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는 제가 설정한 캐릭터 중 가장 ‘선한’캐릭터라고 할 수 있거든요. 」
「백속성인데도 능력을 개방하지 못했으니 신전에 있기에는 한없이 무 능하면서도……. 」
미하일의 설정에 대한 작가님의 사 담을 떠올리며 나는 어떤 의심에 사 로잡혔다.
물론 당연히 아니 었으면 하고, 확률 적으로도 가능할까 싶지만.
“아이샤. 표정이 좋지 않군. 신관의 실수가…….”
“전하.”
“어.”
“잠시 혼자 생각할 게 있어요. 나가 주시 겠어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혼란스러워 다급하게 꺼낸 말이 축 객령으로 들린 모양인지, 하데스가 당황했다.
“아팠다기보다는 불쾌했던 건가? 내가 대신관에게 처분을 맡긴 게 언 짢았어? 그래, 내가 조금 무신경했을 수도…….”
“아뇨! 그런 거 아니니까.”
지금은 하데스를 좋게 달랠 겨를 따 위없었다.
당장 내 머릿속이 복잡한데 어떻 게…….
문을 열고 나가달라는 제스처를 취 하자 하데스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대의 기분이 나아지 면…….”
“아뇨, 전하. 기분이 나쁜 건 아니 에요. 진짜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요. 전하도 괜히 신전 사람들이랑 마주치지 말고 방에 계셔주시겠어 요? 제가 곧 전하 방으로 찾아갈게요.”
단호하게 말하자 하데스는 망설이 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시간이 없었다.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하데스의 뒤에 숨어 그가 신전의 수상함을 파헤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으므 로.
하데스는 작중에서 죽고 만다.
작가가 아무리 강한 설정을 때려 박 았어도, 그는 작가가 최고로 애정하는 ‘진짜 주인공’에게 백날 가도 이길 수없을 것이었다.
작가의 버프를 몽땅 때려 박은 인물 에게 그나마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이 세계의 거대한 흐름을 전부 읽어 보았던.
또한 그 인물의 의뭉스러움을 의심하고 있는.
나뿐일 것이었다.
‘세뇌.’
머릿속에 흐트러진 의심들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급하게 종이를 펼치 고 펜을 들었다.
우선, ‘가정’을시작한다.
1. 하데스는 지금 세뇌당한 상태이다.
이 가정이 사실일 확률은 거의 100 퍼센트다.
하데스의 성격을 떠올려보면 쉽다.
아벨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해를 끼 치는 자가 있다면,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가 있다면?
하데스는 그 사실 여부를 신중하게 파악하고 잘잘못을 따져 응징하는 그 런 사람이 아니다.
아무튼 의심스럽고, 언제가 됐든 위 협이 될지 모르니 죽어라!
……이런 사람이지.
아벨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지금의 나는 하데스에게 지켜줄 만한 위 치로 등극한 사람일 테고, 그렇기에 아까 파르넬리 공저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그의 자의일 턱이 없었다.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미하일은 물론 다른 신관들까지 다 지져버렸으면 지져버렸지, ‘신관이 실수 좀 한 것 가지고 왜 그렇게 예민해? ’라는 식으 로 내 행동을 의아해할 리 없다.
가정 2…….
종이 위에 숫자 2를 써넣은 내 손 이 꼭 수전중이라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벌벌 떨렸다.
이건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가정이었다.
2. 하데스에게 세뇌를 건 사람은 미하일 대신관이다.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백속성 제 국인인 미하일 라이가르트가, 능력치 로는 제국 최고일 하데스 루버몬트에게 세뇌를 걸었다는 가정은 정말, 얼 토당토않다.
그러나 내가 아는 ‘전제’가 틀렸다 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달달 외우다시피 한 작가의 설정 노트를 가만히 곱씹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2번 가정 밑에 펜으로 끼적였다.
1차 개방 능력, 세뇌.
대상의 정신 속에 시전자의 명령을 심어 조종한다.
보통 해당 속성의 최종 개방 능력과 결을 같이 하는 능력이라 내용은 동 일하나, 1차 개방인 만큼 제약이 존재한다.
단일 대상에게 단발적인 명령으로만 시전 가능하며, 명령을 심을 때까 지 계속 ‘눈을 맞춰야만’ 한다.
하나의 명령을 정신 속에 심은 후에는 일정한 유효 시간이 끝나고 세뇌 가 풀린 다음에야 다시 세뇌를 걸 수있다.
이유효 시간의 길이는 시전자가 ‘현재 지닌’ 마력 수치와 비례한다.
그러나 같은 대상에게 동일한 명령을 반복해서 내려 세뇌가 중첩될 경 우, 유효 시간이 ‘증가’한다.
유효 시간의 증가에는, 한계치가 없다.
다시 말해, 같은 명령을 여러 번 심 어 세뇌한다면 영구적으로 대상을 조 종할 수 있다는 뜻.
몇 번의 세뇌를 중첩시켜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뇌가 거듭된다면 결국에는 해당 대상에게 다시 세뇌를 걸지 않아도 대상은 계속 세뇌 걸린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만약 내가 ‘아벨을 덕질하지 말 라. ’는 세뇌를 받았고, 유효 시간은 하루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난 하루 동안 아벨에게서 애정을 느낄 일 없을 테고, 덕질할 생각도 하지 못할 테다.
하루가 지나면 다시 아벨을 사랑하 게 되겠지만, 유효 시간이 끝날 때에 맞춰 다시 같은 명령의 세뇌를 받는 다면?
나는 다시 아벨을 사랑하고 덕질하는 이유를 잊을 것이다.
이번에는 일주일. 다음에는 어쩌면 한 달. 그 다음에는 일 년…….
결국에는 영원히, 아벨을 사랑하는 방법을, 잊을지도 모른다.
“미친.”
떨리는 손에서 놓친 펜이 도르르 굴 러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손을 맞잡아 쥐고 주무르면서, 진정하자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 무시무시한 의심에 마음 약해질 겨를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판을 짜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대상 그 자체의 목숨과 직결된 세뇌 는걸수 없다.
‘죽어.’ 하는 명령은 내릴 수 없다는 뜻.
그러나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없다 해도 이 ‘세뇌’라는 것은 대단히 무서 운 능력이었다.
원작 속, 아벨의심이리 묘사가 꼭 두드러진 활자처럼 내 머리를 때리며 떠올랐다.
「미하일 대신관님은 내 마음을 편 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자주 자신의 눈을 바라보라고 말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 면 왜인지, 끔찍한 전쟁터도, 무서운 마수들도 전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전장에 나가기 전날이면 나는 꼭 데보라와 함께 미하일 대신관 님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잠들곤 했다. 」
제발.
나는 펜을 다시 주워들었다.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이번에도 내 촉 이 어김없이 들어맞을 거라는 슬픈 추측에 진정하기 힘들었다.
왜 하필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백속성의 능력을 전혀 개방하지 못한 무 능한’ 대신관이었는가?
아무리 신앙심이 깊고 선한 사람이 라고 하더라도, 신전의 위상과 이미 지가 있는 법이다.
마력을 억제당했던 나만큼이나 무능함의 극치를 달리는 그가, 아무런 잡음 없이 계속 대신관 자리를 역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누구도, ‘백속성의 능력을 사용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신관을 맡나? ’라고 의문과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고?
제국인들은 10살을 전후로 전부 자신의 핵석을 숨기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떤 속성을 가 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미하일 라이가르트가 ‘백속성’이라는 증거는, 내가 아는 한 소설 속 그 아무 데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빌어먹을.’
무서워.
무서웠다.
2차 개방 능력, 네크로맨서.
떨리는 손이 펜을 굴렸다. 글씨체가 들쭉날쭉했다.
세뇌를 통해서는 ‘살아있는’ 대상만 조종 가능하지만, 2차 개방에 성공하면 ‘죽어있는’ 대상을 세뇌의 능력 없 이도 조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2차 개방 이능인 네크로맨서.
이 능력과 관련해서도 상당히 의심스러운 에피소드가 있지만, 일단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마지막 최종 개방 능력.
‘정신 지배.’
시전자가 인지할 수 있는 모든 대상 에게.
또한, 동시에 여러 대상에게, 여러 개의 명령을.
눈을 맞추는 것 따위의 제약 없이, 그리고 유효 시간 없이 영구히 내릴 수 있는.
“사기잖아요!!!”
고요한 방 안에 내 비명소리가 애처 롭게 울려 퍼졌다.
여기서 더 절망적일 수 있을까?
응, 있다.
안타깝게도 최종 개방을 마치고 나 면, 세뇌의 이능으로는 내릴 수 없었 던 대상의 목숨과 직결된 명령 또한, 무리 없이 내릴 수 있었다.
최종 개방 능력자 앞에서 우리는, 죽으라면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얘기다.
만약 이 무서운 의심이 사실이라면 나는 목검 하나만 든 채로 고급 무기를 풀 장착한 최종 보스와 맞서 싸워 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나 다행인 거라면.’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최종 개방을 마치지 않은 상태다.
만약 정신 지배가 가능했다면, 아까 굳이 하데스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 았을 테니까.
‘그런데 나에게도 세뇌를 걸어놓는 편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는데……. ' 나는 세뇌에 걸리지 않은 듯했다.
아니, 세뇌에 걸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나?
하데스도 자기가 세뇌에 걸렸다는 사실 따윈 모르고 있을 텐데.
‘나도 못 믿어?’
아니, 아니다.
그렇게까지 가정한다면 이건 정말 꿈도 희망도 없다. 목검도 없는 상태 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미하일이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당장 나에게도 하데스와 비슷 한 종류의 세뇌를 걸었을 테지.
신관은 그저 실수였을 뿐이니 소란 피우지 말라고 명령했을 터.
하나 나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을뿐더러, 지금 이렇게 벌벌 떨 정도로 미하일을 의심하고 있다.
나는 내 눈을 똑바로 직시했던 미하일의 묘한 눈빛.
그리고 그 순간…… 찌릿했던 느낌을 기억한다.
‘왜 나는……?’
나는 고개 저었다.
왜 나에게는 세뇌가 통하지 않았는 지 고민하는 건 나중에 해도 좋다. 지금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지도 않을 문제다.
지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내 의심이 확실하다고 인정할 것인 지, 아닌지.
‘슬프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어.’
이런 가정은 너무 절망적이니까 생 각도 말자, 하며 내 입맛대로 생각해 서는 안 된다.
쿨하게 인정하자.
확실했다.
미하일이 백속성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많 은 상황들이 전부 이해되지 않는가?
오랫동안 신전과 연락을 취해 온 내 아버지는 반복적인 세뇌를 당한 것이 틀림없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세뇌를 당했 는지 모르겠지만, 미하일과 접촉했을 시간으로만 따져보면 이미 그 세뇌는 영구적으로 굳어졌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 소설 속의 흐름도 다 설명이 된다.
착하고 똑똑한 우리 아벨은 왜 소설의 종막까지 나쁜 놈, 착한 놈도 구분 못 하고 등신같이 굴었는가?
「그는 자주 자신의 눈을 바라보라 고 말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 라면 왜인지……. 」
아벨은 슬픈 말로 전투 기계나 다름없었다.
그는 소설 내내 제국의 평화를 지킨 다는 명목 아래 찢기고 뜯기고 다치 고 굴러왔다.
죽을 지경에 이르면 데보라의 힘으 로 다시 살아나 계속 싸웠다.
그것은 아마, 아벨의 의지가 아니었을 확률이 컸다.
하…….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아……. 세 번째 가정을 안 썼네.”
어째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삶의 마지막에서 모든 걸 포기한 병자인 양 힘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펜으로 끼적였다.
3.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은 ……지금까지 내가 쭉 적어놓은 것은.
‘암속성’의 이능들이다.
3.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은 암 속성 능력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