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왜 옛날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을 까?”
“프로크레아토르. 나는…….”
“제누스. 나는 너를, 그리고 이그니스를 이 끔찍한 형벌의 굴레에서 구할 거야.”
“……아버지께 대적하겠다는 말이야?”
당황스러웠다.
선하지 않기에 전지하고 전능한 그 존재를,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어떻게?
그러나 프로크레아토르의 눈에는, 자신이 가득했다.
만약 아버지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 가 있다면 그것은 프로크레아토르뿐 일 것이다.
아버지는 프로크레아토르를 가장 사랑했고, 그렇기에 유일하게 자신의 ‘전능함’을 주셨다.
프로크레아토르는 땅의 힘을 가진인간이었으며, 써도 써도 줄지 않는 아버지의 마력을 공유하고 있었다.
땅의 힘.
토속성 인간의 최대 개방 능력은, ‘창조’였다.
프로크레아토르.
그야말로 신과 가장 가까운, 신과 가장 닮아있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네가 어떻게…….”
아버지에게 반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나를 이 지독한 형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프로크레아토르의 말에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나는 괴로웠고, 지쳐있었기에.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 사실 내가 아버지에게 반하는 마음을 가진 이후로, 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내 다보셨을 테니까.”
“그러면 아무 소용도 없잖아.”
“아버지가 지금 나를 가만히 두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인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소용없을 것임을 내다보 셨기 때문인지.”
희망 따윈 없어 보이는 내용이었지만, 프로크레아토르는 웃었다.
“해서 내겐 ‘전지함’이 필요해. 너 희들을 위한 내 노력이 그저 물거품 이 되어, 그로 인해 너희들이 영원히 고통받는다면…….”
“…….”
“시도하지 않느니만 못할 테니까.”
그의 말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프로크레아토르는 전능했지만 전지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래를 알 수 있는, 비로소 전지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을 해줘. 혹시…….”
“아버지가 내린 형벌에는, 유일한 실수가 하나 있어.”
“……실수?”
“너는 자식을 죽이기 전에는 죽을 수 없고, 이그니스는 연인을 죽이기 전에는 죽을 수 없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제누스.”
프로크레아토르는 다시 한번 내 이마에 입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알아서는 안 돼. 나는 그래서 많은 것을 숨길 거 야. 그러니까 꼭, 네가 알아주기를 바 란다.”
그는 더 이상, 내게 해줄 말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내게 인사했다.
“내가 꼭 너희들을 자유롭게 만들 어줄 테니.”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프로크레아토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항상 인 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던 신, 가이오니아가 살해당했다.
물론 인간으로서의 육체는 죽임 당 했으나, 가이오니야 자체가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다만 가이오니아는 자취를 감추었 고, 프로크레아토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프로크레아토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확실히 알게 된 것은.
가이오니아를 죽인 것이 프로크레아토르며, 그가 ‘부모’를 죽인 죄로 세 번째 저주받은 자식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암속성 능력자의 전지함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음을 깨 달았다.
***
번쩍 눈이 뜨인 순간,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건 어쩌면 꿈인지, 과거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었을지 모를 그 내용들을, 제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두려워 서였을 것이다.
“하하하하……. 진짜 재미있고 홍미진진한 꿈이었다.”
꿈이겠지. 그저.
“아니, 저쪽 세상에서 작가 외전 쓴 거 아냐? 외전 못 보고 죽은 내가 불 쌍해서 꿈에서라도 보여준 것 같은 데? 맞죠, 작가님?”
다시 ‘님’자 붙일게요.
“그런데 외전 내용이 너무 피폐해요. 그냥 아벨이랑 데보라가 꽁냥대는 에피소드로 채워주시지.”
그러니까 정말, 내가 본 건,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재미있긴 했어요. 대단한 설정이네, 진짜. 사이코패스지만 능력은 인정! 인정, 인정…….”
억지로 웃으려던 내 입꼬리는, 누가 끌어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래로 축 처졌다.
이 세계에서,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전생’을 기억할수 없다.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신에게 버림받은 자식들뿐이고.
그들은 차례대로…….
연인을 죽인 죄를 저지른 이그니스.
자식을 죽인 죄를 저지른 제누스.
그리고, 부모를 죽인 죄를 저지른 프로크레아토르.
내가〈페르소나〉에서 미처 읽지 못했던 내용이자, 알지 못했던 등장인 물들이었다.
나는 이것이 그저 재미있는 소설을 덕질하다가 망상에 빠진 팬의 개꿈이 길 바랐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는…….
“아유, 아이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난 죄짓고 전생 기억하는 걔네 랑은 다르지. 난 그저 책 속에…… 책 속에…….”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 력했지만,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달라?
어떻게 다르지?
이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암속성 능력자들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의 전생은 아니지만 어쨌든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뭐지?
나는 다르다고 할 수 있나?
나만, 이 세계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나?
이 빌어먹게도 치밀한 소설 속 세계에서 어느 하나 우연으로 일어나는 일 따위 없다고, 나는 이전에 내 입으 로 인정했었다.
그렇다면, 마땅한 이유를 가지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흐름 속에서.
과연, 내가 죽고, 전생을 기억하는 채로 다시금 누군가의 몸에서 새로 눈을 뜬것.
딱 그거 하나만.
그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 까?
지금의 난 누구지?
아이샤 에스클리프?
아니면 저쪽 세상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던 비운의〈페르소나〉독자 1?
어느 쪽이 진실이지?
내가 방금 꾼 꿈은, 그저 꿈인가?
아니면…….
내가 새로이 기억해 낸, 여러 개의 전생 중 하나인가?
“아니야…….”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니라고.”
아까 하데스 앞에서 눈물을 줄줄 홀린 이후로 더 나올 눈물 따윈 없을 줄알았는데…….
놀랍게도 더 흘릴 눈물이 남아있었 던 모양이다.
나는 퍽 추한 몰골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깨질 듯한 머리를 무작정 손으로 내 려쳤다.
이런다고 해서, 내 머릿속에 스며든 모든 사실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어서.
「아이야. 너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게 될 것이다. 눈을 뜨는 순간 천천히, 하나씩, 쉴 새 없이 죄를 저질렀던 너의 전생을 알아가게 될 것이고. 」
「그 생에서도 죄를 저질러야 하는 너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자각하는 순간 너의 저주받은 능력이 드러날 것이다. 」
하나 내 의지가 무색하게도, 분명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히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아니야. 내가 아니라……. 그냥 다 른 사람의 이야기야.”
천천히, 하나씩 기억하게 된다는 그 전생이…….
제발 내가 방금 꾸었던 그 빌어먹을 꿈은 아니었기를.
“에스클리프 영애.”
그때였다. 한참 혼란스러움에 정신 이 없던, 그때.
문 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의 목소리 가 상념을 깨웠다.
“공자께서 뵙고 싶다 하십니다. 어 떻게 할까요?”
“뭐라고요?”
아벨?
생각지도 못했던 방문에 내 머릿속 은 하얗게 비어버렸다.
왜인지 지금 이 순간 아벨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야, 뭐가 됐든 좋은 기 분이었다.
벌떡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문을 열 기 위해 달렸다.
얼마되지도 않는 짧은 거리를 몇 번이나 넘어질 듯 다급하게.
이윽고 허겁지겁 문을 열었을 땐, 선물 같은 아벨이 있었다.
“여, 영애…….”
“공자님.”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절로 입술이 비틀렸다.
아벨을 볼 때면 항상 드는 이 기분 은 이제 익숙했다.
떨어져있던 시간이 길지도 않은데, 왜 나는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지 모를 일이다.
놀란 아벨이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 쳤다.
“왜! 왜 우세요? 어디, 어디 다치신 거예요? 아니면 아버지가, 아버지가 영애에게 나쁜 말을 하기라도 했어요?”
눈물이 찬 입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대충 고개만 저어 대답하고는 덥 석 아벨을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아벨이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네? 왜, 왜 그러시냐고요…….”
“공자, 허으……님.”
“아……. 제발요, 영애. 울지 마세요. 아니, 왜 우는지 알려주세요. 영애가 울면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작은 팔로 나를 마주 안으며 아벨은 같이 훌쩍거렸다.
기껏 참아왔던 모든 설움이 한 번에 터지는 기분에, 나는 울지 말라는 아벨의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저느, 어흐, 아무것도 아, 아니예요. 아픈 거 아니예요. 다친 것도 아니고…….”
“그럼 왜 우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
“고, 공자님. 있잖아요. 저, 저 여기 있어도 되는 것 맞죠? 공자님 옆에 있어도…… 괜찮은 것 맞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벨은 나를 달래려는 듯 몸을 떼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제가 영애의 옆에 있고 싶은 거예요. 영애가 제 곁에 없다면 슬플 거예요. 저는요, 아버지랑 떼쓰지 않 기로 약속했지만…….”
아벨은 뚝뚝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가 떠난다고 하면 싫어요. 그 러면, 그런다고 하면, 아버지에게 혼 나더라도 떼쓸 거예요.”
아벨은 다시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마세요. 저를 미워하시거나, 혼내셔도 돼요. 영애 가 저를 아프게 해도요, 그래도 저는 상관없으니까요…….”
내가 왜, 그저 소설 속 인물이었을 뿐인 너에게 그토록 애정을 느꼈을 까?
내가 왜, 너를 그렇게도 만나고 싶 어 했을까?
차라리 그 마음에 어떤 이유가 없었 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인정해야 했다.
그건 그냥, 내 바람일 뿐이라는 것.
아벨, 너와 나는 그냥,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건 아닐까?
이곳은 소설 속의 세계 따위가 아닌 것 같아.
책 속의 세상.
그런 거, 아니었어.
그건 사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깨 닫지 않았던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혹시, 내가 기억하는 전생, 그 세계는…… ‘창조’의 이능으로만들어진곳이 아니었을까?
당신은 아마도 신의 눈을 피해서 창 조한 그 세계에서, 저주받은 자식들을 위해 뭔가를 하려고 했을 거야.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항상 빌어먹게도 선명했다.
프로크레아토르…….
〈페르소나〉작가의, 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