왔다.
테이블이 없었으면 큰일이 날 높이 였다. 다행히도 남자는 안전하게 그 위로 착지했다.
쓰고 있던 낡은 갈색 망토를 살짝 벗어낸 남자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색 장발을 대충 쓸어 넘겨 정리하 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따, 이번에는 손님 배려가 만족스럽지라. 저번에 이 높은 데서 떨어 지고 꼬박 이틀을 앓았다 아임까?”
“포털 크기가 커졌군. 그새 마력이 좀 늘었나?”
“그래예? 잘 모르겠는디…….”
어깨를 으쓱한 남자는 곧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남자가 꺼낸 것은 검지만 한 크기의 작은 약병이었다. 그는 약병을 열어 찰랑이는 푸른색 액체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순간, 작은 인형 크기와 비슷했 던 남자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매번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
두르고 있던 망토까지 키울 재간은 없는지, 정상 크기로 돌아온 남자는 여느 때처럼 알몸이었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린 하데스가 말했다.
“거 다리 사이에 덜렁이는 꼴 좀 안 보게 못 하나?”
“아니, 별 걸 다 바라시지라. 옷은 돌아오고 나서 입어야지예.”
남자가 작게 손가락을 퉁겼고, 단숨에 알몸 위로는 미색의 로브가 입혀 졌다.
테이블 위에서 다시 한번 훌쩍 내려와 선 남자는, 정상적인 신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그래도 깡마른 편이었다.
창백한 피부나 가느다란 몸의 선은 얼핏 보면 여자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
뜬 건지, 감은 건지 헷갈리는 작게 찢어진 눈매. 그 안의 보랏빛 눈동자 와 긴 은발은 그를 퍽 신비로워 보이 게 했다.
물론 그런 분위기는, 입만 열면 와 장창 깨지고는 했지만…….
남자의 이름은, 록사 트리볼트.
하데스의 최측근이라면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제국에 단 둘뿐 인 토(土)속성의 최종 개방 능력자였다.
토속성의 최종 개방 이능.
바로, 창조.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었다.
상상력의 한계가 없다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신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터였다.
다만 마력의 수치에 무척이나 구애를 받았기에, 적어도 지금 제국에 존재하는 토속성 최종 개방 능력자 중 ‘신’이 된 자는 없었다.
“저번에 주문하셨던 신상 나왔는데 시약 좀 해보실라예?”
“벌써 만들어졌나?”
“그라지라. 건강한 대지의 힘에, 맑 은 바람의 힘에, 정순한 물의 힘까지 샥샥 모아 만든 이 록사 트리볼트 희 대의 걸작!”
록사가 로브 안에서 새로운 약병 하 나를 꺼내 하데스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것만 잡수시면 손목이 꼬챙이 같으시다는 우리 연약한 예비 공작부인께서도 근육 빵빵 벌떡!”
당연하게 그것을 가져가려고 뻗은 하데스의 손을, 록사가 냉큼 피했다.
“단돈 천만 노르트에 걸찬 판매 중!”
“미친?”
“에이, 전하께 그 정도는 굴러다니는 돌멩이 값 아닌가예?”
“이 코딱지만 한 걸 무슨 천만 노르트나 받아먹나? 갈수록 내 둥쳐먹는 사기꾼 기질만 느는군.”
“하—따, 전하 코딱지는 요로코롬크신가 보지라?”
“후……. 알았으니까 일단 이리 내.”
“이잉, 거래 한두 번 해보심까? 선불이지라. 갈 때 드릴라예.”
록사가 히죽 웃으며 약병을 다시 로 브 안쪽으로 숨겨 넣었다.
“한데 뭔 일로 부르셨지라?”
본론을 묻는 록사에, 하데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일전에 마력억제제의 용도를 물으 러 그를 불러냈을 때만큼이나 심각한 표정이었다.
록사가 덩달아 긴장했다.
“뭐, 뭐시지라? 신전에서 영애께 마력억제제를 먹인 일로 사달이라도 난 모양이지라? 지는 관계없어예. 아시 지라?”
록사는 당황하며 슬쩍 발을 뺐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데스가 입을 열었다.
“비슷한데, 더 심각한 상황이야. 혹시 네가 아는 게 있을까 해서 불렀는 데…….”
“뭐시지 라?”
“마탑에서 쫓겨나기 전에, 마법 역사서 저술에 너도 참여했다고 했었 나.”
“예에? 그렇긴 하지마는, 아주 조금……. 절반도 완성되기 전에 쫓겨 났지라.”
“내용은 대충 알고 있을 거 아닌가. 암속성 능력자에 대해서 아는 대로 얘기해 봐.”
“예에에에?!”
록사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보랏빛 눈동자가 절반이나 드러날 정도였다.
“갑자기 그 저주받은 친구들 이야기는 왜 꺼내시지라? 어디서 만나기 라도 하셨음까?!”
“그래.”
“예에에에?!”
물으면서도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지, 록사의 얼굴이 공포 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벗어나셨지라? 아니, 것보다, 어떻게 알아보셨어예? 누굼 까? 짐 어딨어예? 아니다, 바로잡아 태워 죽이셨지라?”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일순, 둘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간의 고요를 깨트린 건, 록사의 비명이었다.
“으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