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덕질?
“……그게 뭔데?”
아이샤는 꼭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게 있어요. 전하를 오늘부터 제 차애로 섬기도록 하겠어요.”
“뭐?”
이해 못 할 소리를 늘어놓는 아이샤 가 의아했지만, 아무튼 하데스는 만 족스러웠다.
지난한 새벽의 성과는 컸다.
아이샤는 더 이상 마력억제제에 중 독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충분히 마력을 발현하여 핵석을 숨길 수 있을 터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데스가 다 급히 말했다.
“오늘부터 다시 핵석을 숨기는 훈 련을 해야겠군. 지금까지 급소를 덜 렁덜렁…….”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데스는 놀랐다.
품에서 쏙 빠져나간 아이샤가 왼팔을 쥐고 잠시 정신을 집중한 순간.
왼쪽 손목에 박혀있던 핵석이 순식 간에 몸 안으로 사라져 자취를 감췄 기 때문이었다.
“오…….”
아이샤의 입에서 흥미로운 듯 탄성 이 터졌다.
백색의 핵석은 언제 그곳에 있었냐는 듯 사라져 있었다.
매끈해진 아이샤의 왼쪽 손목을 바라보며 하데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수련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일평생 마력을 발현해본 적 없는 아이샤였다.
마력을 틀어막고 있던 억제제의 작 용이 사라지고, 아마 태어나 처음으 로 자신의 힘을 사용해봤을 터였다.
갓난아기가 걷기까지 몇 번의 시행 착오를 겪듯이 핵석을 숨길 때도 마 찬가지였다.
하나 아이샤는 마력이 돌아오길 기 다리기라도 했던 사람처럼 단숨에 핵석을 숨겨 넣었다.
이건 놀라워할 만한 일이 맞았다.
의외라는 듯 쓱 눈썹을 올린 하데스 가 말했다.
“마력만 못 썼다 뿐이지 바보는 아니었군. 걱정할 거 없겠어.”
“별거 아니네요, 이거!”
“별거야. 뿌듯해해도 좋아.”
“다 전하가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 에요. 이거, 능력도 써보고 싶은 데…….”
“방금 핵석을 집어넣는 데 성공한주제에 뭘 벌써부터? 평생 능력을 개방하지 못하는 제국인들이 절반이야. 급하게 굴지 마.”
하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아이샤가 백속성의 능력을 어느 정도까지 개방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개개인의 마력 수치를 다 알아낼 방 법은 없다.
하나 사용하는 이능의 수준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지는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백속성 제국인들은 그 개체도 적을뿐더러, 이능을 최대 개방한 이는 적어도 하데스가 아는 한 지금 제국에는 없었다.
한 명, 갑자기 뇌리를 스치고 지나 가는 유능한 백속성의 제국인이라 면…….
‘아벨라 에스클리프.’
500년 전, 성녀로 추앙받았던 그녀는 백속성의 이능을 최대로 개방했다 고 알려져 있다.
겨우 흡수를 통한 통중의 상쇄 능력 만 개방한 여타 신전 사제들과는 차 원이 달랐던 수준.
‘백속성의 최대 개방 이능은 확실히무시무시하지. 실제로 본 적은 없지 만. 최열성(最劣性) 속성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하데스는 새삼 500년 전의 성녀 아벨이라 에스클리프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정화나 회복을 넘어서서 최대 개방 한 백속성의 '능력'은 고서에서만 전 해져오고 실제로 본 적은 없는지라, 꼭 허상처럼 와 닿지는 않지만…….
‘정말 성녀가 재림하기라도 한다 면.’
제국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성녀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성녀가 백속성의 이능을 최대 개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능력은 가히 대단하기에 위험했다.
힘을 갖고 싶은 나라에서는 성녀의 존재를 탐할 것이고, 성녀를 가진 나 라에서는 그를 최대한 이용하려 들 것이다.
실제로 500년 전의 기록을 보면, 아벨라 에스클리프로 인한 침략 전쟁 이 수십 번은 일어났다 하니…….
순간 하데스의 눈이 어떤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새벽 내내, 마력이 트이는 아이샤의 고통을 흡수했던 그였기에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만약, 정말로 아이샤가 다른 에스클리프 사람들처럼 희미한 마력 수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마력억제제 따위를 복용시 킬 리도 없었을 테고, 막혀있던 마력 이 개방될 때의 고통 또한 미미했을 터.
그런데, 어땠지?
“……저은하!”
“어, 어…….”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도 알려주세요. 어떻게 하면 돼요? 네?”
“아니, 왜 이렇게 급한데?”
“급해요! 정말 급해요, 정말!”
“그러니까 왜?! 어디 아프기라도 해?”
마력을 개방하고 핵석을 숨긴 지 10분도 안 지났는데, 뭐가 급해 벌써 부터 칭얼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아해하는 하데스에도 아이샤는 무작정 떼를 썼다.
“제가 능력을 쓸 줄 알아야 전하도, 공자님도 돕고 그러죠.”
“이봐, 아이샤.”
하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대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 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야. 대체 나 한테 털끝 하나라도 상처 입힐 수 있는 능력자가 이제국에 어디 있다 고?”
“아……. 예, 예.”
아이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왜인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저를 의심하는 듯한 모습에 하데스 가 괜히 울컥했다.
“그대는 모르지? 북부에 마수가 얼 마나 많은지? 여긴 원래 이렇게 평온 한 곳이 아니라고!”
“예, 예.”
“하, 그대는 마수를 실제로 안 만나 봐서 모르는 모양이군. 작은 새끼 고 블린 하나가 손가락만 퉁겨도 그대는 남부까지 날아간다고. 알아?”
“에이, 그건 좀 과장이다.”
“그 정도로 강하고 흉포한 놈들이 라는 뜻이야. 그것들이 왜 꼬리를 말 고 서식지에서 나오지도 못하는지 알 아? 어? 알아?”
“암요. 알죠. 전하가 주기적으로 쳐 들어가서 다 지져버리니까 그러겠 죠.”
“그래! 그리고 보통 마수를 토벌하 러 갈 때마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수 두룩하게 나오지. 그런데 난 한! 번 도!”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하데스가 강 조했다.
“그놈들에게 상처 입어본 적 없다이 말이야.”
에헴, 헛기침을 덧붙이며 고고한 척 턱을 치켜드는 하데스에도, 아이샤는 전혀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일뿐이었다.
“예에, 예…….”
미적지근한 아이샤의 반응에 발끈 한 하데스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냥 참았다.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뭘 알겠나 싶어서.
“아무튼 내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 았으면 하는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런 걱정 필요 없다고. 그러니 까 굳이 핵석의 능력을 개방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 아. 알겠어?”
“네, 알겠어요. 그런데 전하는 어떻 게 능력을 사용하신 거예요? 따로 훈 련은 어떻게?”
하아…….
알긴 무슨.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왜인지 능력 개방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아이샤는, 뭔가 알려주기만 하 면 열심히 받아 적을 기세로 물었다.
하데스는 그런 아이샤를 빤히 바라보다가, 졌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그게 뭐 훈련이 필요한 건가? 난 그냥 마력이 개방됐을 때부터 능력을 쓸 수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 쓱하며 말하자, 멍하니 큰 눈을 껌뻑 이던 아이샤가 코를 쓱 훔쳤다.
“예, 그러시겠죠. 전하는 완벽하신분이니까요.”
“오해하지마. 알려주기 싫어서 그 런 게 아니고, 난 정말로 훈련 같은 거 없이 그냥…….”
“…….”
“날 때부터 다 알았어.”
“하아…….”
아이샤가 긴 한숨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런 그녀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 던 하데스가 말했다.
“훈련 방법이야 속성마다 다르겠지만, 백속성은 아무래도 상처 입은 대 상이 필요하지 않겠나?”
“음……. 그렇겠죠. 그러네요.”
“그럼 조금 기다려봐. 이번에 테그롯 산맥 쪽에 마물 토벌을 보낸 내 군대가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도착할 테니. 그놈들은 한번 토벌을 다녀오 면 아주 엉망진창이 돼 있으니까.”
“오! 그거 괜찮네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으면 일석이조겠어요! 훈 련도 하고, 치료도 받고.”
“그렇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하데스의 표정이 왜인지 미묘하게 굳어졌다.
묘한 하데스의 표정에 아이샤가 고 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니다. 생각해 보니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왜요?!”
“아무튼 아닌 것 같아. 내가 상처 나면 훈련 대상이 되어줄 테니 그때까지 그냥 얌전히 있어.”
“아니, 그렇게 상처 입는 일이 손에 꼽으신다는 분이!”
“아무튼 얌전히 있어.”
“억지예요!”
“스홉!”
짐짓 나무라는 표정으로 하데스가 억지 부리자 아이샤는 황당했다.
그런 아이샤를 모른 척하며 하데스 가 괜히 딴소리 했다.
“그럼 나는 이만 피곤해서…….”
“아. 생각해보니 피곤하실 만도 하 네요. 음…….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 뭐. 미안할 필요까지는 없 고.”
휘휘 손을 저으며 하데스가 몸을 일 으키려 하자, 아이샤가 그를 붙잡았다.
“뭐야?”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여기서 주무세요. 굳이 방까지 돌 아가실 필요 있나요?”
“뭐?!”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던 하데스가 놀라 휘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