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하데스의 화난 얼굴을 보면서, 나는 이 약에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왜요? 무슨 약이래요?”
내 질문에 하데스는 잠시 침묵하더 니, 곧 하루 사이 더 거칠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심호흅했다.
아무래도 머리끝까지 피어오른 화를 다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곧 나를 마주보고 앉아서는, 실로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력이 발현되지 않도록, 억지로 제어하는 약이야.”
그의 말에 나는 한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놀란 내 얼굴을 보며 하데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대의 지병에 쓰이는 약이라고 했지. 해서, 혹시 도움이 되기는 했는 지 알아봤지만…….”
테이블 위에 오른 하데스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손등 위로 시퍼렇게 오른 성난 핏줄 이 지금 그의심리상태를 여실히 드 러내줬다.
“……그런 건 하나도 없더군. 오직 마력을 억제하는 용도로 쓰이는 약이 야.”
“제, 제가 잘 몰라서요. 마력을 억 제한다는 게 도대체…….”
“그대가 지금까지 핵석 하나 숨길 수 없었던 이유가.”
감싸놓은 천이 벗겨져 테이블 위로 나뒹구는 약을 턱짓하며, 하데스가 덧붙였다.
“전부 이 약 때문이었다는 말이지.”
“그렇겠군요. 핵석을 숨기려면 미 미하게나마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 니까요.”
이제야 알겠다.
나는 멍한 채로 핵석이 박힌 내 왼 쪽 손목을 들여 다보았다.
실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내 정신과 영혼이 이 소설 속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왔었는 데…….
‘사실은 전부 이 약을 먹어오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니.’
오묘한 흰 빛을 내고 있는 약은 그 무시무시한 효능과는 상관없이 무척이나 성스럽고 무해해 보였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샤 에스클리프가 지금까지 코 어 쥬얼도 숨기지 못한 채 위태롭게 살아오고 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신전은 대체 왜 힘없는 시골 영지의 귀족 영애에게 이런 짓을 했단 말인 가?
“왜 먹었지?”
하데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재차 물 었으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 약을 처음부터 먹기 시작한 건 내가 모르는 아이샤 에스클리프다.
그녀는 듣기로 착하고 소심하며 순 종적인 성격이었다 하니, 몸이 약한 자길 위해 아버지가 직접 구해다준 약을 당연히 의심 없이 복용하기 시 작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 약은, 내가 아닌 ‘원 래’의 아이샤가 먹기 시작해 10년이 넘도록 꼬박꼬박 복용해오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아이샤가 된 난, 약을 먹지 않았을 때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 험을 해보았으니 죽지 않기 위해 이 것을 먹어왔을 뿐이고.
나는 도무지 신전과 아버지가 일부 러 내게 이 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믿 고 싶지 않아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데스에게 물었다.
“제 지병을 고치는 데 이 약이 아무 런 도움이 안 되고 있었다는 건 확실 한 정보인가요? 전 이 약을 먹지 않 으면 너무 아팠어요. 여기, 심장 쪽이…….”
“아니.”
하데스는 아주 단호하게 고개를 저 었다.
“처음부터 아팠을 리가 없어.”
“……네?”
“이 약은 마력억제제야. 약을 먹지 않으면 당연히 그대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 새어나오겠지. 여태껏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마력이, 안 그래도 약 한 그대의 몸에 흐르기 시작하는 데…….”
그는 지그시 입술을 문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런 고통도 없을 거라 생 각하나?”
“아, 그럼…….”
약을 먹지 않았을 때 심장 쪽에 느 껴졌던 고통은, 지병 때문이 아니라 는 말이다.
“……. 히려 약을 먹고 있었기 때 문에 아팠다는 거네요.”
“그래.”
온몸에 힘이 쪽 빠졌다.
아니…….
대체, 왜?
“아이샤.”
“네, 네…….”
정신없는 와중 나를 부르는 하데스의 목소리에 대답하고 보니, 그는 뭔 가 말하기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입술을 물고 있었다.
왜인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도 같았다.
“신전에서 약을 조달해 그대에게 복용시켰던 게, 남작이라고 했었지.”
역시나.
하데스의 질문에 나는 멍한 표정으 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신전의 계획만 이 아니었다.
약을 만든 것은 신전이었으나 내게 약을 먹게끔 만든 것은 아버지였으므 로.
만약 아버지가 약의 정체를 알고 있 으면서도 내게 이걸 먹인 거라면, 그 이유는?
뭔가 짐작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도 무지 그럴 만한 부분이 없어 더 속이 탔다.
분명 지금 하데스는 아버지를 의심하고 있고, 나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까지 의심 하나 없이 믿 어왔던 사람이 실은 나를 철저하게 속여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덤덤히 인 정하기란 퍽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전하가 무슨 말씀하려는 지 알겠어요. 한데 의심은 가지 만…… 확실히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아. 아버지가 이 약이 어떤 약인지 알고서 제게 먹인 건지, 모르고서 먹 인 건지는요.”
애써 아버지를 옹호해봤지만 이미 머릿속에 가득 찬 의심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게 했다.
아이샤가 약을 먹어온 건 아벨의 나 이 대부터였으니, 제국인들의 마력이 발현되는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딸의 상태를 가장 가까운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다.
누가 봐도,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도 록 일부러 약을 먹인 거였다.
“아…….”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답 답한 신음만 내뱉었다.
가족의 정이라는 건 퍽 무서워서, 특히나 이전의 삶에서도 부모님의 사랑 같은 건 받아본 적 없는 내게는 더더욱 그 의미가 커서.
좀처럼 태연하게 아버지를 쳐낼 수 가 없었다.
하여 나는, 냉정하게 의심할 수 있는 신전부터 파헤치기로 했다.
“전하, 신전은 왜 이런 약을 만들어 서 제게 줬을까요?”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만, 단순히 생각하면 그대의 마력을 통제해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 겠지.”
“대체 왜요? 전하도 아시겠지만 우리 가문 사람들은 민망할 정도로 마력이 미미한 수준이에요. 굳이 그 먼 지만 한 마력을 쓰지 못하게 해서 뭘 하겠다는 거죠?”
“먼지만 한.”
하데스가 눈을 빛냈다.
“마력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순간 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놀라서 눈만 깜빡이는 나를 물끄러 미 응시하던 하데스가 덧붙였다.
“그대가 다른 에스클리프 일원들처럼 미미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면, 사실 이 약을 먹지 않았을 때 그 렇게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 라고 생각해.”
“그런……. 그러면…….”
“억제제의 효능이 사라진 순간, 한 번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방출되었기 때문에…….”
“……죽을 만큼, 아팠던 거라고 요?”
내가 말을 받자, 하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만약, 만약 제가 그렇게 대단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신전에 위협이라 도 되는 건가요?”
“모르겠어. 나도 그게 궁금하군. 지금부터 바로 그 여부를 알아볼 생각이고.”
다시 몸에 힘이 쪽 빠졌다.
알아낸 건 세 가지나 됐다.
약의 정체.
혹시나 쓸 만한 수준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내 몸의 상태.
그리고…….
내게 몰래 마력억제제를 먹여야 할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 신전.
소설 속에서도 큰 권력 집단이었으 며, 무조건적인 선역들의 집합소라고 생각했던 신전을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막막하게 만들었다.
걱정스러움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하데스가 전보다 더 누그러진 말투로 나를 달래 왔다.
“신전은 철저하게 조사할 생각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있어. 무슨 이유였든 용납할 수 없겠지만, 만약 부정한 의도가 있었다면.”
하데스는 무시무시하게 눈을 빛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동원 해서라도 신전을 찍어낼 테니까.”
그의 표정과 말투는, 신전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도 괜히 내가 살벌할 정도였다.
자꾸 원래 캐릭터와 동떨어지게 굴 던 터라 깜빡하고 있었지만, 하데스는 정말로 무서운 남자다.
이미 지금까지도 아벨을 위해 무서 운 짓을 많이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혼란스러운 가운데서 도 나는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한참 눈을 번뜩이던 하데스가 왜인 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아이샤.”
“네.”
“그대가 받을 충격을 알지만, 그래 도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해.”
“뭘요?”
“남작이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
이유…….
“신전의 행보를 캐내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일 확률이 커.”
“……아버지, 가요?”
“그래. 이제국에서 대놓고 신전을 뒷조사할 만한 권력을 갖고 있는 곳 은 단 둘뿐이지. 황실, 그리고 루버몬트 공작가.”
과연 하데스의 의심은 현실성 있었다.
“그대가 공작가의 일원이 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그대가 핵석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약을 복용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신전을 의심하고 조사하게 될 건 당연해.”
“…….”
“남작은 그대가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했지. 그 말이 거 짓은 아니었을 거야. 나만 아니었더 라면, 정말로 상관없었겠지.”
“설마 제가 전하랑 결혼하겠다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하셨던 모양이고요.”
하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일단은 그대가 약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도, 내가 이미 이 약이 무엇 인지 알아냈다는 사실도 숨겨야 해. 신전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궁리를 할 수도 있으니까.”
“네. 모르는 걸로 할게요.”
“그리고 그대는…… 무섭게 들릴지 도 모르겠지만, 그 어느 곳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아. 남작과 함께 에스클리프로 돌아간다면 더더욱…….”
“네, 그런 것 같아요.”
덤덤하게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긴 한숨을 내 질렀다.
“남작은 당장 그대를 데리고 돌아 가려고 하고 있고, 그대는 남작을 따라서는 안 돼. 약도 끊고,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대를 가장 안 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 이야.”
“네.”
“그렇지만 남작이 결혼을 승낙할 생각이 없다는데 계속 여기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지. 해서.”
“…….”
“신전에 대한 조사를 끝마칠 때까 지는, 내가 그대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상황으로 보이는 게 가장 좋을 거 라는 결론이야.”
하데스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확실히, 아버지가 계속 결혼을 반대한다면 나는 이곳에 남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아버지의 속을 다 파 악하지도 못했는데, 무작정 탈적하겠 다고 나서기도 뭐했다.
결혼을 하기 위해 성을 버리는 것까 지 생각해보겠다며 하데스를 안심시 키긴 했지만, 정말로 그런 결정을 아 무렇지 않게 내릴 만큼 용감하고 모 질지는 않았다. 나는.
하데스는 그 모든 상황을 내다보고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그러 니까 다시 말해, 결혼을 허락해 줄 때까지 힘없는 귀족 영애를 감금 해두고 내어주지 않는, 몰상식한 폭 군이 되기를 자처하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