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당시에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버 린 일이었다.
애초에 암속성 능력자들을 만난다는 상황 자체를 상상하기 어 려 웠다.
역사서에는 몇 번 등장했던 것도 같 지만, 실제로 그들을 마주했다는 기 록은 전무했기에…….
‘그여자 말은 틀렸어.’
제누스, 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그 여자는 분명히 말했었다. 전생을 기 억하는 자들은 ‘암속성’의 능력자들뿐이라고.
그렇다면 아이샤는 그녀가 걱정했 던 인물이 맞다.
하나 하데스는 아이샤를 의심할 여 지가 없었다.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왼쪽 손목에 박혀있던 백색의 핵석. 그리고 무효화까지 개방했을 정도로 넘쳐나는 성력.
그런 여자가 어떻게, 전생을 기억한 다는 사실만으로 암속성 능력자일 수 있겠는가?
하데스는 문득 예전에 아이샤와 나 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언제부터 좋아한 거냐고. 」
「5년…… 됐습니다. 」
3년 전에 죽은 적이 있었다는 아이샤다. 이전의 아이샤 에스클리프로서의 기억은 없다고 했으니…….
‘그 말은, 전생에서도 나를…… 알 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이샤의 전생이 어땠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 었다.
‘정말로, 혹시나…….’
쉬이 지워지지 않는 의심 때문에.
‘아니, 괜한 생각이다.’
제누스라는 그 여자가 잘못 알았겠 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하 면서도 하데스는 내심으로는 신경 쓰 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전생이 어땠는지 고백하려 던 아이샤의 입을 막고 나왔던 이유는, 그래, 듣기가 두려워서였다.
정확히는, 무슨 말이 나오든.
혹시나— 하고 아이샤를 의심하게 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놀라울 정도로…….’
허탈한 웃음이 허공에 이지러졌다.
‘……안이해빠졌군.’
냉정하던 자신이 왜 이렇게 굴고 있는이지, 그마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첫 입맞춤의 여운에나 허덕이고 있을 뿐이었으므 로.
***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 세계에 정확히는 단 세 명뿐인, 암속성 능력자 들.
그중의 하나,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은 상념에 잠긴 표정 없는 얼굴 로 앉아 있다가 이따금씩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에게 적의를 내비친 하데스가 세워놓은 호위들이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퍽 여유로 웠다.
아니, 여유롭다기보다는 그저 따분 한 과거를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뿐이다.
‘죽였어야 했는데…….’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미하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그녀’를 죽이는 데에 실패했다.
그렇기에 언제 다시 그녀를 죽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눈을 마주치기 전에.
또 그 지독한 사랑을 느끼기 전에.
정말로 죽였어야 했는데…….
***
처음 이 세계가 생겨났을 때에는, 검은 힘을 가진 능력자들이 없었다.
용신 가이오니아의 저주를 받았다 고 전해져오는 암속성 능력자들은 사실 그 아버지 신에게 가장 사랑받았 던 최초의 인간들이었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아니, 이그니스— 그 또한 그러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이는 죄악을 저 지르기 전에는.
「어찌하여 너의 연인을 죽였느 냐? 」
지금에 와서는 노한 아버지 신의 목소리만 떠오를 뿐, 그 외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맨 처음 자신의 연인을 죽였던 이유 가 무엇인지.
당시 연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제 손에 죽임당하는 순간 연인의 얼굴이 어떠하였는지.
그 어떤 것도.
「감내하거라. 」
「너는 너의 죄과를 모두 기억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며, 네 손으로 저 지를 파멸을 내다보면서도 바꿀 수 없을 것이고, 저주받은 이능으로 인 해 모두로부터 고립되리라. 」
‘연인’을 죽인 최초의 인간.
이그니스는 이 세계에 생겨난 첫 번째 저주받은 자식이었다.
신에게 받은 수 가지의 벌들 중 가 장 잔인한 것은, 단연코.
매번 새로이 태어나는 연인의 생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야만 하는 운명이 었다.
피할 재간은 없었다.
운명은 어떻게든 이그니스의 손으 로 연인의 목을 조르게 만들었다.
신이 보여주는 수많은 미래. 그 속에서 그는 매번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곤 했다.
「너무, 너무…… 괴로워. 괴로워요. 차라리, 헉, 죽고…… 죽고 싶어요. 죽지 않고 평생, 괴로워하는 것보 다…… 당신 손에 죽는 게, 행복할 거 야……. 」
그는, 병마에 괴로워하면서도 죽지못하고 말라가는 연인의 목을 스스로 조른 적도 있었고.
「적장에게 목을 내어줄 바에야, 그 대의 손에 죽겠소. 」
그가 어찌 통제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연인의 목숨을 제 손으로 거둔 적도 있었으며.
「내 죽음으로 이 수많은 이들을 살 릴 수 있다면 기꺼이요. 이기적인 부탁일지도 모르지만, 나를 죽여주세요. 」
연인의 대의를 위해 그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던 적도 있었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삶이 있었고, 이그니스는 모든 연인의 생을 제 손으로 끊어냈다.
연인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는 닳 고, 닳고, 또 닳았다.
어차피 연인을 죽이고야 말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차라리.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또 다른 벌 은, 안타깝게도…….
거듭하는 연인의 모든 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거였다.
그것은 애석하게도, 그의 연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를 사랑하세요? 」
「아니. 」
「거짓말……. 난, 당신 얼굴만 봐 도알수 있는 걸요. 」
실로 지겨운, 운명의 반복이었다.
연인의 생이 거듭되는 것처럼 이그니스도 거듭, 새로이, 몸을 옮겨가며 부활했고, 그때마다 그는 연인의 피를 손에 묻혔다.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면 좋았을 것을, 매 생에서 연인을 죽여왔음을, 그것이 자신의 형벌임을 기억하지 못했다 면 나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는,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나 냉정하고 잔인한 신은 그마저 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그니스는, 자신의 수많은 전생을 전부 기억하고야 마는 운명이었으며 또한, 앞으로 저지를 죄들올 미리 알 면서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었기에…….
「제가! 제가! 아버지…….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아버지! 제발……. 제발 그만…….」
「도대체 그이는 무슨 죄로! 저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저의 손에 죽 어야 합니까! 왜! 」
괴로운 울부짖음에도 그에게 되돌 아오는 답은 없었다.
신은 냉정했다.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자신을 배신하고 죄를 지은 대가를, 실로 혹독하 게 치르게 하였다.
가히, 출구 따위 없는 미로와도 같 은 형벌.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형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이그니스의 정신은 마모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미칠 수 없게 되 었을 때쯤에야 그는 보다 덜 괴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래, 좋다. 내가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순응하겠다. 다 만…….」
「너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또 죽이 고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
「나만 하자. 」
「나만……. 」
「너는 부디 고통스럽지 말아라. 」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기 전에.
이 죄 많은 손으로 직접, 너의 숨을 앗아간다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결말이리라.
***
「연인을 죽인 죄. 」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암속성 능력자들.
제누스는, 그들이 각각 세 가지 죄를 저지르고 암속성의 능력자가 되었 다고 얘기했었다.
「자식을 죽인 죄. 」
하데스는 침묵하며 생각했다.
「부모를 죽인 죄. 」
그렇다면 암속성 능력자임을 확신할 수 있는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은, 어떤 죄를 지은 자인가?
「에르고 테헤르 아모. 」
찰나에 아이샤를 바라보던 그의 눈 빛과 고백을 하데스는 똑똑히 기억하 고 있었다.
도무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도, 바보가 아니라면 눈치챌 터였다.
‘연인을 죽인 죄를, 저지른 자…….’
수없는 전생을 기억하며, 암속성 능력자들은 그 죗값을 치른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연인을, 자식을, 부모를, 제 손으로 죽이는 그 끔찍한 일들을 반복하면서…….」
「……. 」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그들 에게 내려진 벌입니다. 」
미하일은 분명 아이샤를 죽이려고 했다.
그렇다면 미하일은 제누스가 말했 던 대로, 자신의 죄과에 대한 벌로 연 인을 죽이려 했음이 아닌가?
하나 전생에서 미하일을 만난 적도 없었다는 아이샤의 말은 거짓 같지 않았다.
아니,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있나?
그저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에게는 솔직하게 굴 것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겠지.
“빌어먹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하데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꼭 미래를 내다본 사람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자’가 찾아올 거라 말했던 제누스.
그리고 ‘전생을 기억한다’고 고백한 아이샤.
항상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그였다.
그렇기에 고민 없이, 아이샤를 믿으 면 될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제누스 그 여자의 불길한 예언 따위는 기억저편에 밀어둔 채로.
그렇지만 살아생전 만날 일 없을 거 라 여겨왔던 암속성 능력자를 제 눈으로 본 이후였기 때문에, 하데스는 고민했다.
“아버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벨의 표정.
그때 오비투스에 갔던 것,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죽을 뻔한 상황에 처했던 것.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제누스와 결 국 아벨을 데려오고야 만 모든 것이 과연…….
‘그저 우연이었는가? 아니면.’
미래를 알고 있었던 듯한 그 여자, 제누스가 만들어놓은 판이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엄습한 불길함에 하데스는 어 렴풋이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끄집 어냈다.
오비투스.
아벨을 처음 만났던 곳.
그리고 아벨을 데려오기로 결심했 던 곳.
수상한 여인 제누스의 불길한 예언을 듣고 돌아왔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