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다소곳이 앉은 채 ‘여기서 자고 가 라’고 말하는 아이샤의 표정에는 딱 히 불순한 의도 따윈 없어 보였지 만…….
문득 하데스의 눈에 아이샤의 옷차림이 들었다.
항상 방에서 잘 때 입는 가벼운 슈 미즈 드레스 차림.
딱히 노출이 있거나 눈을 못 둘 차림은 아니 었는데도 하데스는 괜히 부 끄러워져 뺨을 붉혔다.
아파할 아이샤가 걱정돼 무작정 달 려오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족 영애의 침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뒹 군 그림이 뒤늦게야 조금 민망하게 느껴진 탓이다.
“남세스럽게 무슨…….”
“남세스럽다뇨? 언제는 곧 부부 될 사이에 뭐 내외하냐며 핀잔주시더 니?”
“그, 그땐 그때고.”
“주무시고 가세요. 자장가라도 불 러드릴까요?”
“뭐래?”
아이샤는 집요했다. 금방이라도 나 가려는 하데스의 팔뚝을 꽉 붙든 채 침대를 팡팡 내려쳤다.
문득 아이샤의 손이 닿은 제 팔이 불에 덴 듯 뜨겁게 느껴져서 하데스는 흠칫 놀랐다.
아직 새벽이라 창밖은 뿌옇게 흐렸 고, 방 안에는 단 둘뿐이었다. 그것도 침대 위.
팔에서부터 달아올라 온몸으로 퍼지는 열기에 하데스는 가만히 심호흡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생각해 보니 여섯 시간이나 이 침대 위에서 아이샤를 안고 제정신을 유지했던 게 신기했다.
죽을 만큼 아파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러나 멀쩡해진 지금 상태로 이 침 대 위에 나란히 눕게 된다면, 어떤 일 이 일어날지 하데스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난 내 방에 가서 잘 거야.”
“에이, 그러지 말고요.”
아예 웃깃까지 쭉 잡아당기며 매달 리는 아이샤를 하데스가 급히 떼어냈다.
“아니, 이 여자가 왜 이래?!”
한시라도 떨어져있고 싶지 않은 아이샤의 그 마음은 알겠지만!
“그만 좀 해, 그만!”
어디까지나 그녀를 위해서였다.
하데스는 스멀스멀 올라가는 입꼬 리를 억지로 내리며 냉정하게 몸을 일으켰다.
“저 은하아!”
“진짜…….”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참았던 웃음 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누가 봐도 좋아 죽겠는 사람처럼 온 얼굴 근육으로 웃으면서 하데스는 아이샤의 방을 나왔다.
방 앞을 지키던 당황스러운 얼굴들 과 마주한 것은 그때였다.
“아.”
하데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아이샤의 방 앞에는 에스클리프 남작이 와 있었다.
새벽부터 아이샤를 또 찾아온 건지, 방에 들어가겠다고 억지를 부린 모양이었다.
그의 양팔을 잡고 호위들이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아이샤의 방 안에서 나온 모습으로 남작을 마주하게 된 하데스는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원망이 가득한 남작의 눈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자 절로 제 차림에 시선 이 갔다.
옷매무새도 정리하지 못하고 나와 잔뜩 흐트러진 데다, 방금 아이샤에게 잡혀 셔츠 깃이 쭉 흘러내린 탓에 목덜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뭔가 한판 거하게 하고 나온 사람처럼, 식은땀에 흥건하게 젖은 머리까지…….
하데스는 속으로 인정했다.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뭔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남작이 더 뻘랐다.
남작은 악문 턱을 바들거리며 휑하 니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갔다.
“아…….”
반사적으로 남작을 붙잡기 위해 뻗어 올린 하데스의 손이 하릴없이 아 래로 떨어졌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남작은 참으 로 통탄할 노릇이 었다.
애지중지 기른 딸을 방 안에 감금해 놓고 마음대로 못된 짓거리를 일삼는 무뢰한이 있다니. 신분이 높아 뭐라 탓할 수도 없고.
“하아…….”
남작의 답답한 마음을 십분 이해는 하지만 당장은 변명할 말이 없었다.
하데스의 입을 타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나에게도, 하데스에게도 퍽 고통스 러웠던 지난한 새벽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약을 끊었고 핵석을 감추는 데도 성 공했지만, 하데스가 내린 감금령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 하데스가 가져 다준 핵석 관련 서적을 읽으며 내가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설정을 정리하 느라 정신없었다.
토(土)속성의 대마법사가 집필했다는 고서에는, 핵석과 그 이능 개방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소설의 설정과 똑같았다.
어쩜 이렇게 내게 꼭 필요한 책을 딱 집어 갖다 줬는지.
역시 나무랄 데라곤 지나친 자의식 과잉뿐인 우리 잘난 공작 전하.
‘일 년도 안 남았어. 그때까지는 무 조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가진 백속성의 능력을 사용해 보일 것이다.
그래야만…….
“공부를 꽤 열심히 하는군.”
자기 생각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하데스가 만족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산처럼 수북이 쌓인 서류를 자 기 집무실 대신 내 방으로 가져와 읽 고 있었다.
자기 집무실이 덥네 어쩌네 했지만,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심심해할 내가 걱정되었다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 었다.
“다정해…….”
“뭐?”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하데스를 관 찰했다.
새삼 놀라웠다.
잘생겼지, 강하지, 능력 좋지, 권력 빵빵하지, 돈 많지……. 이쯤 되면 인 성 하나 정도는 삑사리 날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다.
남들에 비해 유독 자뻑 증세가 심하 시긴 하나 지금에 와서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 었다.
나 같아도 저 정도로 완벽하면 자의 식 과잉 증세에 허덕일 텐데, 뭐.
흐뭇한 눈길로 계속 하데스를 홀으 려니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아벨이랑 아버님 얼굴을 넣은 굿즈라도 제작해야겠는걸.’
홈 잡을 데 없이 완벽한 하데스의 미모를 보며 갑자기 든 생각인데, 꽤 괜찮은 계획 같았다.
내 부족한 솜씨 말고, 전문가들을 고용해 하데스와 아벨 얼굴을 수놓은 손수건이라도 제작해 팔면 돈도 벌고 팬들도 영입하고, 일석이조 아니겠는 가.
무릇 덕질이란 함께하는 이들이 많을 때 그 가치와 성취감이 배가 되는 법이므로.
‘바쁘겠어!’
할 일이 많았다.
덕질에도 충실해야 하고, 일 년 후의 참사를 막기 위해 핵석 수련도 게을이리 해선 안 됐다.
다시 책을 펼치는 나를 따라 하데스 도 서류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말이 서류지 사실 함부로 구하기 힘든 기밀 문서였다.
대충 훔쳐봤는데 신전, 그리고 500 년 전에 있었다는 우리 가문 출신의 성녀, 뭐 그런 것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성녀…….’
성녀의 재림 예언을 받들어 우리 가 문이 백속성을 유지해왔다는 사실 빼 고, 내가 아는 성녀에 관한 정보는 없 었다.
소설 속에서도 500년 전에 성녀로추앙받으며 꽤나 유명했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서술되지 않았다.
그것도 참으로 의심스러웠다.
꽤 중요한 인물 같은데 책에는 따로 언급되어있지 않다는 점.
의아해하고 있는데, 하데스가 물었다.
“아이샤.”
“네, 전하.”
“그대의 선조였다는 성녀 아벨라 에스클리프 말인데, 혹시 남작에게 따로 들은 얘기 같은 거 있나?”
질문을 하는 하데스의 눈이 날카로 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가문에서 재림할 거라는 예 언 때문에 백속성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었다는 거. 그거 빼고는 저도 따로 아는 게 없어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대요?”
“그런가 봐. 나도 잘 몰랐는데 역사 서에 기록된 유일한 여자였어. 백속성의 이능을 최대로 개방한.”
“아…….”
그건 소설 속 코어 쥬얼, ‘핵석’의 설정을 잘 알고 있는 내게 일견 대단 하게 들릴 만했다.
〈페르소나〉의 작가님은 팬들이 지 어준 '설정 덕후'라는 별명이 꼭 어울 릴만큼, 책 속의 세계관과 작중 배경 이 되는 크레센타 제국인들의 핵석 설정에 공을 들였다.
기본적으로는 적색의 코어 쥬얼을 가진 제국인들은 화속성으로 불을 다 루고, 청색의 코어 쥬얼을 가진 제국 인들은 수(水)속성으로 물을 다루고, 뭐 이런 식인데…….
더 세세하게 따져 들어가면, 그 능력을 다루는 데에는 단계가 있었다.
쉽게 말해 같은 화속성 제국인이라 고 하더라도, 능력이라곤 쥐뿔도 쓰 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단 하신 루버몬트 공작 전하 같은 사람 도 있다는 거다.
핵석의 능력 발현에는 1차 각성, 2 차 각성, 그리고 3차인 최종 각성까 지의 각 단계가 있고 어느 단계까지 각성하느냐는 개개인이 지닌 마력의 수치에 달려있었다.
그러니까 보유한 마력이 강할수록, 최종 각성의 여지가 커진다는 뜻이다.
물론 날 때부터 완벽했다는 루버몬트 공작 전하는 진작 핵석의 최종 각 성까지 끝마친 능력자였고.
“이건 내 추측인데, 아이샤.”
“네.”
“신전에서 그대의 마력이 발현되지 못하도록 제어한 이유가…… 아마 성녀의 재림 예언과 관련 있지 않을까 해.”
“어떤 부분에서요?”
“보통 능력을 어디까지 개방하는지를 보고 마력 수치를 가늠하지만, 그대는 억제제를 복용하다가 중단하면 서 발생했던 그 통증만으로도 마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대충 느낄 수 있었지.”
“어땠는데요?”
“죽을 정도로 아파봤으니 알 거 아 냐.”
하데스가 눈썹을 쓱 치켜올리며 말 했다.
전에도 한번 지나가듯 말했지만, 하데스는 내가 가진 마력의 수치가 어 마어마하다고 여기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