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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53화 (53/221)

53화.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나?”

하데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손이 떨 렸다.

「에르고 테헤르 아모. 」

그래, 미하일은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에르고 테헤르 아모.

이미 모두에게 잊힌 고대어로, 그 뜻은 ‘사랑해’.

원작에서는 미하일과 아벨, 데보라 밖에 알지 못할 그 고대어를 알아들 었다고, 하데스는 말하고 있었다.

“전하…….”

이제야 하데스의 불같은 반응이 이 해가 되었다.

그 수상한 고백을 알아들었다면, 미하일을 향해 분노했다기보다는 아마도…….

‘속았다는 의심이 들어서 화가 났겠지.’

내가 미하일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고, 하데스는 확신하는 듯했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데스가 그 말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게…….”

사랑고백이었나요? 저는 몰랐어요.

……라고 잡아떼야 했는데, 이미 늦 었다.

모든 상황에는 타이밍이 있는 법이다.

하데스의 직설적인 물음에 놀란 표 정을 해놓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거 야말로 그를 기만하는 것이 아닌가.

일련의 의심스러운 상황들 속에서 하데스는 세뇌까지 당해 있고, 사실…….

‘나를 믿어야 할이유가 없지.’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수상한 여자다.

의뭉스러운 신전의 행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데다가,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애초부터 하데스는 어디서 굴러들 어온 건지 그 의도도 불분명한 나를 받아주었고, 기꺼이 나를 지켜주겠다 고까지 했었다.

그런 그에게 사실, 나는 제대로 내 얘기를 꺼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 지.

당연히, 믿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 니까…….

‘말하자.’

나는 결심했다.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가 보여준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기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래, 말하자.’

상황이 더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제가, 제가 의심스러우시죠?”

“…….”

“그래요. 믿기…… 힘드시겠죠. 제 가 이전에 들어서 알고 있던 전하의 성격대로라면, 사실, 지금 당장 저를 죽이지 않는 걸로도 감사해야 하는 데…….”

“아니.”

하데스는 힘없는 걸음으로 비척비 척 걸어가 의자 위에 털썩 몸을 앉혔다.

그는 피곤한 듯 고개를 젖히고는, 큰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만약 아벨이, 말이야. 갑자기 내게 등을 돌린다고 한다면……. 나를, 배 신한다고 하면 말이지. 그렇다고 해 도 사실 내게…… 그 애를 어떻게 할 용기는 없어. 아벨을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던, 내 유약함이지.”

“…….”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건, 그대도 마찬가지야.”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린 하데스의 눈은 어째선지, 그의 말대로 퍽 유약 하게 저물어 있었다.

내가 원작에서 읽었던, 그 잔인한 성정의 남자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왜?

‘내 사람’에게는 무조건적으로 관대 할 거라는 그 말은, 진심이었던가.

아벨을 위해 죽음까지 자처했던 그를 떠올려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 지만, 나는 의아했다.

‘나는…… 왜?

“저는, 저는 왜요? 우리가 대체 얼 마나…… 오래 봤다고? 제가 만약, 정말로, 나쁜 의도로 전하에게 접근했고 전하를 속여오고 있었다면, 그 러면 어떻게 하시게요?”

“믿은 죄로 칼을 맞아야겠지.”

“그게 대체…….”

“그렇지만 내게 칼을 꽂는다고 해 서 그게 그대의 탓은 아니야. 그대를 믿은 선택을 한.”

하데스는 축 늘어진 몸으로 나를 힘 없이 직시하며 덧붙였다.

“내 탓이지.”

긴 다리를 꼬아 앉은 채, 허벅지 위 로 가지런히 깍지 낀 손을 올려둔 그는 여느 때처럼 거만한 자세였지만, 우습게도 눈빛만큼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연약해 보였다.

아마도 백 퍼센트의 확률로 나를 의심스러워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럼 에도 믿기로 결심했기에.

배신당할지도 모를 자신을 향한 연민이 느껴지는, 그런 눈빛이라고 해 야 할까?

「내 탓이지. 」

그래서 그의 그 말을 다시 한번 곱 씹은 순간.

나는 잃어버리고 말았다.

수상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숨기려던 비밀들을, 그의 앞에서 더 숨기 겠다는 의지를.

왜인지 복잡한 머리가 차분해졌다. 내가 그를 불렀다.

“전하.”

일어나야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불편하게 움직이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하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 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곧 나를 안아들었고, 나는 안 긴 채로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표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느껴 졌다.

은연중에 본능은 나를 의심하고 있 지만, 그럼에도 믿겠다고 결심한 자신의 의지.

그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나는 그의 목을 덥석 안은 채 곧바 로 얼굴을 끌어당겼다.

살짝 이마가 맞닿자 하데스가 선 채로 바짝 굳는 게 느껴졌다.

‘제발, 세뇌를 풀 수 있는 마력 정도는 남아있기를.’

무효화를 사용하면서 몸 안의 마력 이 거의 고갈되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당장 하데스의 세뇌를 풀 정도는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외상을 처치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맞댄 이마로부터 맴돌기 시 작했다.

그건 매우 불쾌한 느낌이었다. 만약 실체가 있다면 무척 끈적끈적하고, 악취가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흡수하는 내 기분마저 묘하게 찝찝 하게 만드는 그 느낌이 한순간 손끝으로 모여들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것은 손목 부근에서 사그라졌다.

“아.”

동시에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찔한 느낌.

숨이 가쁘고, 몸에 힘 이 빠졌다.

몸에 남은 마력이 조금도 남지 않고 고갈된 느낌이란 이런 거구나.

결국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이 되고서도, 나는 하데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세뇌가 거두 어진 순간.

그는 꼭 혼이 빠진 사람처럼 빛이 없는 눈이 되어있었다.

“전하.”

다행히도 그 상태가 오래가진 않았다.

내가 그를 부르는 순간, 공허하게 빈 것 같던 붉은 동공은 이전처럼 날 카롭게 번뜩였다.

한순간에 밀려들어온 기억은 그를 정상으로 되돌려놓았을 것이다.

핵석이 있었던 손목을 실수로 좀 세 게 쥔 것이 무슨 큰일이냐는 듯 의아 해하던 그는, 신관의 그 행동이 명백 히 나를 해하려는 의도였음을 깨달았을 터였다.

그는 곧 얼굴을 무지막지하게 일그러뜨리더니 몸을 떨기 시작했다.

속으로 갈무리하지 못한 분노가 겉으로 고스란히 드러난, 그런 떨림.

가까이서 보이는 하데스의 악문 턱 이 바짝 굳어있었다.

“빌어먹을 쥐새끼 같은 놈, 들 이…….”

하데스는 분노와 놀람 사이에서 엎 치락뒤치락하는 둣, 한참을 떨었다.

“……내 성에서 역겨운 짓을, 하려 고 했군. 그 고상하게 웃는 낯으 로…….”

순식간에 움직인 그는, 나를 의자위에 앉혀두고 걸음을 돌렸다.

“전하, 잠깐!”

나는 다급하게 하데스의 팔을 붙잡 았다.

하데스는 대체 왜 말리냐는 듯한 눈 빛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그 신관이 제를…… 죽이려고 한 게 맞죠.”

내가 묻자 하데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곧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어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쥐었다.

자신이 왜 처음에는 신전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았는지, 또 왜 그렇게 행 동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대체…….”

“전하는 파르넬리 공저에서 누군가 에게 세뇌당하셨어요. 신관이 제 손 목을 세게 쥔 행동이 그저 실수였을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뭐? 그게 무슨 소리지? 세뇌당하 다니, 갑자기…….”

.‘세뇌’라는 단어가 영 뜬금없이 느껴지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 리던 하데스의 눈빛이 별안간 차게 식었다.

그는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면서 놀 란 눈치로 물었다.

“혹시…… 암속성의 이능인 세뇌를 말하고 있는 건가?”

다행히도 하데스는 눈치가 빨랐다.

이야기가 길어지지는 않을 듯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세뇌를 말하고 있는 게 맞 아요. 파르넬리 공저의 홀 안에 있었 던 암속성 능력자가 전하에게 세뇌를 걸었고, 방금 제가 그 세뇌를 풀었어요.”

하데스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당연했다. 암속성 능력자는 평생 가 도 만나기 힘든 존재들이었으니까.

하데스는 날카로운 얼굴로 나를 추 궁했다.

“대체 그 자리에 암속성 능력자가 누가 있었단 말이지? 전부 신전에서 나온 신관들뿐이지 않았나? 그대가 직접 그 자리에서 그 이능을 사용해 세례를 받았고…….”

천천히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하데스는, 순간 짧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를 눈치챈 모양이 었다.

하데스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 가정을 떠올렸을 때만큼이 나 충격 받은 듯, 붉은 눈이 하릴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느릿하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래…….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

“백속성의 이능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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