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내 마음속 알량한 양심과 죄책감이 곧바로 고개를 젓게 했다.
“그건 좀. 전하의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질 거예요.”
“그런 건 상관없어. 나도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생각해본 문제고, 후에 신전의 뒷조사가 끝나고 어떤 죄든 밝혀진다면 다 해결될 문제야. 그러니까, 그렇게 해.”
“아무리 그래도, 미안해서 전하에게 그렇게까지…….”
“아이샤.”
하데스는 지그시 눈을 감고 나를 불 렀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
“내게 미안해하거나 부채감을 느낄 필요 없어. 그대를 위해서 내가 직접 한 선택이니까.”
그대를 위해서.
……라는 말이 왜인지 선명하게 귓 가로 박혀 들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하데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신전에는 나흘 후 방문하라 고 답신을 보내놨으니 그때까지 나는 바쁠 거야. 우선 그대가 갖고 있는 남 은 약을 전부 이리 내.”
하데스는 신전을 조사하는 데 한시 도 지체할 생각이 없는지, 테이블 위의 약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짐가방을 뒤져 가지고 있던 약을 전부 하데스에게 내주었다.
약봉지를 꽉 구겨 쥐며 하데스가 물 었다.
“원래라면 다음 약의 복용 시간까 지 얼마나 남았지?”
“오늘 아침에 먹었어야 했는데 이 미 한 번 걸렀어요. 아직은 아프지 않 은데…….”
“그래. 이 시간 이후로 그대는 이 방에서 나와선 안 돼. 약을 끊었을 때 그대의 몸에 생기는 변화를 누구에게 도 들켜서는 안 되니까.”
“아, 네. 그렇게 할게요.”
“남작은 물론이고, 그대가 에스클리프에서 데려온 하녀나 호위도 믿을 수 없어.”
덧붙이는 하데스의 단호한 말에 나는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앤까지?
앤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반박하 려다가,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노라고 자부했던 나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었던 신전이 내게 의심스러운 약을 먹여왔다는 사실이 충분히 판명되지 않았는 가.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그 시점 이 1인칭으로 서술되었기에 ‘진심’을 알 수 있었던 남주 아벨. 그리고.
“그대는 아무도 믿어선 안 돼.”
원작에서 아벨을 위해 목숨까지 내 던짐으로써 어느 정도 확실한 신뢰를 적립한 캐릭터.
남주 아빠, 하데스뿐이었다.
***
이튿날.
에스클리프 남작 영애가 머물고 있는 루버몬트 공작성의 손님 방에 공작 이 친히 내린 ‘출입금지 명령’이 떨어 졌다.
문을 걸어 잠근 것은 물론이요, 열씩이나 되는 공작성의 호위들이 쥐새 끼 하나 접근할 수 없도록 그 앞을 지켰다.
그 방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데스의 허락을 받은 공작성의 시종 들뿐으로, 그마저도 하루 세 번, 아이샤의 식사를 챙겨줄 때만 출입할 수 있었다.
아이샤를 설득하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아간 에스클리프 남작이 그 황 당한 상황을 알게 된 것은, 이튿날 오 후께였다.
“루버몬트 공작 전하의 명으로, 영애의 방에는 허락받지 않은 그 누구 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문올 열어달라는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하는 호위의 얼굴에는 표정 한 점 없었다.
남작은 황당했다.
“이보시게. 나는 아이샤의 아버지 일세. 도대체 왜 아이샤가 이곳에 갇 혔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딸 얼굴을 보겠다는데 대체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공작 전하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 이 방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호위는 계속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실랑이는 벌써 20분을 넘어가고 있 었다.
남작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당장 아이샤를 설득해 에스클리프로 데려가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데스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돌리던 차.
“아! 전하…….”
마침 그가 멀리서부터 아이샤의 방을 향해 오고 있었다.
허둥거리며 그에게로 달려간 남작 이 말했다.
“전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한껏 당황한 남작과 달리 하데스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 었다.
“왜?”
“왜, 왜라니요? 아이샤 방에 쫙 깔 린 저 호위들은 뭐며, 출입금지라니? 저, 전하를 의심하려는 것은 아닙니 다만 저건 누가 봐도 우리 애를 감 금…….”
“맞소.”
“예?!”
“내가 영애를 저 방에 감금해둔 게 맞다고.”
태연하게 대답하며 하데스는 빙긋 웃었다.
남작의 몸이 크게 한 번 휘청였다.
“그게, 그게 무슨…….”
“남작이 결혼을 허락해주질 않잖 나? 영애를 에스클리프로 데려갈 생 각이잖아.”
“아, 아무리 공작 전하라도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대노한 남작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 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하데스의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싹 굳었다.
“이봐, 남작.”
“이 사실을 외부에서 누가 알기라 도 한다면, 전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고 행동하신 겁니까?”
“남작이 멀리 살아 그런지 이곳 사 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야.”
남작의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간 하데스가 손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남작이 움찔했다.
하나 하데스는 남작의 흐트러진 목 깃을 잡아 천천히 정리해줄 뿐이었다.
그 손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견 다 정하게 느껴졌다.
한참 위에서 남작을 내려다보고 있던 하데스는, 그와 눈을 맞추며 다시 한번 빙긋 웃고 말했다.
“난 원래이런 놈이야.”
충격 받은 남작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니, 전하…….”
“남작이 애지중지 기른 딸을 살아 생전에 다시 보고 싶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소.”
“…….”
“결혼을 반대하는,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댄 뒤에 결혼을 허 락할 것. 아니면 그냥 결혼을 허락할 것.”
억지였다. 둘 다 결혼을 허락하라는 게 아닌가!
황당해하는 남작의 표정은 아랑곳 않고 하데스는 계속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였으면 좋겠군. 내가 부족한 이유가 뭔지 매우 궁금 해서 말이야.”
“전, 하!”
“남작.”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던 하데스의 얼굴이 또 무섭게 굳었다.
허리를 굽혀 남작의 귓가에 입을 붙 인 하데스가, 그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시골 촌뜨기라도 나이를 허투루 먹진 않았을 테니, 흐름을 보는 눈 정도는 있겠지.”
꿀꺽, 고요한 둘 사이로 남작의 마 른침 삼키는 소리가 컸다.
“이 제국에서 남작이 누굴 두려워해야 하는지, 한번 잘 생각해보도 록.”
말을 마친 하데스는 아무 일도 없었 다는 얼굴로 다시 허리를 펴고 웃었다.
남작이 멍하니 그런 하데스를 응시했다.
무슨 뜻인지 알 것도, 모를 것도 같 았다.
***
하데스가 약을 챙겨 나간 이후, 나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방 안에 감 금된 모양새가 되었다.
24시간 붙어서 내 시중을 들었던 앤은 물론, 신전을 조사하고 있을 하데스, 매일 함께 식사를 했던 아벨도 볼 수 없었다.
그날 저녁과 오늘 세 번, 내 식사를 가져다준 공작성의 하녀가 내가 만난 전부였다.
혹시 나를 가둬둔 일로 아버지와 하데스 사이에 어떤 언쟁이 있었는지 넌지시 물었는데, 하녀에게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답답했지만 일단은 방 밖으로 한 발 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약을 끊었으니 언제 통중이 올지 몰 랐고, 혹여나 그 상태를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다시 새벽이 찾아왔지만 정신은 또랑또랑했다. 하도 할 일이 없어 이미 낮에 질릴 정도로 잠을 청해서였다.
새벽은 깊었는데 잠은 오지 않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페르소나라는 제목이 정말, 그래서 붙인 게 맞을까?’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봐도 다 른 답이 안 나왔다.
작가님이 심심해서 소설 제목을 그 렇게 지었을 리는 없을 테고, 분명 어 떤 의미가 있을 텐데…….
착하고 멋있는 남주 아벨이 열심히살면서 이런저런 고난도 겪고 사랑도 하는 일대기에, 굳이 페르소나라는 제목을 붙일 이유가 뭐 있을까?
작중에서는 끝까지 소설 제목이 납 득될 만한 에피소드가 등장한 적 없 으니, 지금 내 의심은 매우 합리적이 었다.
주인공 아벨도, 그의 일대기를 읽는 독자도.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결코 ‘진 실’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제목에서 대놓고 알리려는 안배 아니겠는 가!
‘갑자기 분위기 스릴러냐고!’
경악스러웠다.
사실 여주는 대단히 뒤가 구린 흑막 소속의 인물이었고, 남주는 끝까지 그걸 모른 채로 사랑에 빠지는 엔딩이라고? 정말로?
황당한 나머지 심장 쪽이 찌르르 울 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
아니…….
착각이 아니다.
“아!”
언젠가 분명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고통이 심장 부근에서 달아오르기 시 작했다.
꼭 불에 달군 바늘을 누군가가 심장에 무자비하게 쑤셔 넣는, 그런 생경 한 고통.
“아! 아!”
약을 끊었으니 언제고 이 고통이 찾 아올 줄 알고 있었고, 견디겠노라 마음먹고 있었음에도 쉬이 참기 힘든 수준이었다.
나는 곧바로 가슴을 붙잡고 침대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겨우 숨만 쉬었다.
“헉, 허……. 윽. 아…….”
미친! 아파!
너무 아프다!
본능적으로 으후이 든 짐 가방이 생각 났지만, 이미 어제 가진 것 전부를 하데스에게 내주었다.
“어혹. 어…….”
견디고 나면 언젠가는 아예 사라지 게 될 고통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런데도 약이 절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장 약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게 아 닌가 싶을 정도로.
그 정도로 아팠다.
눈에 들어오는 건 침대 시트를 꽉 붙잡고 덜덜 떨고 있는 내 손뿐이었다.
“헉! 어윽…….”
삼키지 못한 침이 입 밖으로 흐르고 눈물이 찔끔 났다. 시야가 핑글핑글 돌았다.
너무 아파서, 침대 맡에 달린 설렁 줄을 무작정 잡아당겼다.
이 상태를 내보이면 안 된다는 건알지만, 당장 누구라도 와주지 않는 다면 죽을 것 같았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하게 문 열 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 돌릴 힘도 없어 나는 그저 침 대에 엎드린 채 헉헉대기만 했다.
“아이샤.”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데스였다.
그는 엎드려 있는 나를 바로 앉히고 쓰러지지 않도록 어깨를 꽉 붙들었다.
“저, 전하……. 컥! 너, 너무, 큭……. 아파요. 아파.”
“참아. 견뎌야 돼.”
하데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 큭, 그냥, 그, 그냥 주, 죽는 건아니니까 약……. 머, 먹으면…….”
“안 돼. 참아. 제발.”
무작정 참으라고만 하는 하데스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지금의 나는 그 빌어먹을 약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평생 핵석을 숨기지 못하든 어쩌든, 당장 이 고통을 가시게 할 수만 있다 면 그냥 그걸 먹으면서 사는 게 낫겠 다 싶을 정도로.
“아파. 혹……. 너무, 너무 아파. 아파요…….”
겨우 치뜬 눈에 하데스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는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혹……. 아파. 아프다고. 너, 흑, 너무 아프…….”
그때였다. 침묵하던 하데스가 별안 간 내 몸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은 당장 화상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뜨거웠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은 심장 부근은, 더 그랬다.
그 순간이었다.
심장을 빳빳이 옥죄던 고통이, 어딘 가로 옮겨가는 것처럼.
한순간에 사그라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