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하하…….”
모든 생각을 마치고 난 다음의 내 감상?
그냥 막막했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끝도 없는 터널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되돌아갈 수도 없고, 무작정 앞으로걷는다고 한들 언제 나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그런 터널에.
음…….
이 정도면,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님의 최애캐는 남주가 아니었 다는걸.
‘이건 독자기만 수준인데…….’
이미 저쪽 세상에서의 내가 죽어버 렸다는 사실이 아쉽다.
만약 죽기 전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꺼이 소설을 완독한 선발대로서 ‘뒤통수 맞기 싫으면 이 작품 읽지 마 세요.’ 하고 불호 리뷰를 달았을 텐데.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의미와 독자 기만 수준인 작가의 안배를 세상에 널리 알려 이롭게 했을 텐데!
그러나 나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 넜다.
이 꿈도 희망도 없는 소설에 더 이 상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질려버렸지만, 아벨을 향한 애정은 한 줌도 식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실을 알고 나니 아벨이 더 애잔해지는 마음이릴‘까.
‘작가는 똑똑해. 그리고 상종 못 할사이코패스다. 지금부터 ‘님’자는 뺀다.’
나는 시 원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 미하일 아버님 어떡해, 너무 힐링이야…… 하고 엉엉 울어재끼는 독자들을 보면서 이 사이코패스 같은 작가는 속으로 얼마나 낄낄거렸을 것 인가?
똑똑한 사이코패스가 얼마나 무서 운지 나는 실시간으로 체감 중이었다.
그렇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이 정신 나간 작가만큼 똑똑하지는 않겠지만, 나도 그다지 멍청한 머리는 아니다.
수능을 1등급이었다고…….
‘그게 도움이 된다는 건 아니지만!’
일단 내게도 무기는 있다.
미하일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
앞으로 펼쳐질, 미하일은 모를 많은 미래들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주 다행히도 백속성 능력자라는 것.
일전에 속으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내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한이 있더라도, 인생 남주 아벨 루버몬트는 꼭 무사히 지켜내 보이겠다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
우선 미하일이 암속성 능력자라는 사실은 알겠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무얼 하려는 걸까?
‘일단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건.’
내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활용하는 데에 방해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였다.
방해가되는 이유?
‘백속성 능력자들의 최대 개방 능력 이 무효화니까.’
공략법 따윈 없는 최종 보스의 스킬 인 것 같지만, 암속성 능력에도 약점 은 있다.
바로 백속성의 최대 개방 능력인 ‘무효화’.
백속성의 단점은 공격력이 0이라는 거지만, 반대로 방어력은 100이라 할 수 있다.
무효화시키지 못하는 능력은 없다. 상태 이상을 적용시키는 모든 능력들을 상쇄하는 대단한 이능이다.
대단하기에 당연히, 무효화를 개방 한 능력자는 500년 전의 성녀 아벨라 에스클리프 외에는 전무했고 말이다.
그렇다면 미하일이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단박에 이해된다.
‘아이샤 에스클리프’는 정말로, 500 년 전 재림을 예언하고 죽었던 성녀 아벨라 에스클리프의 환생일지도 모 른다.
대체 이 중책을 왜! 남주를 덕질하 다가 좋다고 사이코패스 작가의 사인 회에 가던 길, 사고사로 운명을 달리한 덕후팬 1인 내가 맡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미하일은 최종 개방까지 가 능할 나의 마력 수치를 미리 알고 있 던 게 틀림없다.
아니, 자기 자신도 능력을 개방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마력 수치를 미하일이 어떻게?
또 의문이 생겼지만 중요하지는 않다.
작가의 최애캐일 미하일 라이가르트에게 대상의 마력 수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히든 스킬이 있다고 해도 전혀 놀라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으니까.
나는 미하일 라이가르트가 온갖 사 기적인 설정은 다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를 상대해야 했다.
‘내게 세뇌가 먹히지 않았던 이유는, 그러면…….’
나는 또 혹시 모를 가정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핵석을 못 숨겼던 것이나,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 모두 그 냥 ‘내 영혼이 이 세계에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말았으나, 아니었지.
이 치밀하게 짜인 세계에 ‘그냥’은 없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쭉.
그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느끼지 않았나?
‘설마.’
만약 이 가정이 맞는다면, 그래도 아주 조금은 희망이 있지 않을까?
나는 가만히 왼쪽 손바닥을 펴고 그 위를 응시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봤지만 별달 리 느껴지는 것은 없다.
어차피 지금 나 혼자로서는 절대 확 실히 알아볼 수 없는 가정이 었다.
만약 내가.
이미.
최종 개방인 ‘무효화’의 능력을 사 용할 수 있는 상태라면?
이것 또한 대단히 합리적인 의심이다.
고작 1차 개방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암속성의 ‘세뇌’는 대단히 끔찍한 능력이다.
고수준의 마력 보유자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며, 속성을 구분하지 않 는다.
세뇌가 적용되지 않는 대상은 작중에서 단 한명도 없다.
그러나 ‘모든 상태 이상 능력을 상 쇄한다’고 알려진 무효화라면, 가능 성이 있다.
내게 세뇌가 통하지 않았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일 터였다.
‘어쩌면 나는 이미…….’
무효화 능력의 개방까지 끝난 상태 일지도 모른다는 것.
“좋아…….”
목검뿐인 줄 알았는데 아직 사용에는 미숙한 SSS급 히든 아이템이 인벤 토리에 들어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만약 내가 최종 개방을 마쳤다고 가 정한다면, 2차 개방인 회복의 이능도 사용할 수 있을 터.
물론 연습은 필요했다.
회복은 홈수와 달리 내 성력을 ‘주 입’하는 개념이었으니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 실험체!’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하데스의 세뇌를 푸는 일이었다.
정신 이상은 백속성의 1차 개방 능력인 상쇄로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
다만 대상이 세뇌당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했으므로, 하데스의 세뇌를 풀 수 있는 건 그가 세뇌당했 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는 나밖에 없다.
‘상쇄도, 회복도, 무효화도 다 하데스에게 실험해보는 거야.’
어감이 꼭 대단하신 공작 전하를 실 험용 쥐 취급하는 듯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다급하게 일어난 내가 벌컥 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악!”
“억!”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는 하데스가 있었다.
나를 보러 다시 온 건지, 아예 아까 부터 가지 않은 건지 모르겠는데 아 무래도 후자 같았다.
“뭐, 뭐예요, 전하?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나, 나도 놀랐어. 어디 가려는 거 지?”
“곧 전하를 뵈러 간다고 했잖아요. 전하께 가는 길이었죠. 마침 잘됐어요. 이리 들어오세요.”
어디 듣는 귀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냉큼 하데스의 손을 당겨 방 안으로 들여오곤 문을 닫았다.
“아이샤. 그…… 신관 말인데.”
마침 말을 꺼내놓는 하데스에,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정말로 세뇌당한 게 맞는지, 아닌지.
여전히 세뇌의 유효 시간이 적용되 고 있는지, 아닌지.
“네, 그 신관. 다른 곳도 아니고, 제 왼쪽 손목을.”
나는 왼쪽 손을 들어 보이며 진지하 게 말했다.
“만약에 핵석이 있었다면 분명히 부서졌을 만큼 강한 악력으로 쥐었어요. 그렇지만 실수겠죠? 저만큼이나 신전이 수상하다고 의심하고 있던 전하지만, 그래도 그 행동은 실수라고 생각하시는 거 맞죠?”
“……그래. 알고 그랬을 리는 없지. 다만 그대가 충분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인데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 던 것 같군. 지금 대신관에게 다시 가 서…….”
“아뇨, 전하!”
세뇌.
정말 무서운 능력이구나.
하긴, 아벨도 소설의 종막까지 철저 하게 속여 왔던 능력인데 하데스라고 무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아마도.
왜?
내가 있으니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하는 곧 괜 찮아질 거예요.”
“……무슨 말이야?”
“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일을 할 거예요.”
“무슨?”
“전하는 그냥, 가만히만 계셔주시 면 돼요. 그대로 있으세요.”
나는 문 앞에 서 있던 하데스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내게 밀려 얼결에 벽에 불어 선 하데스는 의아한 얼굴로 눈만 껌뻑거렸다.
가만 있자, 정신 오염을 상쇄할 때 데보라가 아벨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려보자.
흡수의 이능을 사용할 땐 환부와 가 까운 곳을 접촉하는 게 일반적이고, 그래선지 아벨이 정신 붕괴를 겪을 때면 데보라는 가만히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그를 치료해주곤 했었다.
나도 그렇게 시도해볼 것이었다.
“전하, 그…… 잠시만 허리를 숙이 고 얼굴을 가까이해주세요.”
이마를 맞대려는데 키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가까이 오라며 손을 까딱까딱하는 내 제스처에 하데스가 당황한 눈치로 허둥거렸다.
“……왜, 왜 이래?”
“아, 제발.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요. 그냥 제가 원하는 대로 좀 따라와 주세요. 이거 얼른 해야 해요.”
어차피 설명해봤자 세뇌당한 상태 라 어리둥절할 뿐일 테니까!
하데스는 왜인지 빨리빨리 말을 듣 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 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몸을 낮췄다.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인 하데스가 적당히 내 려오자마자 나는 그의 목을 안아 당겼다.
“아, 아이샤.”
가까워진 거리에 바짝 숨을 삼킨 하데스가 날 불렀지만, 지금은 그의의 아함을 풀어주기보다 정신 오염을 흡수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였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천천히 이마를 가져다 붙였다.
할 수 있어.
할수있다.
외상과 다를 것 하나도 없을 테다. 그저 똑같이…….
‘응?’
그러나 그 순간.
집중하려던 정신이 파삭 깨지고, 놀라 번쩍 눈이 뜨였다.
왜인지 벌벌 떨며 내 허리를 단단히감싸 안은 하데스의 팔.
그리고.
갑자기 입술 위를 덮은, 부드럽고 말캉거 리는 감촉 때문이 었다.
……뭐지,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