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미하일은 나를 보며 다정하게 눈웃 음을 지었다.
나는 그와 마주 보고 웃어준 뒤 긴장한 마음을 다잡고 거리를 좁혔다.
분명 문 밖에서는 세렝게티 초원 한 복판에 곧 뚝 떨어질 사람처럼 걱정스러웠는데, 막상 들어오고 나니 긴장은 빠른 속도로 불식됐다.
스피커가 있었으면 분명 리베라 합 창단의 상투스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을 정도로 신실하고 경건한 분위 기라서…….
“공작 전하께서는 왜 세례 참관을 하지 않으시고요? 영애를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던데…….”
미하일은 하데스가 곁에 있어도 전 혀 상관없다는 것처럼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과보호시죠. 제가 무슨 마수들 소 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요.”
“그런 것보다는 아무래도, 신관들 중에 남성분들이 섞여있으니 걱정되는 점이 있으셨을 거라 봅니다.”
미하일은 하데스를 십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신전에서 직접 챙겨온 듯한 작 은 발판 모양의 제단으로 나를 안내하며 덧붙였다.
“구두 세례가 아니기 때문에 접촉 이 불가피하니까요. 영애께서 불편하 시다면, 여성 신관들에게만 세례를 부탁드릴까요?”
아니, 무슨 생각지도 않은 배려가 이렇게 넘쳐나.
모든 의심할 만한 상황들을 애초에 자기 선에서 시원하게 처리해버리는 미하일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무 의심할 만한 게 없어 오히려 조롱당하는 기분이랄까?
일단은 미하일을 비롯해 신전의 모 든 인물들을 가까이서 확인해 볼 필 요가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때문에 일부러 먼 거리를 와주 신 분들인데요. 불편하지 않아요. 감 사합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저부터, 영애의 건강과 두 가문의 결합을 위해 축복을 드려도 될까요?”
“영광입니다, 대신관님.”
공손히 대답하는 나를 보며 미하일 이 빙긋 웃었다.
그는 곧 제단 위에 올라 나를 마주 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이마를 맞 대었다.
“에스클리프 가문의 귀한 따님께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또한 귀 인의 건강과 밝은 미래를, 그리고 루버몬트와 에스클리프의 무사한 결합을 기원합니다.”
미하일은 숨이 섞일 만한 가까운 거 리에서 나를 축복했다.
순간 나는 그에게서 훅 끼쳐오는 향 기에 주책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잊고 코를 킁킁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딱히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니 고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에게서 이렇게 향기로운 냄새가 날 일인가?
심지어 코앞에 아른거리는 잘생긴 얼굴까지.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그의 이미지를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건…….
‘교회 오빠!’
뭇 여성들의 첫사랑이 되곤 한다는 전형적인 ‘교회 오빠’ 이미지!
나야 딱히 종교가 없었던 사람인지 라 교회를 다녀본 적은 없지만…….
깔끔하고 준수한 인상에, 입만 열면 ‘나 착해요!’ 하는 느낌이 폴폴 풍기는 이 남자에게 호감 가지지 않기는 힘들 터였다.
오묘한 향기와 매력에 홀린 채 멍하 니 눈만 깜빡이고 있는 나를 보며, 미하일은 또 싱긋, 푸른 눈을 접어 웃어보였다.
“로잘린 신관님.”
그는 곧 낮은 제단에서 내려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여자신관을 불렀다.
로잘린이라 불린 여자신관은 호리 호리하고 키가 큰 체형이었다. 내 앞에 서니 한 뻄은 키 차이가 났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 맞췄다.
그 순간, 나는 매우 정순하고 부드 러운 기운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은 이마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걸 느꼈다.
부드러운 기운은 전신을 한번 따뜻하게 휘돌았고, 나는 놀랐다.
“어머.”
이것이 바로 2차 개방에 성공한 신 관들의 이능인 '회복'일 터.
어울리지 않는 비유이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비싼 돈을 내고 솜씨 좋은 마사지 숍에서 전신마사지를 받은 다음의 나. 너무 좋은 나머지 나른하게 졸리 기까지 할 정도였다.
쌓여 있던 피로가 싹 풀린 극 최상의 몸 상태가 된 기분이릴까?
처음으로 회복의 이능을 통해 세례를 받고 내 놀란 얼굴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곁을 지키고 있던 미하일이 말했다.
“신께서 선물해주신 백속성의 이능 은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한 기 적이지요.”
“네, 네. 너, 너무 좋네요…….”
와. 이건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사실 아벨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미 깨우친 1차 개방으로도 족했지만, 그 것과 상관없이 내 성력이 따라만 준 다면 꼭 2차 개방을 해야겠다.
그렇게 절로 다짐하게 만들 정도로, 이 회복의 이능은 대단했다.
너무 좋은 나머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미하일은 미안한 웃 음을 지어 보였다.
“저도 능력이 되었다면 영애께 선 한 기운을 나누어드릴 수 있었을 텐 데요. 죄가 많은지 저는 이능을 허락받지 못한 터라, 영애에게 말뿐인 세 례밖에 선사할 수 없어 부끄럽습니다. 용서하세요.”
말을 마친 미하일은 조금 씁쓸한 얼굴이었다.
작중에서도 미하일은 자신이 능력을 개방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괴 로워하곤 했다.
가장 눈물 났을 때가 언제였더라.
아벨과 데보라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다친 아벨에게 아무 도움도 주 지 못해 괴로워하며 신께 기도드리는 장면이었던가.
앓고 있는 아벨을 바라볼 수밖에 없 음에 가슴 치며 꺽꺽 오열하던 미하일의 모습.
내가 그걸 왜 잊고 있었을까?
절로 안쓰러워지는 마음에 나는 황 급히 대꾸했다.
“아니예요, 대신관님. 말뿐인 세례 라니요.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이었는 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 마세요.”
잘생기고 착한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더 괴롭게 만든 다고요!
속으로 열심히 주책없이 나불대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하일은 그 저 고맙다며 웃고 말았다.
로잘린 신관의 세례를 시작으로, 스 무 명의 신관들이 차례로 내게 회복의 이능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여자신관들은 대부분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이능을 사용했고, 남자신관 들은 악수하듯 손을 잡는 것으로 축 복을 내려주었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도 미하일의 배려가 있는 듯했기에, 나는 세례가 끝나갈 때쯤에는 그냥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역시 신전이 흑막이라는 건 너무 비약이었다. 약 먹인 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설마 죽으라고 먹였겠나.’
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신관들이 불어넣어주는 정순한 기 운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하루 종일 입을 벌려 받아먹어도 아 쉬움이 남을 정도랄까.
그래서인지금세 마지막 신관의 차 례가 다가오자 나는 못내 씁쓸했다.
스무 명이나 되는 신관들의 세례를 다 받으려면 많이 지루하겠다, 했던 생각은 이미 저만치 날아가 버린 뒤였다.
거기에 앞선 열아홉 명의 신관 모두 수상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의심할 만한데도 의심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였으니까.
“안녕하세요.”
마지막 자양강장제가 되어줄 남자신관을 향해 나는 해맑게 웃어 보이 며 인사했다.
그런데 마지막 신관은 조금 이상했다.
마주 웃으며 같이 인사해줬던 다른 신관들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은 무표 정한 얼굴로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조금 무뚝뚝한 성격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 신관 이 내 양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앞선 남자신관들의 세례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표정 때 문인지 뭔지 나는 조금 긴장하고 말 았다.
가만히 내 손을 잡은 신관은 잠시 침묵했다.
뭐지?
손을 잡자마자 바로 회복의 이능을 불어넣어주었던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
그때였다.
순간 싸한 느낌에 맞잡은 손을 떼려 고 했을 뿐인데.
신관의 손이 더 깊은 곳으로 불쑥 들어오는 듯하더니, 단숨에 내 왼쪽 팔목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아!”
손목을 부서져라 쥔 신관이 힘을 주 자 내 입에서는 절로 신음이 터졌다.
아래로 향해있던 내 고개가 들렸고, 동시에 그 신관도 고개를 들었다.
하얀색 로브 아래로 드러난 신관의 얼굴은 당황에 물들어 있었다.
……와.
“영애? 무슨 일인가요?”
내 옆에 서 있던 미하일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는 신관의 손을 거칠게 쳐내곤 내 왼쪽 손목을 뒤집 었다.
“무슨 일이었습니까? 던컨 신관이 무례라도 저질렀나요?”
미하일은 도무지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당황함에 멍한 표정으로 미하일을 마주했다.
‘……방금, 정확히 내 손목 안쪽 확 인한 거 맞지?’
미하일의 행동은 찰나였으나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대꾸 없는 나를 향해 미하일이 덧붙였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세상 모든 착함은 다 끌어 모아 만 든 얼굴로, 나를 걱정스러워하는 미하일…….
그러나 웃긴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더 이상, 미하일의 얼굴이 마냥 착한 교회 오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짧은 순간,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기 때문에.
‘대체 왜?’
이 얼굴도 모르는 신관은 뜬금없이 왜 내 손목을 바스러질 듯 쥐었는가?
‘핵석이 있는 줄 알았겠지.’
내가 핵석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앎은 물론이요, 이 자리에 서 그 핵석을 부숴버릴 생각으로 손 목을 비틀어 쥔 게 틀림없었다.
연약한 유리잔보다 부서지기 쉬운 핵석의 경도는 눈물겨울 정도다.
괜히 마력의 발현 시기에 맞춰 제국인들이 가장 먼저 핵석을 숨기려는 게 아니다.
만약 내가 여전히 핵석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면?
방금 신관이 손목을 틀어쥐는 순간 나는 즉사했을 것이 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나를 보며 미하일은, 짐짓 엄한 표정과 함께 던 컨이라는 신관에게 일갈했다.
“던컨 신관! 대체 영애에게 무슨 무 례를 저지른 겁니까?”
그렇다면 미하일의 호통에 당황하는 저 던컨이라는 신관이 내가 몰랐던 신전의 흑막일 것이냐?
아니?
그 찰나의 순간 느끼지 않았나?
미하일은 분명히, 즉사하지 않은 나 때문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주 당연하다는 듯, 끼어 들어 내 손목을 뒤집어 확인했을 테 지.
‘교회 오빠는 개뿔이.’
혹시나가 역시나였나.
“영애, 제가대신…….”
얼굴을 보면 볼수록, 말을 섞으면섞을수록 의심을 덜게 하는 괴이한 재주가 있는 미하일 라이가르트와는, 더 말을 섞어선 안 됐다.
나는 최대한 빨리 뒷걸음질 치며 빽 소리쳤다.
“저어어언하아아아!!!”
쾅!
“아악!”
“엇!”
내가 비명과도 같은 부름을 내지르는 동시에, 뒤쪽에서는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굉음이 들려왔다.
나를 포함한 신전의 사제들이 전부 놀라 비명을 터뜨릴 정도.
나도 놀라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곤 몸을 움츠러뜨렸다.
대체 뭐야?
곧바로 뒤돌아보았지만 무슨 일인 지는 알 수 없었다.
하얀 연기가 폴폴 휘날려 시야를 막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꼭 화재 난 곳에서나 맡을 수 있는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나는 듯했는데, 정말로 불이라도 난 모양.
하얀 연기가 사그라지자…….
아예 나가떨어진 홀의 육중한 문짝 과, 군데군데 꽃처럼 피어있는 작은 불꽃들, 그리고.
그 가운데, 실로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하데스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