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제 소관의 영지가 아니었지만, 연일 마물들이 난동을 일으켜 황실에서 직 접 토벌을 부탁해왔던 곳이었다.
황실에서 투입한 일당백의 기사들 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끔찍한 곳이었지만 하데스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에 별 걱정이 없었다.
하나 직접 도착해서 본 오비투스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물들은 쉽게 죽지 않았고, 분명 숨통이 끊어졌는 데도 계속 다시 일어나 난동을 피웠다.
완벽히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화속성의 최종 개방 이능인 자연 발 화로, 시체도 남지 않게 불태워버리는 것.
결국 하데스는 예상치도 못하게 막 대한 마력치를 요구하는 자연 발화의 이능을 쉴 새 없이 사용해야 했고, 처음으로 제 힘의 ‘한계’에 부딪히는 경 험을 했다.
고갈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던 마력 이 바닥을 보이는 것을 느꼈으니, 당 시 오비투스에 있던 마물의 숫자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굳이 다시 떠올려 볼 필요도 없었다.
면이 안 서는 일이었던지라 누군가 에게 꺼내본 적은 없지만, 하데스는 그날 오비투스에서 확실히 죽을 뻔했다.
1차 개방도 힘들 정도로 마력이 고 갈되어 겨우 몸을 숨기고 있던 그의 앞에 나타난, 베어도 갈라도 죽지 않는 마수 한 마리.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웬일인지 마 수는 공격을 멈추고 꼭 무언가에 조 종당하는 듯 멍한 상태로 허둥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의 문의 여자는 상처투성이의 하데스를 이끌어 숨겨주었다.
그녀가 바로 제누스였다.
그는 그녀에게 도움받았다.
낡아빠진 거처에서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와 지내고 있던 그 의문의 여자에게.
제누스는 고갈된 하데스의 마력이 회복될 때까지 정성껏 그를 돌봐주었 고, 보답을 하겠다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아벨을 부탁했다.
「저 아이를 데려가 주세요. 」
「그냥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켜만 주세요. 아직은 어려서 혼자 살아남기 힘드니까요. 저 아이가 자 라서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걸 압니다. 저 아이가 전하에게 폐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
왜인지 제누스는 하데스를 아주 잘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아벨을 만나기 전까지, 아니, 지금 도 그렇지만 하데스는 아주 냉정하고 실리에 눈이 밝은 성격이었다.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태생도 모르는 어린 거지 소년을 영 지로 데려갈 결정을 할 만큼 자애롭 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내다본 사람처럼, 아벨을 거두었을 때 하데스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을 구구절절 설명하 며 퍽 간절하게 부탁했다.
「저 아이는 무(無)속성이에요.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잘 자랄 수만 있다면, 전하의 명성에 누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
무속성.
전설인 줄로만 알았던 무속성의 능력자가 실존한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바라는 것이라곤 가문의 번영과 탄 탄한 입지가 전부였던 당시의 하데스 루버몬트에게, 아벨의 능력은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제누스는 끝까지 냉정하게 거래하 둣이 아벨을 부탁했지만, 하데스는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데스가 자신의 제안을 거 절할까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이따금씩 두꺼운 로브 아래 감춰진 눈으로 애틋하게 아벨을 바라보곤 했다.
‘친모쯤 되었을까.’
나중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종의 이유로 아벨을 어 렸을 때부 터 키우진 못했겠으나, 그리 맹목적으로 아벨을 위하려는 모습은 남이라 기엔 의아했으니까.
혹시 몰라 다시 아벨에게 물었지만, 역시 둘 사이에 어떤 유대 같은 것이 존재할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벨을 그렇게까지 부탁했다면 역시…….
‘친모겠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벨뿐이었 기에, 그를 영지로 데려온 이후 여자의 기억은 잊어버렸지만.
하데스는 오늘, 다시금 그녀를 떠올 릴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기억이 남아있었거든요. 」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던 아이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다시 한번 하데스를 소름 돋게 했다.
당장 아이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하데스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대체 어떻게.’
아벨의 친모일지도 모를 그 여자, 제누스는, 떠나는 하데스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그 자리에서 제발, 제발 죽여주세요. 전하와 아벨의 목숨을 위협할…….」
「아주, 위험한 존재이니까요. 」
당시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 고 생각했다.
지옥 같은 오비투스에서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것이나, 무속성의 능력자 인 아벨을 데리고 있었던 것 전부.
제누스는 확실히 무언가 비밀을 감춘 듯 신비로웠지만, 그뿐이 었다.
예언자이기라도 했던 걸까?
전생을 기억하는 자가 언젠가 나타 나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니.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는 데…….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군. 」
「나중에는 제 말을 이해하게 되실 때가 올 거예요. 부디 꼭, 그렇게 해 주세요. 」
「어째서 내게 위협이 된다는 거지? 」
「태초에 용신 가이오니아의 사랑받는 자식들이었지만, 결국 씻을 수없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영생의 벌을 받은 자들. 」
「수많은 전생을 기억하는 것 자체 가 그들에게 내려진 여러 가지 벌 중에 하나입니다. 」
그것은, 하데스가 아이샤에게 전해주었던 고서에도 짧게나마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었다.
용신 가이오니아가 저주했다는 자 식들.
「그녀는 암속성 능력자입니다. 」
「‘자식’을 죽인 죄로, 벌을 받고 있는……. 」
그게 아이샤라고?
다시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역시 기억하는 전생이 어떤 것인지 물어봤어야 했나.’
다시 고민하던 하데스는 고개를 저 었다.
무슨 말이 나오든, 지금보다 더 혼 란스러울 것이 자명했다.
어차피 그녀가 제 입으로 ‘나는 아벨을 죽일 암속성 능력자다.’ 고백할리는 없을 테니까.
‘암속성 능력자라…….’
수상한 여자의 예언은 5년의 시간 이 흐른 후 현실이 되었고, 놀랍게도 그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아이샤였다.
제누스의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 으나 하데스는 아벨을 위협할 아주 적은 가능성도 남겨두는 법 없었다.
만약 전생을 기억한다고 고백했던 사람이 아이샤가 아니 었다면, 하데스는 정말로 그 자리에서 그를 죽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있나?
‘죽일 수…….’
도대체 어떻게.
「전 이 결혼을 꼭 해야겠어요! 」
「전 이 사람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
「저도 여기서 전하만 꼭, 믿을 거 니까요. 」
‘……있을 리가 없잖아.’
천천히 쥐어진 하데스의 주먹이 파 르르 떨었다.
당장 전생을 기억한다는 말을 듣고 도 자신이 했던 생각은 무엇이었지?
그녀를 경계해도 모자랄 판에, 의심스러웠던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과의 관계부터 궁금해하지 않았던 가?
“젠장.”
거친 욕설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무심코 비낀 시선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벨이 잡혀왔다.
아벨, 저 아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 도 그랬다.
그가 이렇게나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거라, 상상이나 했던가.
생각보다 자신이 냉정하지 못한 성 격이었다는 건, 아벨에게 정을 주고 서야 알게 됐다.
그는 솔직했고, 사랑스러웠고.
또.
항상 진심이었다.
작은 아이가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면, 하데스는 그 누구에게 서도 느껴본 적 없던 가슴 뭉클한 감 정에 머쓱해지곤 했다.
아벨은 냉정했던 그가 처음으로 감화되었던 유일한 존재였고, 그랬기에 누구보다 소중했다.
그리고.
아이샤, 그녀 또한…….
자신이 목숨을 바쳐 지켜내고 싶은 존재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야만 해.’
안이해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데스는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싶 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일단은 ‘암속성’이라는 능력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벌떡 몸을 일으킨 하데스는 퍽 결연 한 눈이었다.
약간의 정보라도 알아낼 수 있을 만한 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데스는 급히 움직였다.
어떻게든 캐내야 했다.
암속성 능력자에 관한 것들을.
“아버지.”
“아벨.”
방을 나서려던 하데스는 아벨을 붙잡고 당부했다.
“일단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여기 서 절대 나오지 말아라. 신전 사람들 이 와 있는 것 알지? 그들과 절대 마 주쳐서는 안 돼.”
“이유는 안 물어볼게요. 그런데 저, 영애가 걱정되어서……. 한 번만 보 고 오면 안 될까요?”
“안돼.”
어쩌면, 그 여자의 말이 맞는다 면…….
아이샤는 아벨에게, 지금 신관들만 큼이나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르니까.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면서 하데스는 덧붙였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떠나기 전까 지 아예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지만.”
“…….”
“혹시나 대신관을 만나는 일이 생 긴다면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마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 아니, 그냥 계속 내가 네 곁에 있을 테니, 여기서 나오지 마라.”
“아, 아버지…….”
“다녀올 곳이 있다. 금방 돌아올 테 니 얌전히 기다려.”
“아버지!”
하데스는 의아해하는 아벨을 뒤로 하고 지체 없이 방을 나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늘어 놓고 사라져버린 하데스의 뒤로, 아벨은 입술을 문 채 울먹거 렸다.
아이샤가 신성한 세례를 받으러 갔 던 파르넬리 공저에서 하데스는 무슨 일인지 난동을 피웠다.
그는 그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아이샤가 무사한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자신이 알아봐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에 그랬겠지만…….
하데스를 이해하면서도, 아벨은 그가 퍽 야속했다.
동시에 아이샤가 걱정되었다.
아무렇지 않은지, 다친 곳은 없는 지, 그것만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고 아벨은 바랐다.
남겨진 채로 조금 고민하던 아벨은 꽉 닫힌 방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어겨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