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데스는 합리적인 가정에도 도무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참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했다.
대신관이 암속성 능력자라는 사실 보다, 암속성 능력자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더 놀라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소름 끼치는 능력 때문인지 모두 에게 배척받는다고 알려진 암속성 능력자들.
웃으며 얼굴을 마주하던 친구가 사실은 나를 정신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 친구를 꺼림칙해하지 않을 수 없 올 테다.
설사 그것이.
미하일 라이가르트처럼 겉으로는 놀라우리만치 무해해 보이는 사람일 지라도.
자신은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백날 소리쳐봐야 암속성 능력자들은 상대 에게 호의를 얻기 힘들다.
그게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현하 든 발현하지 못하든 힘을 감추며 사람들 틈에 섞여있는 이유였고…….
평생 가도 암속성 능력자들을 만나 기가 힘든 이유였다.
“정말로, 놀랍군.”
그는 그 말을 남겨두고 이전처럼 방을 나서 려다가 멈 칫했다.
왜인지 망설이는 듯했다.
쯧, 하고 혀를 찬 하데스가 신경질적인 얼굴로 몸을 틀어 테이블 위에 가만히 주먹을 붙였다.
그는 떨고 있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섣불 리 움직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듣기만 했었지, 실제로 겪어보니 생각보다 더…… 역겨운 능력이군.”
당장 미하일을 어떻게 해버리고 싶 은 것 같았지만, 아마 또 그에게 세뇌당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세뇌에 걸 리지 않는 방법이 있어요.”
나는 여러 번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선택은, 옳지 않다.
하데스의 뒤에서 안전하게 숨어있 으려면 어떻게든 그의 신뢰를 얻어야 했고, 그러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작 영애 아이샤 에스클리프로 남아있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럴 수 없었다.
당장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를 미하일에게 대적할 만한 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할 겨를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하일은, 무효화를 개방하고 변수가 된 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걸림돌이 될 하데스를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 판을 짜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리고 그 모든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이미 결심하지 않았는가?
어정쩡하게 진실을 숨기고 가려가 며 하데스를 기만하지 않기로.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하데스가 가져다주었던 고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암속성 능력자들에 대해서는, 그 이능이 대상의 정신을 세뇌하여 마음 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알 려진 바가 전무하다.
세뇌의 이능은 암속성 능력자들의 1차 개방 능력일 것으로 추측되므로, 최종 개방까지 마친 능력자의 이능은 분명 경계해야 할 종류일 것이다. 〉
암속성의 능력에 대해 설명된 부분 은 고작 그 몇 줄이 전부.
그 내용이 맞는다면, 이제국에서 암속성 능력자들의 이능에 관해 제대 로 알고 있는 건.
다시 말해 그들에게 대적할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암속성 능력자 본인들을 제외하고는, 나뿐이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돼요. 대신관은 한명에게 한 번의 세뇌밖에 걸 수 없고, 그 세뇌가 풀리기 전까지는 다른 세뇌를 걸 수도 없으니까 어차 피 전하에게는 시도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제가 능력을 사용할 수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세뇌를 풀었으리라고 의심할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다시 대신관을 만나게 되면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마세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세뇌는 걸 수 없으 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 그게…….”
하데스는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내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다는 것 …….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 었다.
“그대가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하데스를 보 며 나는 조금 후회했다.
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이라도 알렸더라면 어땠을이지.
“믿기 힘드실 거 알아요. 그러니까 전하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쪽으로 행동하세요. 제 말을 듣고 조금 더 조 심히 행동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을 테니까요.”
“…….”
“저는 대신관이 뭘 하려는지는 몰라요. 다만 당장은, 뭐가 됐든 전하는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셔야 해요.”
“나는 이제 잘 모르겠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하데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대가 대체 누군지.”
그래, 나 또한 그렇다.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
“저도…….”
“…….”
“저도예요.”
바보처럼 눈물이 나기에 소매로 우악스럽게 닦아냈다.
한데도 거짓말처럼 시야가 금세 뿌 옇게 흐려졌다.
“아무래도 이 몸은 성녀…… 그러 니까 아벨라 에스클리프가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요. 저는 아벨라 에스클리프가 아니예요.”
만약 내가 정말로 아벨라 에스클리프의 환생이라면, 그녀의 감정과 동 화되었을 때 그토록 불쾌한 느낌이 들었을까?
아니면 그저, 아벨라 에스클리프의 기억과 의지가 돌아오는 동안 겪게되는 단순한 감정의 충돌일 뿐이었던 걸까?
만약 내가 진짜 아벨라 에스클리프 라면, 그전까지의 나는 뭐지?
내가 가지고 있던 그전의 기억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걸까?
나는, 도대체…….
“전 뭘까요?”
이 세계에 속해있는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속해있기도 하고.
그럼 나는.
대체 뭐지?
“저를 믿어주시는 것까지는 바라지 도 않아요. 그런데, 그런데 듣기만이 라도, 해주실 수 있어요?”
나는 연신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하데스는 답이 없었다.
“저는요, 사실…….”
“…….”
“……3년 전에 죽었던 적이 있어요.”
그전에 이 몸에 살았던 아이샤는 아벨라의 영혼이었을까?
나는 아벨라의 영혼이 있어야 할 몸을 뺏고 자리 잡은 이방인의 영혼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저에게는 죽기 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 아이샤 에스클리프로 태어났 던 기억, 18년을 살아왔던 기억 전 부”
울며 뭉개지는 목소리로 나는 덤덤 하게 읊조렸고, 하데스는 그걸 묵묵 히 들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또 자길 기만하는 거짓말이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화난 표정일 텐데…….
그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내 시선은 계속 바닥에 박혀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때까지는 이렇게 무섭지 않았어요. 적웅도, 잘 했어요. 왜냐 면…….”
“…….”
“남들처럼 평범하게 어린 시절 기 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 도……. 전생에, 제가 어떻게 살아왔 는지는 기억이 남아있었거든요.”
하데스의 발끝밖에는 보이지 않았 지만, 내 말에 그가 멈 칫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안 믿기시겠죠! 알아요. 그런데, 그런데 정말이에요. 믿기…… 힘드시 겠지만…….”
그래, 정말 말도 안 되지.
그래도.
“전하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 아서요.”
“…….”
“제가 남들이랑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모르겠다.
내가 누군지.
실수로 남의 몸에 끌려 들어온 영혼 인지.
아벨라 에스클리프의 환생인지.
영영 이 세계에 속하지 못할 관조자에 지나지 않는지.
그렇지만 무엇이든 간에, 아무것도 모를 하데스에게 이렇게 정제되지 않는 감정을 늘어놓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내 야속한 입은 다물 어질 줄을 몰랐다.
처음으로 꺼내본 내 비밀을, 그가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지도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지만 이 모든 걸 혼자 짊어지기에 나는 너무 약했고, 지 쳤다.
“제가 기억하는 전생은 저만의 것 이에요. 아벨라 에스클리프가 아니예요. 저는, 저는 아벨라 에스클리프의 기억이 없고, 그 사람이고 싶지도 않 은데……. 정말 제가 성녀가 맞는 걸까요? 저는…….”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하데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화난 것 같지도, 내 말을 이해하는 것 같지도, 나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 지도 않았다.
그냥 지극히 무표정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대체 누구 예요?”
연신 닦아냈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 고 뚝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데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까?
이마저도 거짓일 거라고?
그렇다면 난…….
“아이샤.”
내 물음에 한참 침묵하던 하데스는, 가만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순간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내 뒤통수를 붙잡 으며 얼굴을 붙여왔다.
당황할 새도 없이 가까워진 두 얼굴.
코끝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숨을 참으며 긴장했다.
익숙한 하데스의 체취가 머리를 아 찔하게 만들 만큼, 가까운 거 리였다.
당장이라도 입술이 닿을지 모를 그 자세로 하데스가 낮게 속삭였다.
“지금 나는, 그대에게 입을 맞출 생 각이야.”
퍽 단호한 말에 또 숨이 멎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꼭 불타는 것처럼 붉게 일렁이는 하데스의 눈동자뿐.
“그 전에 대답해줘.”
“…….”
“그대가 기억하는 전생에서 혹시…….”
잠시 말을 멈춘 하데스의 입술이 긴장으로 살짝 떨 렸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그자와…… 사랑하던 사이였나?”
그는 망설이는 듯했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내 말.
그리고 미하일의 알 수 없는 고백.
그것들이 나와 미하일의 사이를 의심하게 만드는 모양이므로.
왜인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라면 믿어 줄 거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일까?
나는 천천히 하데스의 목을 끌어안 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
“입은…… 안 맞추시는 거예요?”
잠시 멈칫하던 하데스의 입술이 웃듯이 기울어졌다.
“아니.”
“…….”
“무슨 대답이 나오든,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