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잠시 나와 눈을 맞추고 있던 하데스 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대수롭잖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도,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그의심이리 상태 가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시전자를 죽여도걸어놓은 세뇌는…….”
“남아요.”
하데스의 입이 다물렸다.
내가 미하일의 정체를 파악하고 느 꼈던 그 출구 없는 상황의 절망감을, 아마 똑같이 느끼고 있을 테지.
그는 애초에 쉽게 목숨을 위협당하 지 않도록 세뇌의 이능을 이용해 갖 가지 안배를 해놓았을 것이다.
또, 혹시나 죽게 되었을 때 시전될 수 있도록 대비해둔 계책도 몇 가지 나 될지 가늠할 수 없다.
안 죽이면 안 되는데, 죽여도 문제 가 되는 상황.
혼란스러운 하데스에게 답을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 또한 도저히 미하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대신관이라는 지위 때문에 무작정 죽여도 여러 문제가 생길 터였다.
‘그래도 이 사람은 별 상관없다는 듯이 굴었지…….’
미하일의 의심스러운 사랑고백을 듣자마자 그의 손을 불태워버린 하데스를 떠올리며 나는 몸을 떨었다.
무서운 사람…….
그건, 대신관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 도 충분히 하데스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일 터.
하지만 미하일이 암속성 능력자이 며, 세뇌의 능력을 사용해 수많은 함 정을 준비해놓았다고 한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미하일이 몇 개나 심어놓았 는지 모를 지뢰를 일일이 파악하지 않고서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처 지였다.
“만약 세뇌가 걸린 상태라면, 전하 나 공작가를 위협할 수 있는 권력자 가 몇이나 될까요?”
“일단 황실이겠지. 거길 적으로 돌 리면 귀찮아. 내가 대신관이었다면 진작 황실 쪽 인사에게 세뇌를 걸어 놨을 거야. 황실과 신전은 사사로이 접촉하는 일도 많으니, 거의 무조건 이겠군.”
“그렇겠네요…….”
“그런데 대체, 무슨 꿍꿍이지? 이제국이라도 갖고 싶은 건가? 그럼 왜 진작 황제를 휘두르지 않고?”
“대신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유일의 권력자가 된다거나…… 그런 단순 한 계획은 아니예요.”
일단 원작에서 미하일은, 단 한 번 도 문제를 일으킨 적 없으니까.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고, 종국에는 정신 지배까지 개방했으면서도…….
‘정말 모르겠어. 사실은 진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거 아닐까?’
아니, 아니지.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굳이 날 죽이려고 할 이유가 없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원작이 끝나고 난 그 이후에, 미하일은 어땠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에서, 미하일 은 자기가 바라던 것을 이루었을까?
아니,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다행인 건 시간이, 시간이 그렇게 촉박하지는 않다는 거예요. 아직 대신관의 최종 개방까지는 십 년 넘게 남아있어요. 적어도 공자님이 다 자 랄 때까지는, 정신 지배를 사용하지는 못하니까…….”
무심결에 중얼거리던 나는 하데스의 시선이 묘해졌음을 느꼈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뻑'이며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래.
암속성의 능력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도 의아했을 테지만, 이 발언은 더 더욱 의심스러울 테다.
단순히 암속성 능력자에 대해 아는 게 아니라, 뭔가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느낌 아닌가.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제 전생에 대해서 말인데…….”
“아니.”
하데스는 곧바로 내 입을 막았다.
“말할 필요 없어. 적어도 지금은.”
“……네?”
왜?
나는 당황스러 웠다.
단순히 ‘전생을 기억한다. ’는 말만으로 하데스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필요하다면 내가 전생에서 어떻게 이 세계를 알았는지, 그리고 왜 공작가로 오려고 했는지,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했는데.
아니, 그래야만 하는데?
“제 전생이 어땠는지 듣지도 않고 저를 어떻게 믿어요? 말할게요. 제가 왜 대신관이 암속성인지 눈치챘고, 아무도 모르는 암속성의 능력을 알고 있었는지…….”
“됐다니까?”
“전하?”
“그냥 믿을게. 그냥 믿을 테니까, 아무튼 지금은 말하지마. 듣고 싶지 않아.”
“아니, 대체 왜…….”
문득, 입 맞추기 전에 하데스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전생에 미하일과 사랑하는 사이였 냐고 물었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 미하일과의 러브스토리 따위 듣기 싫어 그런 걸까?
그런 거면, 정말 오해인데.
나는 크게 고개를 내젓고 말했다.
“거짓말 아니었어요. 저 전생에 대신관이랑 만난 적도 없어요. 아니, 이 건 좀 부끄러운 말이긴 한데 대신관은커녕 남자도 만나본 적 없다고요!”
……덕질하느라 바빠서.
“……그래?”
솔깃한 것 같던 하데스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아니, 이게 아니라.”
“…….”
“그런 거랑은 상관없어. 전생까지 구구절절 옮지 않아도 그대를 믿을 테니까, 나중에.”
“…….”
“지금은 대신관이 아직 성에 있지 않나?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시간 없 어.”
“아……. 그건, 그렇죠. 네.”
수긍하는 나를 잠시 바라보던 하데스가 급히 몸을 돌렸다.
나는 방을 나서려는 그의 뒤를 병아 리처럼 졸졸 따라붙었다.
“당장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랑 접촉해봐야겠어. 그대는.”
문 앞에서 멈춘 하데스는 빙글 몸을 틀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 말고 있도록 해. 이 성에서 가장 안전하게만들어둘 테니.”
“저 혼자요? 전하의 곁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요?”
“아니? 나도……. 생각해야 할 게있어. 대신관이 그대를 털끝 하나 건 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 걱정 말고 기 다려.”
망설이며 말하는 하데스에, 나는 고 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혼자 생각할 시간은 필요할 테다.
암속성인 대신관.
뜬금없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며믿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나.
지금 그는 아닌 척해도, 무척 혼란스러울 테니까…….
어쩌면 혼자 생각과 고민을 하다가, 나에 대한 결론을 바꿀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조건 믿겠다는 말을 취소라도 하 면 어떻게 하지.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쁜 의도도, 어떤 꿍꿍이도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도록,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
미하일을 비롯해 신전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분주한 신관들의 방 앞에는 30명의 호위를 배치했다.
한 번에 한명씩, 눈을 맞추고 세뇌를 걸어야 하는 미하일이 허튼짓을 하려면 서른 명의 호위에게 전부 능력을 사용해야 했고,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종 개방을 하지 못한 수준의 마력이라면 분명히 그 한계치가 있을 것 이므로…….
아이샤의 방 앞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마저도 걱정스러운 점이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하데스의 일을 수행하곤 하는 암살 전문의 능력자들도 성 내부에 배치했다.
미하일의 모든 행동이 곧바로 자신 에게 보고될 수 있도록.
신관들은 자신들을 감시하는 행태에 당황했으나, 감히 불만을 표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건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순순히 감시당하며 신전으로 돌아 갈 채비를 하겠다고 알려왔을 뿐이었다.
“저……. 아버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하데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샤의 말대로, 가장 안전한 곳은 자신의 옆이 맞다. 아벨은 제게로 데 려온 길이었다.
파르넬리 공저에서의 소란을 들어 알고 있는 아벨은 걱정스러운 표정이 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마도, 아이샤에게…….
“지금 영애는 뭐 하고 계세요? 저영애께 한 번만 다녀오면 안 될까 요?”
자신을 불러놓고 한참 아무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하데스에게, 아벨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데스는 물끄러미 아벨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벨은 의아했다.
하데스는 왜인지, 전에 없이 혼란스 러운 얼굴이 었으므로.
“호, 혹시 영애에게 무슨 일이 생겼 나요? 저에게도 알려주시면 안 돼 요? 공저에서는 왜…….”
아벨의 질문에도 하데스는 한참을 침묵했다.
아이샤.
아이샤 에스클리프…….
그래. 지금 그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은, 대신관보다 아이샤, 그녀의 정 체였다.
「전생에,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기억이 남아있었거든요」
전생을 기억한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믿을 리 없었다.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하데스는 아이샤의 고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전생을 기억한다는 말이 진실이 라는 데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벨.”
“네, 아버지.”
“오비투스에서 너를 데리고 있던 여자 말이다. 기억하느냐?”
오비투스.
갑작스럽게 마물들이 미쳐 날뛰면 서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제국 중북부의 주인 없는 영지로, 토벌을 나왔던 하데스와 아벨이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뜬금없는 하데스의 질문이 의아했 지만 아벨은 왜인지 되묻지 않고 고 개를 끄덕였다.
“네.”
“널 돌봐줬다는 것 말고, 다른 특별 한 점은 없었나?”
아벨은 상념에 잠겨들었다.
관리하는 이가 없는 데다가 마물들의 서식지와 가까웠던 오비투스는 그 야말로 지옥이었다. 이방인과 도적들 이 판을 쳤고, 대낮에도 칼부림이 일 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끔찍한 곳에서 어린 아벨이 살아 남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도 하데스를 만나 겨우 살아 남을수 있었지만…….
“그분은…….”
하데스와 루버몬트 영지로 오기 전, 몇 개월가량 몸을 의탁했던 이가 있 기는 했었다.
꽤나 시간이 흘렀기에 이미 흐릿해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아벨은 잠 시 미간을 좁혔다.
“잘, 모르겠어요. 어디서 오셨는지 도……. 확실한 건 그분을 만났을 때 부터 마물들이 자주 나왔고, 몇 번 저를 지켜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금 방…… 아버지가 오셨고요.”
“누구인지는 몰라? 자기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했어?”
“그분은 필요한 때 빼고는 전혀 말을 안 했어요. 아!”
드문드문 이어진 기억들 속에서 아벨은 입에 익지 않은 이름 하나를 찾 아냈다.
“뭐라고 부르면 되냐고 여쭸을 때, 이름을 알려주셨어요. 제누스? 그 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데 말을 전혀 하지 않으셔서, 대화해 본 적도 없고 이름을 불러본 적도 거의 없었어요.”
“……그래.”
“왜요, 아버지? 갑자기 그분 얘기는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의아한 표정의 아벨을 물끄러미 옹 시하면서, 하데스는 그날의 기억을 곱씹기 시작했다.
아벨을 데리고 있었던 여자.
낡고 큰 로브에 마른 몸을 감추고,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늘어놓던 수상 한 자였다.
그리고 그녀가, 아벨을 데리고 오비투스를 떠나는 하데스에게 했던 부탁.
당시에는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생 각했기에 기억 저편에 치워두었던, 그 해묵은 당부가…….
「언젠가 아벨의 곁에 나타날 거예요. 」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그녀는 아벨을 죽일 운명이에요. 」
아이샤의 고백을 듣는 순간,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제 말을 꼭, 기억하세요. 」
「‘전생’을 기억하는 자들은, 이 세계에서 예외 없이 한 부류들뿐입니다. 」
「용신 가이오니아에게 저주받은, 암속성…… 능력자들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