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호위가 세뇌를 당했다면 어차피 열 리고야 말 문이 었다.
나는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미하일 라이가르트를 마주해야 하는 이 찰나에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무작정 호위를 앞세워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옆에 하데스가 있든 아니든 상관없을 정도로 당장 내 ‘정 체’를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마력을 쓰지 못해 손목에 핵석이 고 스란히 튀어나와있어야 할 아이샤 에스클리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알아보고 싶겠지.
초조할 미하일의 마음이 백번 이해 가 되었다.
단순히 마력억제제 복용을 끊고 다 른 제국인들처럼 미미한 마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자기가 걸었던 세뇌까지 먹히지 않았잖은가.
그건 다시 말해 내가 무효화의 이능까지 개방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니 미하일 라이가르트에게는 엄청 난 위협으로 느껴질 것이었다.
황당함에 미쳤냐며 소리치는 하데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내 방 문 이 열렸다.
그곳에는 세뇌를 당해할 일을 마친 낯익은 얼굴의 호위와, 약간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미하일이 있었다.
와, 음흉한 정체를 가늠하고 보니세상 착해 보이는 저 표정이 저렇게 소름 끼칠 수 없었다.
하데스는 무시무시한 표정과 함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방금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나? 나중에 내가 찾아갈 테니 일단은 돌아가 있 도록 하시오.”
“죄송합니다, 전하. 영애와 함께 계 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한 줄 알면 그대로 돌아 나가 라고.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영애에게 신관의 무례를 사죄드리려고 합니다.”
미하일은 막무가내였다.
그의 태도에 헛웃음을 터뜨리던 하데스는, 삽시간에 얼굴을 굳히곤 으 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래, 다 좋다고. 그런데 그게 지금 급하냐는 말이오. 이제 보니 저 정신 나간 호위와 쌍으로 미친 모양인 가 보군.”
언사가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의 무 서운 표정에는 황당함도 역력했다.
당연하지. 호위도 미친 건가 싶은데 미하일의 눈에까지 당장 내 얼굴을 봐야겠다는 의지가 불타고 있었으니 까.
그 이유를 모를 하데스는 황당하기 도 할 터였다.
역시 그의 세뇌를 풀고 사정을 설명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요사스러운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내게 그 정도의 틈도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실은 사과만 드리려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 당장 영애를 찾아뵙고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영애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인지라 한 시도 지체할 수가 없어 서요. 이해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지독한 놈.
그는 어떻게 하데스를 다루어야 하는이지도 잘 알았다.
예상대로 내 안위를 운운하자 하데스는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지?”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미하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 하데스에게 자리를 권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호위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까지 완 벽했다. 나는 우리에 갇힌 쥐새끼 신 세가되고 말았다.
‘돌겠네, 이거.’
어떤 준비를 하고 찾아왔는지는 모 르겠지만, 내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들이닥친지라 바짝 긴장되 었다.
옆에 하데스가 있다고 하지만 결코 내게 좋은 그림은 아니 었다.
다행히도 한 번의 세뇌가 먹혀 이 자리에서 미하일이 하데스에게 다른 세뇌를 걸 수 없음이유일한 위안이 랄까.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좋지 못한 상황이다.
지금으로서는…….
하데스의 권력, 그리고 그 능력치와는 관계없이, 미하일이 그를 무서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일단 미하일은 대외적으로 대단히 칭송받는 대신관의 위치다.
수틀린다고 쥐도 새도 모르게 하데스가 죽여 버릴 수 있는 자는 아니라 는 얘기.
반대로 미하일은 어떤 식으로든 하데스를 위협할 수 있다.
황실을 비롯해 제국의 모든 권력가 들에게 루버몬트를 적으로 돌리라고 세뇌라도 한다면?
아니, 이미 시켜놓기라도 한 상태라 면?
‘신이시여. 날 보고 있다면 제발 정 답을 알려줘.’
무력함에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 은 암속성 능력자라 꼭두각시도 한정 없이 부릴 수 있는, 작가의 완벽한 최 애를 어떻게 상대한담?
할 줄 아는 거라곤 고작 그의 세뇌가 통하지 않을 뿐인 힘없는 등장인 물 1인 내가?
젠장, 악역이 너무 강해…….
눈 뜨고 못 봤던 공포영화 속 주인 공에게 빙의한 느낌이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하데스의 옷깃을 꽉 잡았 더니, 다소 걱정스러운 그의 시선이 고개를 숙인 내게 닿는 게 느껴졌다.
하데스는 곧 동굴 안의 짐승처럼 낮 고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신관이 이런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꺼내놓을 문제가 뭔지 상당히 궁금하군.”
하데스는 얼결에 나와 나란히 미하일을 마주하긴 했지만, 내 무서워하는 반응이나 그의 태도 때문에 매우 화가 난 눈치였다.
“별 거 아니라면 긴장하는 게 좋겠 소. 내가 지금 여기 없었다고 해도 막 무가내로 영애의 얼굴을 보겠답시고 쳐들어올 생각이었나 본데…….”
테이블 위에 오른 하데스의 주먹이 손가락 하나하나 천천히 곱아들며 꽉 쥐어졌다.
손등 위에 투둑투둑 피어오른 핏줄이 실로 무서웠다.
“내가 그다지 온화한 성격이 못 된 다는 걸 대신관도 알 테니까.”
하데스는 대놓고 무서운 얼굴로 협 박했지만, 미하일의 표정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미하일을 죽일 힘 은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모를 하데스.
만약 내가 진실을 알려 이유를 알게 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미하일의 능력으로 인한 보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하데스.
나 같아도 안 무섭다.
치밀한 미하일이 이 모든 것을 내다보지 않았을 리 없다.
앞뒤 생각 않고 그를 죽여 버린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사후를 위해 어떤 대비를 해두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지 않은가?
안타깝지만 답이 없다.
나와 하데스는, 조금도 섣불리 행동할 수 없는 처지였다.
꿀꺽. 진중한 분위기 위로 긴장한 내가 침 삼키는 소리가 고스란히 울 렸다.
동시에 의문이 솟았다.
‘근데 도대체 무효화가 가능한 백속성 능력자를 없애서 미하일이 하려는 게 뭐지?’
하데스도 무서워할 필요 없을 정도 인 미하일의 위치를 가늠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암속성의 능력은 대단하다.
최종 개방까지 마치고 마음만 먹는 다면 세계를 통째로 손 안에 쥐고 마음대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중에서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어땠지?
그는 딱히 소설의 결말에서도 뭔가 음흉한 흉계를 이루어낸 적 없었다.
아벨을 마음대로 부려먹은 건 괘씸 한 일이지만 어쨌든 남녀주인공이 활 약함으로써 제국의 평화는 굳건히 지 켜졌다.
능력도 못 쓰는 대신관 주제에 뭔가 더 한 자리 해먹었다고 한다면 그의 의도를 가늠해볼 수 있겠는데, 아니?
황제를 세뇌해 그 자리를 꿰차길 했 나, 부자 가문들을 털어 신전을 부유하게 하길 했나?
‘대체! 결과적으로 미하일 라이가르트가 하려던 짓거리는 뭐였지?!’
그건 소설을 완독한 나도 모른다. 작가만 알겠지.
독자들도 바보는 아니다. 뭔가 걸리는 행동을 했다면 그 수많은 독자들 중 하나라도 의문을 제기했을 테다.
하나 미하일은 흑막이라고 의심되 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흑막스러운 짓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심의 여지가 하나도 없었을 뿐이었던 거다.
갑자기 문제 풀다 막힌 느낌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최종 개방도 했을 텐데 말이야. 그럼 그냥 신이나 다름없는데.’
지금은 아닌 모양이지만, 나중에는 분명.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최종 개방에 성공하고 정신 지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아벨이 처음 데보라와 신전 사람들을 만난 초반부에야 미하일과 ‘눈을 맞췄다. ’는 의심스러운 묘사가 있었 지만, 나중에는 그런 것도 없었음이 그 증거다.
아벨은 데보라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때도 많았고, 제국에 올 피해를 막기 위해 타국 간의 개싸움에 참전하느라 거의 몇 년 동안 신전 그림자조차 못 본 에피소드도 있었다.
미하일에게 직접 세뇌를 당하지 않 으면서도 아벨은 전투 기계처럼 열심 히 세계 평화를 위해 전장에서 굴렀다.
그 점이 의아하기도 했지.
나는 이기적인 성격이었으므로, 아벨에 대해서는 모순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로맨스 소설이면 로맨스 소설답게 그냥 남 일 신경 쓰지 말고 데보라랑 꽁냥거리는 장면만 좀 보여주면 좋겠 는데, 우리 아벨은 왜 사서 고생을 하 려는 걸까?
동시에 나로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할 이타적인 아벨의 성격에 홀려서 5년 꼬박 덕질한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미하일과 접촉하지 않아도 아벨은 딱히 자의가 아닐 목적 없는 전쟁에 수도 없이 목숨을 걸었다.
그건, 미하일이 계속해서 아벨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으리라는 아주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어쨌든 아직 최종 개방까지 하려면 멀었으니까.’
적어도 지금 미하일은, 한계 없는 정신 지배를 사용하지는 못한다는 점.
흑막의 꿍꿍이를 도무지 모르겠는 나에게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눈앞에 마주 보고 앉은 미하일을 직시했다.
이판사판.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나 볼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