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나는 웃었다.
무슨 대답을 하든, 설사 그 대답이 거짓이어도 상관없을 거라는 그의 말 은, 나를 퍽 안심시 켰다.
‘내가 기억하는 전생.’
그래, 그게 중요할 뿐이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뇨.”
내 대답에, 하데스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기울었다.
그는 곧 내게 입 맞췄다.
맞물린 두 입술은 이보다 더 뜨거울 수 없을 정도였다.
첫 키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전생과 이 곳에서의 새로운 생을 통틀어서 한 번도 없던 경험.
하나 왜인지, 낯설고 부끄러운 느낌 은 아니었다.
뜨겁게 젖은 혀가 무방비하게 벌어 진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순간, 또 머 릿속의 목소리가 들려올까 싶어 걱정스러웠지만 잠시였다.
지금 이 몸의 주인은 나였다.
내 의지를 벗어나는 누군가의 행동에, 더 이상 쉽게 휘둘려서는 안 됐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다행히 머릿속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하데스는 아주 신중하고 다정하게 움직였다.
그저 입을 맞추고, 조금 은밀한 곳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을 뿐인데…….
그 느낌은 퍽, 나를 짜릿하고 몽롱 하게 만들었다.
바짝 긴장한 나를 부드럽 게 감아 달랜 그의 혀가, 아주 천천히 입 안을 유영했다.
입천장과 치열을 하나하나 음미하 듯 쓰다듬는 움직임을 느끼는 동안, 나는 비로소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 들에서 아주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 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
낯설어 얼어붙었던 내 혀가 서툴게 움직임을 따라가자, 뒷머리를 붙잡은 하데스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뒤엉키는 혀의 움직임도 조 급해졌다.
부드럽고 다정하던 그는 곧 목마른 이가 물을 삼키듯 갈급하게 움직였다.
혀뿌리까지 빨아 삼키는 은밀하고, 지나치게 야한 느낌.
하데스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하아…….”
살짝 입술을 떼고 숨을 넣어준 하데스의 눈이, 부드럽게 풀린 채로 나를 웅시했다.
타오를듯 다정한 느낌…….
잠시 나는, 그 두 느낌이 공존할 수있는가 고민했지만.
“아…….”
다른 생각을 할 겨를 없이, 급하게 다시 붙어온 그의 입술 덕에 머릿속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맞붙었다 떨어질 듯, 다시 틈을 주지 않고 맞물려오는 입술 사이에서타액이 질척하고 야한 음률을 만들어 냈다.
찰나에 마주친, 약간은 욕망 어린 눈빛.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 던 비밀스러운 공간을, 난폭한 듯 다 정하게 달래는 행위.
이런 느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뜨겁게 간질거리는 아랫배가 묘했다.
영원히 입 맞춘 채 굳어버리게 되더 라도 나쁘지 않을 듯한, 위험하고도 황홀한 느낌이 었다.
“하아…….”
“…….”
몇 분이, 아니, 몇 시간이 지났는지 도 알수 없을 정도로.
긴 듯, 짧은 듯, 분간할 수 없는 입맞춤이 끝난 순간.
입술을 떼고 바라본 하데스의 눈에는, 아마 꼭 내 눈에서도 보일 듯한 감정이 역력했다.
아쉬움.
언제 입술을 뗐든지, 꼭 들 수밖에 없었을…….
“엄청…….”
이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문득 가만히 눈빛을 나누자니 민망해진 내 입이 무작정 열렸다.
“……잘하시네요.”
“…….”
하데스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곧벌떡 허리를 세우곤 고개를 비틀었다.
방금까지 과감하게 키스하던 남자 가 맞는지 귓불까지 붉히고는 당황스 러워하는 게 웃겼다.
동시에 이토록 안이한 우리 들이 조금, 놀랍기도 했다.
“나쁘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태평해도 되나 싶기도 한 게…….”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에 곧 하데스 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가 너무, 불안해하는 것 같아 서.”
“아아……. 전하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절 달래주시려고요?”
“아니…….”
지그시 눈 감은 하데스가 고개를 세차게 털며 덧불였다.
“하고 싶었던 것도 맞고.”
“정말 잘하시던데요. 여자 많이 만 나봤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셨던 모양이에요.”
문득 지나치게 황홀한 첫 키스를 선 사해준 하데스의 스킬에 마음이 뚱해져 말했더니, 그가 펄쩍 뛰었다.
“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처음에 결혼 얘기했을 때…….”
“날 따라다니는 여자들이 많댔지, 내가 언제 그 여자들이랑 다 만나봤 다고 그랬어? 어? 아주 사람 말 왜곡하는 기술이 수준급인데?”
“여자 안 만나보고 이렇게 키스를 잘해요?”
“당연하지. 난 못하는 거 없어.”
“아항…….”
전혀 믿지 못하는 내 눈치에 하데스는 버럭 열을 냈다.
음, 그래도 믿어주는 척해야겠지.
내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믿어줄 준 비가 되어있다는 의지를 보여준 하데스인데, 그 정도도 못 해주겠는가?
“그런데 일단은 빨리 움직여야 하 지 않을까요? 대신관이…… 갑자기 왜 절 포기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그냥 보내는 게 맞는 것 같기 도 하고…….”
걱정스러운 내 말에 하데스가 다시 진지해졌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퍽 자신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걱정할 건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어차피 제가 걱정해봤자 뭘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요. 전하 뒤에 숨는 것밖엔.”
무력하게 중얼거리다가, 나는 멈칫 했다.
괜히 하데스까지 힘 빠지게 하고 싶 진 않았으니까.
“그냥, 그냥 전하만 믿고 있을게요.”
“그래. 좋은 자세야.”
“그런데 전하, 상대방이 마력을 사 용할 때 뭔가 느껴지시는 게 없나요? 전, 파르넬리 공저에서 느꼈거든요. 대신관이 세뇌를 시킬 때마다……. 그리고 전하가 능력을 사용하실 때 도…….”
만약 하데스가 그 마력의 흐름을 느 낀다면, 본능적으로 대응이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왜 가만히 서서 세뇌를 당하고 있었 는지, 이상한 걸 전혀 느끼지 못했는 지 문득 의문스러워졌다.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하데스가 말했다.
“익숙해지면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지. 나를 비롯해 서 큰 마력을 자주,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이들은 무뎌질 수밖에 없어.”
“아. 그럼…….”
“그래. 그대는 지금까지 마력과 전 혀 관계없이 살아왔고, 발현해본 것도 몇 번 되지 않으니 민감하게 반응할수밖에.”
약간 절망스러운 얘기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력을 쓰는 데 익숙하고 능숙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공격당하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기 힘들다는 거니까.
“그리고 그대도 마력을 운용하는 데 익숙해지면 점차 그 흐름을 느낄 수 없게 되겠지. 무효화 같은 큰 능력을 자주 사용하다 보면, 더더욱 뻴리.”
“그렇겠네요.”
“그러니까 약속해. 그대에게는 세뇌가 통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조 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뭘 약속해요?”
“정 그대의 능력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 아니라면, 1차 개방 능력조차도 남발하지마. 마력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지 말란 뜻이야.”
하데스는 테이블 위에 올라 있는 내 손끝을 살짝 건드리면서, 약간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절대 그대가 위험할 일 없게 만들 거지만, 그대 혼자 몸으로도 방어할만한 수단이 있다면 좋겠지. 본능적으로 상대의 능력 발현과 살의를 감 지할 수 있다면 훱씬 안전할 테니 까.”
마력을 쓰는 데 익숙해지지 않음으 로써, 주변에서 마력을 발현하는 상 황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하 라는 얘기였다.
마력을 개방한 후 해보고 싶었던 게 많았던지라 조금 아쉬웠지만, 하데스의 걱정이 이해되었기에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아, 그리고 전하.”
아직 미하일에 대해 해줄 말이 더 남아있었다.
“마력은 갈수록 늘어날 수도 있는 거죠?”
“원래 계속 늘어나는 거야. 최종 개방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그때까지 천천히 늘어가겠지. 물론 선천적인 마력이 어마어마하다면, 그대처럼 한 번에 최종 개방까지 성공할 수 있겠 지만…….”
그는 말하다가, 멈칫했다.
싸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왠지 내가 하려던 말을 대충 짐작한 듯했다.
“혹시 알려졌던 대로…… 세뇌는, 암속성 능력자들의 1차 개방 능력인 건가?”
어울리지 않게 긴장하는 눈빛.
그는 지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최종 개방 능력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막강한 세뇌의 능력이, 차라리 알 려진 대로 1차 개방이 아닌 최종 개방쯤 되어주기를.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데스가 안심할 만한 대답을 해줄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렇지만 아직 대신관 은 최종 개방까지는 하지 못했어요.”
말을 마치고 나는 머뭇거렸다.
최종 개방 능력, 정신 지배에 대해 알려야 하는데…….
그 막강한 벽에 좌절하는 하데스의 표정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잠시 침묵하던 하데스는 괜히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그대는…… 알고 있나? 대신관이 마력을 전부 개방하면, 무슨 눙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는 무슨 대답이 나오든 태연하게 굴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암속성 능력자들은…….”
“…….”
“타인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어요. 세뇌보다 한층 더 높고 지배적인 능력이에요. 눈앞에 있지 않아도,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인지하고 있는 상 대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요.”
하데스가 걱정되어 그의 얼굴을 살 펴보니, 역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텐데도 충격 받은 표정이 역력했다.
“……뭐라고?”
“정신 지배……. 무서운 건, 세뇌랑 은 달리, 대상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 으라는 명령도 내릴 수 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