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최우선으로 의심해봐야 할 것은 신 전의 핵심 인물인 미하일, 그 다음은 데보라.
주인공들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미하일과 차애캐 여주 데보라를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실로 나를 가슴 아프게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내 추측대로 그들이 소설의 종막까지 우리 착한 아벨을 철저 히 속여오고 있었던 거라면.
‘용서 못 하지.’
우리 아벨이 신전 사람들 모두에게, 그리고 데보라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말 했다.
“그래도 전하, 저는 우리 공자님과 전하 빼고는 모두 열심히 의심할 거 예요. 이 험난한 세계에서 물렁물렁 하게 굴었다간 한순간에 훅 갈지도 모른다고요.”
내 말에 하데스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거만하게 턱을 치켜세우 며 피식 웃었다.
“좋은 자세야. 그럼 슬슬 준비해볼 까.”
“네.”
나는 절대 천사 같은 얼굴에 혹해 넘어가지 않으리라. 절대로.
***
……라고, 분명히, 혹해 넘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신경 써서 챙겨주셨는데 정말 죄 송합니다. 루버몬트 공작 전하.”
방문한 신관들을 소개받고 식당으 로 모여 함께하는 아침 식사.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도 다를 것 없었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작중에서는 중년의 나이로 첫 등장을 했기에 몰랐지만, 지금 스물아홈으로 젊은 청년인 그는 외양까지 완 벽한…….
‘대천사가 강림하셨다!’
……선역임이 틀림없을 듯했다.
마치 신의 축복이 햇살로 화해 그의 머리에만 내려앉은 듯, 우중충한 북 부 날씨에도 물결치는 금발은 눈이 부셨고.
보석 처럼 푸른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반짝여 보는 이들의 눈을 못 떼게 만 들었으며.
가만히 있을 때도 무표정한 법이 없 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결코 그를 흑막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했다.
심지어 놀라우리만치 잘생겼다.
흑막은 무슨…….
천사가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 고 인간 세상에 놀러 나온 것이 틀림없다.
옷을 때마다 휘어지는 미하일의 눈꼬리에 시선을 뺏기고 멍하니 앉아있 던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눈가를 가 렸다.
젠장, 눈부셔.
하데스도 같은 느낌을 받는 중인지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눈부신 듯 미 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희 신전 사제들은 육식을 하지 않아서요. 가끔 짐승들의 상처도 봐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미 물들의 고통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육 식이 힘들어지더군요.”
테이블 위에 올라 있는 기름기 넘치는 고기요리들을 휘 둘러보며 미하일 은 하데스를 향해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군. 하지만 대신관이 죄송할 건 없소. 미리 알아두지 못한 내 불찰 이지.”
“아뇨! 아닙니다, 전하.”
미하일은 손사래 치며 다시 한번 빙긋 웃었다.
“짐승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잡고 잡아먹히는 것이 불가피하지요. 저 또한 사제들에게 육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육식하는 이들에게 편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아, 음…….
열심히 핏물 흐르는 고기를 칼질하 던 내 손이 절로 멈췄다.
불편해진 마음은 하데스도 마찬가 진지, 그 또한 떨떠름한 표정으로 천천히 놀리던 식기를 내려뒀다.
“그나저나 에스클리프 영애를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남작님께 하도 말씀을 많이 들어 기대했는데, 정말이지 성녀의 가문이라는 에스클리프에 꼭 걸맞은 이미지이신지라 놀랐습니다.”
“어, 어머. 그런가요?”
칭찬에 마음 약해지지 않을 자 있으 면 나와 보라.
진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찬양하듯 바라보는 미하일에 내심 기분 좋아진 내가 뺨을 붉히고 있는데, 문 득 하데스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는 미하일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쟤가?’
하고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랄까.
흠흠…….
“그나저나, 아.”
뭔가 말을 이으려던 미하일은, 바로 자기 옆에 앉은 아벨을 보곤 멈칫했다.
상석에 앉은 하데스의 양옆으로는 나와 아벨이 있었고, 미하일은 아벨의 옆, 그러니까 나와 마주 보고 앉아있었는데, 식사하는 내내 자꾸 옆에 앉은 아벨을 신경 썼더랬다.
이유가 뭔가 했는데…….
“공자님께서는 손이 작아 어른용식기를 사용하기 어려워 보이시는 데…….”
미하일은 얼른 자신이 쥐고 있던 칼을 들어 아벨의 빵에 대신 하얀 크림을 발라주었다.
헉.
미하일에게 신경을 집중하느라 나 도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
우리 아벨이 식사하는 중에 꽤 곤혹을 겪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만큼 당황한 하데스가 얼른 시종을 불러 아벨의 손에 맞는 식기를 가 져오게 했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하는 아벨이 귀여운지 미하일은 뺨을 붉히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이런! 제가 실수로 공자님께 결례를…….”
“어! 아니예요, 아니예요. 대신관님 손이 따뜻해서 좋았어요.”
별거 아닌 행동에도 화들짝 놀라 사과하는 미하일과, 괜찮다며 배시시웃는 아벨.
그건 마치…….
실로 인간세계에 강림한 대천사와 그의 곁에서 날고 있는 아기 수호천사의 모습이라.
정말 빛이 나는 것도 아닌데 왜 눈이 자꾸 부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 손을 들어 그들의 모습을 가리 고 있는데, 나와 똑같은 포즈를 취한 하데스와 또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눈으로 대화했다.
‘아이샤. 대신관이 정말…….’
‘……. 상한 사람일까요, 전하?’
아무리 봐도 아닌데.
“……식사하러 오기 전에, 여기 머 물고 계신 남작님을 만나 뵈었는데요.”
그때였다. 갑자기 미하일이 아버지의 얘기를 꺼냈다.
나와 하데스는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그런가.”
“예. 저에게 하소연을 하시더군요. 전하와 영애의 결혼을 반대하고 계시 다고…….”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애지중지 키운 따님을 떠나보내기가 힘들어서겠지요. 저도 남작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역시 의심했던 대로, 아버지 편을 들어 우리의 결혼을 막을 생각일까?
미하일과 시선을 나누고 있던 하데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우리 제국을 방위하시는 대 루버몬트 공작가와 성인들을 경배하는 신 실한 에스클리프 남작가의 결합이 저 에게는 매우 만족스럽고 축하드릴 일입니다만, 모두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면 조금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겠지요.”
좋아! 흑막스러운 대사가 나오려고 한다!
분명 다음에 나올 미하일의 대사는 자신 또한 우리의 결혼을 언짢게 생 각하게 되었다는 뉘앙스일 확률이 컸다.
괜히 자기가 나설 이유 하나도 없는 데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하데스가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그래서?”
“하여 제가 이곳에 머무는 동 안…….”
“…….”
“최선을 다해 남작님을 설득하는 데 힘을 보태보려고 합니다. 기왕이 면 잡음 없이 두 가문의 결합이 진행된다면, 신전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테니까요.”
띠용?
흠칫한 하데스가 나를 돌아봤다.
이거, 이거……. 미하일은 도무지 우리의 의심대로 구는 법이 없었다.
생김새하며, 행동하며, 오히려 우리가 무사히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히기까지…….
미하일이 흑막일 수도 있다는 의심 은, 역시 비약이었던 걸까?
“그리고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 지만, 전하.”
미하일은 사뭇 안타까운 얼굴이 되 어 말을 덧붙였다.
“남작님께 전해들은 바로는, 결혼을 반대하시니 영애를 강제로 억류해 두셨다고요.”
“아.”
하데스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미하일이 더 빨랐다.
그는 제국의 무시무시한 권력자라 고 알려진 하데스 앞에서도 아랑곳 않고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답답하신 전하의 마음은 이해합니 다만,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며 천 륜을 억지로 끊는 행동입니다.”
변명하려던 하데스의 입이 다물렸다.
속사정을 다 아는 나야 이해하지만, 겉으로만 보자면 확실히 미하일의 말 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힘없는 귀족 영애를 억지로 가둬둔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하데스가 제 권력을 남용해 무뢰한처럼 군 것이나 다름없으니.
설핏 또 죄책감이 밀려들었으나 그 런 고민을 할 겨를은 없었다.
나는 열심히 미하일을 관찰했다.
역시나 아무리 봐도 그가 흑막일 순 없었다. 소설 속에 묘사되었던 선역 그대로였다.
무시무시한 권력자 앞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 켜 옳은 소리만 하는 저 곧은 성격.
조선시대에 폭군들에게 충언을 하느라 목이 뎅강뎅강 잘린 수많은 신 하들이 떠오른다. 미하일도 꼭 그런 캐릭터였다.
수많은 귀족들은 물론이고 과한 외 교 정책을 펼치는 황제 앞에서도 결 코 무릎 끓는 법 없었으나, 그가 맞는 말을 했다고 해서 목이 잘리는 일은 없었다.
그의 뒤에는, 하데스를 이어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우리 아벨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으니까.
“제가 이곳에 와 두 가문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신의 뜻이라고 봅니다.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남작님을 설득해볼 테니, 전하께서는 제국 대 귀족의 올곧은 위상을 위하여 모든 행동에 꼭 신중에 신중을 기해주시길 청하는 바입니다.”
결혼은 걱정하지마. 내가 도와줄 테니.
네 이미지도 있는데 조금 걱정된다. 무뢰한 같은 행동은 자제해.
미하일의 발언은 해석하면 딱 그거였다.
우리에게는 의심스러운 흑막이 아니라 반가운 조력자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미궁에 빠진다, 이거.
혼란스러워 시야가 핑핑 도는 나만 큼이나 하데스 또한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은 알겠소. 대신관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