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감사합니다, 전하.”
말을 마친 미하일은, 싫은 소리를 꺼내놓아 조금 안타깝다는 얼굴이었다.
표정 하나하나가 도저히 의심할 여 지가 없었다.
일단은 흑막이 아닐 확률이 컸고, 정말 흑막이라면 세세한 표정관리는 물론이고 큰 그림까지 그릴 줄 아는 그야말로 최종 보스일 수도 있었다.
맘 같아서는 제발 전자였으면 하지 만…….
“아, 그리고 저희가 방문한 이유 말입니다. 두 가문의 결합을 축하하고 자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만, 영애에게 신성한 세례를 드리고 싶어서였습 니다. 허락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미하일은 곧바로 덧붙여 물었다.
세례.
신전에서 말하는 세례란, 기본적으 로는 선한 기운을 가진 사제들이 말로써 내리는 축복이었다.
재물이 불기를 기원하고, 몸이 아프 지 않기를 바라며, 걱정할 바 없이 순 탄한 인생을 살기를 축복하는 것.
치유의 이능만을 지닌 사제들이 그 런 축복을 내린다 해서 정말로 그대 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종교를 믿는 신자들이 그 들의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플라시보 효과 같은 기적을 바라며 내리는 것을 바로 세례라 일컬었다.
하나 얼마 없는 신실한 백속성 능력자들이 내려주는 세례는 그것이 말뿐이라도 귀하게 여겨졌다.
수많은 제국인들이 신전에 방문해 사제들의 기도를 받길 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세례를 내려주기 위해 직접 이 곳을 방문했다는 건 내게 대단히 뜻 깊은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건만.
“영애의 몸이 굉장히 약하다고 알 고 있습니다. 하여 고위급 신관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들의 능력으 로 정순한 기운을 불어넣어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테지요.”
“네?! 아,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놀란 내가 허둥거 렸다.
미하일이 말하는 세례는 그냥 말로만 하는 세례가 아니 었다.
사제들이 아니라 백속성의 이능을 2차 개방한 ‘신관’들만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몸이 약한 나에게, 성력을 통한 ‘회복’의 이능을 사용해 준다는 것.
2차 개방 백속성 능력자의 수는 현 저하게 적을뿐더러, 회복의 이능을 사용하는 데는 많은 성력을 소모해야 했다. 아무나 쉽게 받을 수 있는 세례 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나를 위해서?
“부디 부담스러워하지마세요, 영애. 지금도 귀하신분이지만, 루버몬트의 성을 얻고 나시면 영애는 이제 국에서 더없이 고귀하고 우러름 받을 존재가 되실 테지요. 혹여나 건강에 구애받으실 일 없도록 저희 신관들에게 영애를 축복할 영광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의심을 먼저 해보기로 마음먹었지만, 사실 그럴 건 덕지는 전혀 없었다.
여기 모인 신관들은 전부 백속성 능력자며, 백속성의 이능은 1차, 2 차, 최종 개방을 마쳐도 전혀 위협적 이지 않다.
치유 능력이지 공격 능력이 아니니 까.
그 사실은 하데스도 알고 있겠지만, 그는 꿋꿋하게 의심의 여지를 두고 싶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게 해준다면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오. 내 부인이 될 영애가 신전의 세례를 받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면, 더없는 영광이지. 내 성에 세례 장소로 마땅한 곳이 있으니 내어주겠 소. 한데, 나도 세례식에 참관할 수 있나?”
하데스의 물음에 미하일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음……. 원래 이런 단체 세례는, 신전의 세례관이라는 곳에서 세례 받는 대상과 신관들만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신관들의 집중력 문제 도 있고…….”
하데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의심할 새 없이 미하일은 활 짝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전하께서 영애를 아껴 걱정하시는 점도 이해하니, 편한 대 로 하시지요.”
“음…….”
하데스는 알겠다는 말 대신 애매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도무지 꼬투리 잡을 여지가 없어 당 황한 기색이 얼굴에 다 드러날 정도.
내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직접 여기까지 와서 세례를 내려 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굳이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신관님들을 불편하게 만들 필요 있을까요? 저는 괜찮아요, 전하.”
내 말에 하데스가 무슨 생각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는 대충 눈빛으로 따로 얘기하자 고 눈치를 줬다.
곧바로 알아들은 하데스가 말했다.
“일단은 식사들 마친 후에 세례 받 기에 적당한 장소를 안내하도록 하겠 소.”
“예, 감사합니다. 전하.”
미하일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또천사처럼 웃어 보였다.
그 무해한 웃음에 나와 하데스는 또 절로 눈이 부신 듯한 착각에 휩싸여 야만 했다.
***
파르넬리 공저.
루버몬트 공작성에 찾아오는 귀빈 들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별채로, 이 만한 돈지랄도 있나 싶을 만큼 큰 규 모를 자랑하는 곳.
파르넬리 공저에서 무도회를 열었 던 에피소드와 건물의 묘사도 책 속에서 몇 번 언급된 적이 있기에 대단 히 크고 아름답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내부를 보고 난 내 감상은 한 마디로 설명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오.
얼핏 봐도 최고급 자재인 둣한 건물 뼈대는 물론이고 입구부터 복도를 따라 한 걸음씩 내걸린 값비싸 보이는 벽화들은 아마 부르는 게 값일 테다.
그뿐인가?
벽화 사이사이에 불을 밝힌 금으로 된 벽등, 고급스러운 태피스트리, 낮 은 대리석 기둥마다 비치된 휘황찬란 한장식품들까지…….
파르넬리 공저는 그야말로 눈을 뗄수 없게 만드는 자태를 자랑했다.
아…….
만약 이런 곳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면 정말 행복하겠는걸.
뭐, 그런 상념에 잠겨있는 와중이었다.
세례를 위해 이미 신관들이 전부 대 기하고 있을 공저의 본 홀 입구.
경건한 분위기와 신관들의 집중력을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호위 하나 배치하지 않은 그곳에, 하데스와 내가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하데스는 홀로 세례를 받으러 들어 가기를 결정한 내게 물었다.
“전하, 미하일 대신관에게 정말 음 흉한 꿍꿍이가 있다고 보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 로 되물었다.
그에 하데스는 피곤한 듯 이마를 문 지르며 고개 저었다.
“아직은 전혀 모르겠군. 그냥 대놓 고 멱살 잡아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 야. 대체 그대에게 마력억제제를 왜 먹인 거냐고.”
“만약 어떤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 라면 지금 우리를 대단히 잘 속이고 있는 거겠죠. 도저히 의심할 만한 모습이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
“만약 그 정도로 치밀하다면 약을 왜 먹였냐고 대놓고 물었을 때에도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철저히 준 비를 해놨을 거라 봐요.”
“그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하데스가 물었다.
“……대신관을 확실히 의심하고 있는 건가? 뭔가 뒤가 구리다고?”
“만나보기 전까지는 무조건, 이라 고 생각했는데요. 실제로 보고 난 후 에는 역시 아니겠구나 싶어요. 그렇 지만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 건 맞으 니까요.”
“그렇지.”
“그래서 더 틈을 보여줘야 할 것 같 아요. 전하가 곁에서 철벽같이 절 지키고 있으면, 허튼짓을 전혀 못 하잖 아요.”
“아니, 일부러 그대에게 허튼짓 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기회를 줘 봤자 허튼짓을 하기는 힘들죠. 상식 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전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떨치지 못하는 하데스를 위해 친절히 설명을 시작했다.
“여긴 루버몬트 공작성이고 전하의 홈그라운드예요. 그리고 신관들은 공격력이라곤 0에 수렴하는 백속성 제국인들이죠. 또 신전은 공식적으로 루버몬트 영지에 방문한다고 연락을 보낸 뒤에 왔으니 알 만한 북부 귀족 들은 지금 신전 사람들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을 거 아녜요?”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데다가 하데스까지 떡 버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수작은 부리고 싶어도 못 부린다는 얘기다. 당연했다.
조목조목 따지는 내 말에 동의하는 지, 하데스는 턱을 문지르며 느릿하 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걱정스러웠던 건 팔목에 나와 있는 핵석이었거든요. 가족들이랑 앤 빼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만약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렸다면 제 약점이 노출되어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나는 매끈한 왼쪽 팔목을 하데스에게 들어 보이며 방긋 웃었다.
“전하가 수고해주신 덕분에 이제 그건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헤헤 웃고 있으려니 가만히 내 팔목을 들여다보던 하데스도 피식 웃었다.
그는 다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중얼거렸다.
“그래.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그대 에게 위해를 끼칠 일은 없겠지 만…….”
“네. 그런데 딱히 물리적으로 위해를 끼치는 게 아니더라도 뭔가 목적 이 있다면, 저만 있을 때 의심스러운 짓을 할 수는 있겠죠.”
“그러니까 그대가 세례를 받으면서 신관들을 살펴보겠다?”
“네, 바로 그거예요. 제가 전하만큼 예리하지는 않지만, 세례 받는 중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는지 최선을 다해살펴보도록 할게요.”
“그런데 신관들은 스무 명이나 되 고…….”
다굴엔 장사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모양인데 물론 나도 무서운 부분이었다.
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전하는 여기 문 앞에 꼭 있어주세요. 제가 미심쩍은 일이 생 기면 전하를 부를 테니, 바로 와주셔 야 해요.”
뭐 대단한 일이 생길 거라고 기대하진 않지만, 목숨은 소중하다.
전생에서 허무하게 죽고 난 뒤로는 무병장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 절한 나였다.
남들은 없어서 못 받는 신관들의 세 례를 받으러 들어가는 주제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모두 어 이없다고 웃을 테지만…….
아무튼 대비책으로 가까운 곳에 있 어 달라 부탁하는 내게, 하데스는 고 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 있지.”
그는 번쩍번쩍 빛나는 공저의 본 홀금문 옆에 느슨히 기대어 서선 팔짱을 꼈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육중한 홀의 문손잡이 위에 손을 얹었다.
밀고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손잡이에 올렸던 손 위로 하데스의 큰 손이 겹쳐졌다.
“딱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도, 그 냥 느낌이 안좋이다 싶으면 무조건 나를 불러. 신전을 조사하는 건 좋지만 그대가 안전한 게 최우선이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그제야 하데스는 안심이 되는지 한숨을 한번 쉬곤 문을 턱짓했다.
3미터는 되어 보이는 큼직한 문을 밀어 열자, 파르넬리 공저 본 홀의 휘 황찬란한 내부가 펼쳐졌다.
세례를 위해 나란히 선 스무 명의 신관들이 있었고, 그들의 중심에는 천사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미하일 대신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