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미하일은 진중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파르넬리 공저에서 영애에게 세례를 내리면서 저희 신전이 의심하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500년 전 재림을 예고했던 성녀 아벨라 에스클리프를 아십니까?”
미하일은 귀신같이 내가 가장 예민 하게 의심하고 있는 그 이름을 꺼냈다.
아벨라.
대체 500년 전에 죽은 여자가 사사 건건 내 일에 얽히는 이유가 뭐란 말 인가?
하데스는 느슨하게 몸을 당겨 앉으 며 대답했다.
“그래. 신전이 에스클리프 남작가 와 교류를 하고 있었던 이유도 그 황당한 성녀의 재림 예언 때문인가?”
나는 너희가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고 힐난하는 걸 느 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
그럼에도 미하일은 전혀 당황한 눈 치가 아니었다.
“맞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성녀의 재림은 축복임과 동시에 재앙 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혹시라도 성녀가 나타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멀쩡한 사람을 반편이로만들어오고 있었고?”
노골적인 물음에 미하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확실한 사정은 더 자세히 설명 드려야 하겠지만, 신전에서 성녀의 재 림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마력억제제를 먹이는 것처럼 반인 륜적인 짓거리를 하면서까지 말이 지.”
“전하.”
“재고의 여지가 없군. 더 들어볼 필 요도 없겠어. 오늘부로 루버몬트는…….”
“안타까운 말이지만 에스클리프 영애는, 성녀 아벨라 에스클리프가 재 림을 약속한 몸이 맞습니다.”
“……뭐라고?”
“500년 동안 성녀가 나타나지 않아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녀의 존재는 국가적 차원에서 인도되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제국 법전에 명시되 어 있습니다.”
미하일은 날카로운 눈으로 하데스의 시선을 마주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성녀는 무조건적으로 신전에 소속되어야 하며, 제국 황실은 그 지위를 굳건히 인정해줌과 동시에 성녀의 안 위를 위해 대내외적인 보호와 지원을 최우선으로 움직인다.”
“…….”
“현존하는 크레센타 제국 법전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내용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말을 하는 의도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에스클리프 영애는 루버몬트의 일원이 될 수가 없 습니다. 저는 크레센타 제국의 대신관으로서, 황실에 성녀의 재림 사실을 알리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영애를 신전으로 모셔갈 의무가 있습니다.”
“뭐……라고?”
이럴 수가.
흑막이 지금, 자기 손을 잡고 묏자리로 들어가자고 말한 것이 실제 상 황인가?
화들짝 놀란 나와 달리 하데스는 그 저 분노한 듯했다.
옆에 앉은 그의 몸에서 돌연 감당 못 할 열기가 혹 끼쳐 나는 더 놀라 고 말았다.
손대면 화상을 입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하데스는 뜨거웠지만, 당장 무서워진 나는 무작정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저, 전하. 저는…….”
제발 날 버리지 말아줘!
애타는 마음을 가득 담아 그를 부르 자, 하데스는 걱정 말라는 듯 살짝 손을 들어 나를 막고는 말했다.
“내 아내가 확실히 성녀라는 증거는?”
아직 결혼을 한 건 아닌데 하데스는 일부러 아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예상대로 미하일은 거슬리는 눈치였다.
그는 곧바로 반박했다.
“아직 영애께서 루버몬트의 성을 얻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그렇게 칭 하시는 것은 자제해주십시오. 성녀의 이미지는 곧 신전과, 나아가 이제국의 이미지입니다.”
나의 위치는 한순간에 상승했다.
한미한 남작가의 마력도 못 쓰는 영애가 아니라 고귀한 성녀이니, 한날 공작의 아내 따위로 취급하지 말란 뜻이었다.
나는 하데스가 미하일을 무섭게 위 협해줬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수를 리면 무슨 계략을 짤지 모를 그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는 것도 위험하다는 모순적인 혼란에 휩싸였다.
미하일은 곧바로 덧붙여 말했다.
“영애에게 세례를 내리며 신관들이 전부 느낀 바가 있었고, 그 때문에 영애가 곧 성녀가 재림할 몸임을 확신한 겁니다.”
다음 순간, 미하일은 하데스에게 향 해있던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신관들은 평생 성력을 운용하며 살아온 이들이니, 성녀만이 가지고 있는 경건하고 신실한 힘을 본능적으 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뭐라는 거야. 신관들이 성녀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까지 있다니.
아무래도 그것은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다.
미하일이 내가 성녀의 환생임을 확 신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세뇌를 튕 겨낸 무효화의 이능을 감지했기 때문 일 테니까.
그러나 그걸 이 자리에서 증명해낼 방법은 없었다.
실로 절망적인 상황에, 미하일은 쐐 기를 박았다.
“신전을 믿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영애가 성녀가 재림한 몸임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그래, 많기는 하지.
이론상 성녀는 무효화를 개방한 자이고, 그렇다면 내게 거는 모든 상태 이상의 이능들이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이 자리에서 하데스가 나를 공격하 려고 마음만 먹어봐도 쉽게 판명이 날 터였다.
내 몸이, 무효화의 이능이 개방된 상태라는 게.
“다행히 능력 좋은 신관들이 스무명이나 이 성에 있습니다.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전하의 능력으로 영애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보시지요.”
내 입은 절로 떡 벌어졌다.
정말로, 잔인한 놈…….
치료해줄 신관들은 많으니, 못 믿겠 으면 나를 공격해보라는 소리를 저렇 게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이제는 검은 꿍꿍이속을 가진 흑막임을 부정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데스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제국에서 가장 선하고 신실하다는 대신관이 이토록이나 반인륜적인 자였다니, 참으로 놀라워.”
“물론 전하께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 한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발언까지 함으로써, 영애가 성녀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시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겠지요.”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왜인지 혼란스러워서 정상 적인 생각도 못 하겠는 나와 달리, 하데스는 대수롭잖다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그래. 그러면 대신관의 뚯대로 황실에 진정서를 제출하도록 하시오. 다만 황실에서 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대신관도 성녀에 대한 권한이 없 겠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실의 답도 받기 전에 내 아내를 훔쳐 달아날 버러지 같은 생각을 하 고 있다면, 일찌감치 접어두란 소리요.”
그때, 그나마 온화함을 유지하고 있 던 미하일의 표정이 무너졌다.
하데스는 변한 미하일의 표정이 재 미있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뭐, 황실에서 내 아내의 일신을 신 전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난 순순히 따를 생각 없지만.”
“제국 황실에 대한 반역적인 말로 들리는데, 제가 옳게 들은 것이 맞습 니까.”
“맞소. 내가 황실을 무서워할 거라 고 생각하는 건가? 우습군.”
“대체 황실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성녀의 몸을 억류하시려는 이유가 무 언지…….”
“당연한 거 아닌가? 이유가 뭐 필요 해? 내가 영애와 결혼해야겠으니까, 지.”
……패기!
놀란 내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언제나 굽힘 없던 멋진 남주 아벨에게서도 찾기 힘들었던 그 패기라는 것이…… 그의 아버님에게서는 폭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되는 건 가 싶은 걱정과 동시에, 무슨 일이 있 어도 나를 혼자 지옥불에 내버릴 생 각은 없어 보이는 하데스의 확언에 안심이 되었다.
감동한 나머 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서 나는, 앞에 미하일이 있다는 사실 도 아랑곳 않고 하데스의 팔을 안고 찰싹 달라붙었다.
하데스는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 며 말했다.
“할 말 끝났으면 신전으로 돌아가 서 황실에 연락을 하든지 말든지.”
미하일은 흔들리는 눈으로 하데스를, 아니, 정확히는 찰떡처럼 달라붙 은 우리 둘의 모습을 가만히 옹시했다.
이윽고 흘러나온 미하일의 목소리는 놀라우리만치 떨리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에스클리프 남작님과는 오래 연락을 해왔 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두 분의 사 이가…… 황실도 무시하고자 할 정도로…….”
“……돈독해졌냐고? 남녀 사이 사 사로운 일까지 대신관에게 보고해야 하나? 뭐, 그렇게 궁금하면 대답해주 기 어렵지는 않지. 아이샤, 그대 가…….”
하데스는 세상 다정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를 몇 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왔 다고 했지?”
아니…….
그런 사실은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장단을 맞춰줘야 할 때.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5 년이요.”
“그래. 내가 영애를 알게 된 건 1년쯤 전이었고. 아무튼 대신관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돈독한 사 이이니 이제 이해가 좀 되었겠지?”
능청스럽게 묻는 하데스에 미하일 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나도 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이 어렵게 되어 당황한 얼굴이라 기보다는, 내가 하데스를 5년 동안좋아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얼굴이 라고 해야 할까?
대체 왜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나를 보며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의아함에 그와 빤히 시선을 맞추고 있는 와중이었다.
다시 한번 찌릿, 하는 익숙한 고통 이 머리로 찾아들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기억할게요. 당신이 기다리다 지 쳐서 나를 잊게 되더라도. 약속해요. 」
또 한 번, 내가 전혀 모르는 기억이 떠올랐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이지?
아벨라가, 대체 누구에게?
“아……. 아파.”
바늘을 쑤셔 박는 듯한 고통에 나는 참지 못하고 머리를 쥔 채 움츠러들 었다.
“아이샤.”
당황한 하데스가 나를 돌아봤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나와 마주 앉아있던 미하일이 불쑥 손을 뻗어왔다.
그가 테이블 위에 올라 있던 내 팔을 낚아챈 건, 한순간이었다.
놀란 내가 고개를 들었고 우리의 시 선은 찰나에 허공에서 맞물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미하일은 조용히 속삭였다.
“에르고 테헤르 아모.”
“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르고, 테헤르, 아모.
고대어를 아는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아, 작중에서는 미하일과 데보라, 아벨밖에 알지 못할 그 말.
대체…….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지금 이 순간, 나한테 사랑한다는 고백을 왜 하는 거지?
“아!”
고민할 겨를도 없이 미하일에게 잡 힌 손목이 뜨거워졌다.
동시에 그는 반사적으로 내게서 떨 어져나갔다.
“윽…….”
“세, 세상에…….”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미하일의 오른손이 말 그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살이 타는 끔찍한 냄새가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저, 전하! 이게 무슨…….”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이게 무슨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자연 발화.
여러 속성들 중 최상급 공격형 능력이라 일컬어지는 화속성의 최종 개방 이능.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관계없이 태 워버리고야 만다.
종국에 남는 것은 한 줌의 재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을 그 자리에서 즉결 화형에 처하는 것도, 하데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본 하데스는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그는 씹어 죽일 듯한 눈으로 미하일을 노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언을 남길 시간은 주도록 하지. 다음은 그대의 머리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