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과연 맞는 말이었다. 하데스는 아벨을 위해서라면, 황실로 쳐들어가서 쿠데타도 거뜬히 일으킬 수 있는 남자였다.
그게 이제 나한테까지 적용된다는 사실은, 왜인지 가슴 한쪽을 싱숭생 승하게 만들었지만…….
어쨌든 하데스의 대답에 용기를 얻은 나는, 드레스 소매 안쪽에 감춰온 약을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천으로 감싼 채 내놓 은 약을 보고 하데스가 고개를 갸웃 했다.
그는 묻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어 곧 바로 열어보았다.
“그대가 먹던 약 아닌가?”
“맞아요. 전하, 혹시 이 약이 어떤 약인지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내 부탁에 하데스는 잠시 눈을 느릿 하게 깜빡이고 물었다.
“신전에서 만들어 보내주는 거라고하지 않았나?”
“네, 맞아요. 그래서 이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먹어왔었죠. 그런데 좀 의심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걱 정스러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자 하데스는 곧바로 알아들은 눈치였다.
의아해하던 그의 눈은 어느새 날아 가는 새도 눈빛만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데스는 두말 않고 바로 약을 챙겨 넣었다.
“반나절 정도 걸릴 거야.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나는 놀랐다.
“뭐, 더…… 안 물어보세요?”
“뭘 물어봐. 그대가 뭔가 의심스러 우니 이런 부탁을 하는 거겠지.”
“그렇긴 한데, 까먹으신 것 같아 서……. 이거 신전에서 만들어준 약 이에요. 이게 뭔지 몰래 알아보는 게…….”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나? 신전 뒷 조사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 든 하데스가 코웃음 쳤다.
“이 내가 그런 걸 일일이 눈치 보면 서 행동할 것 같아?”
“네네, 그렇긴 하죠. 제가 괜한 걱 정을 했습니다.”
“아무튼, 반나절 정도면 돼.”
“……그것밖에 안 걸려요?”
“그것도 넉넉히 생각한 거야. 최대 한 빨리 돌아올 수 있어. 바로 알아봐 줄 만한 놈’이 있으니까.”
하데스는 지체 없이 움직이려는지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이런 점은 참 좋았다.
눈치 빠른 그는 내게 뭔가를 구구절 절 묻지도 않았고, 따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부탁을 거절하지도 않았다.
역시 자의식 과잉만 아니었더라면 충분히 아벨만큼 덕질할 가치가 있는 남자…….
하데스는 방을 나서기 전, 뭔가를 깜빡한 사람처럼 아, 하고 탄성을 내 뱉더니 내 앞에 와서 섰다.
그는 갑자기 큰 손을 내 머리 위로 푹 얹어놓았다.
뭔가 싶어 올려다보니, 하데스는 차 가운 인상과는 영 동떨어진 세상 다정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네? 걱정이요? 아니, 뭐 그렇게 걱 정되는 것까지는…….”
“표정이 그대답지 않아서.”
“아……. 그랬어요?”
하데스의 말에 나는 괜히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졌다.
뜬금없이 찾아온 불길한 촉에, 나도 모르게 초조한 티를 냈던 모양이었다.
“그대는 걱정할 거 없어. 걱정할 일따윈 안 만들겠다고, 내가 약속했잖 아.”
“네…….”
“다녀오지.”
그 말만을 남겨두고 하데스는 바람 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정말로 걱정스럽긴 했던 모양인지, 그의 위로 아닌 위로에 내심 마음속 풍랑이 가라앉는 기분이 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하데스가 나간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 방으로 돌 아왔다.
***
하데스를 기다리며, 나는 테이블에 펜과 종이를 준비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이샤 에스클리프.
나는 조연도 아닌 인물이었다. 그렇 기에 이 소설 속의 거대한 흐름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하나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에스클리프 남작가’는 책에서 이름한 줄 언급되지 않았지만, ‘신전’은 아니었다.
데보라는 신전에 소속되어있는 사제였고, 여주였다.
또한 신전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 지 지겨울 정도로 등장하는 중요한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런 신전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있다면, 에스클리프 남작가는 더 이상 지나쳐 가는 단역 비중이 아니다.
‘내가 이 약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
나는 펜을 들고 종이 위에 대충 끼 적이기 시작했다.
첫째, 이 약을 제조한 ‘신전’은 소설 〈페르소나〉속에서 ‘절대선’으로 묘 사되기 때문이었다.
신전을 이루고 있는 신관과 사제들 은 전부 백속성 제국인들이었고, 설정상 그들은 대체로 선한 사람들이었다.
능력자체도 오로지 타인을 위한 치 유에 기반하는 속성을 지닌 이들이다.
악인으로 표현하기가 더 힘들다고나할까?
신전이 절대선처럼 묘사되는 에피 소드 또한 수두룩했다.
하나 예를 들자면, 아벨과 데보라의 첫 만남.
황실로부터 독립적인 권력 집단인 신전은, 제국의 영토에 적을 두기 위 해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세를 내야 했다.
뭐, 내가 여기서 눈뜨기 전 살던 지 구에서도 개개인에게는 납세의 의무 가 부과되지 않았는가? 비슷한 맥락이다.
하여 신전은 백속성 사제들의 치유 순례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나 각 종 기부금으로 연명해왔는데, 데보라 가 수습 사제에서 승격할 즈음에는 안타깝게도 세금도 못 낼 정도로 재 정난을 겪게 된다.
이유인즉, 아파도 대가를 지불하고 세례 받을 여유가 없는 하층민들을 무상으로 돌보곤 했기 때문이 었다.
일을 할 사제들이 입고 먹을 돈은 꾸준히 빠져나가는데 수입은 미미했 고, 하는 수 없이 신전은 이리저리 돈을 빌려 쓰다 파산 위기에까지 닿고 만다.
그때 신전을 멋지게 구한 것이 바로 우리 아벨이었다.
하데스가 내게 지참금이라고 안겨주려 했던 다이아몬드 광산을 쾌척함 으로써, 아벨은 신전을 구하고 데보라와 만나게 된다.
이것만 봐도 신전을 의심할 여지라 곤 하나도 없지 않은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살 리기 위해 제 살까지 깎아가며 헌신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다음으로 둘째, 나는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명백히 문제가 생기는 몸이었다.
그건 약을 먹 지 않았다가 지옥 문턱까지 구경해보고 온 경험이 있기에 긴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내가 바 보라서 출처도 모를 약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먹어온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냥 의심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 기 때문에!
‘그런데 의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한 촉이 왔단 말이지.’
설마.
신전이 어떠한 이유로 내게 일부러이 약을 복용시켜오고 있었다면?
‘힘이라곤 쥐뿔도 없는 시골 남작 영애한테 이상한 약을 먹일 이유가 뭐 있어? 설마 생체실험이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간에, 나는 신전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신전의 생각은 곧 데보라의 뜻일 것이고 데보라는 여주다. 데보라는 극 중 내내 신전에 헌신하며 그들과 일을 도모하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데보라는 착하다. 천사가 인간 세상에 현신했다면 그것이 곧 데보라일지도 모른다.
……라는 묘사는, 극중에서 우리 아벨의 속내로 등장한다.
내 생각도 아니고 작가님의 생각도 아니다.
‘나 지금소름 돋았어.’
한순간, 둥골이 섬뜩해졌다.
소름 돋은 팔뚝을 쓱쓱 쓰다듬으며, 나는 생각했다.
〈페르소나〉.
여타 로맨스 소설과 달리, 독특하게도 남주 아벨만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작중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벨의심 리상태뿐이고, 그 외의 모든 타인을 판단한 설명과 묘사는 전부 아벨이 내린 개인적인 판단에 기인한다.
쉽게 말해 엄청난 악인이라고 할지 라도, 우리 세상물정 모를 아벨이 선 인이라고 판단했다면 나는 그 대상을 ‘선’이라고 묘사한 내용밖에는 읽을 수 없는 구조였다.
만약, 정말로, 신전이라는 곳이 사실은 아벨까지 속여 왔던 흑막 집단이라면?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나를 괴롭게 했다.
하필이면 그때, 나는 떠올리고 말았 기 때문이었다.
‘작가님한테 하려고 했던 질문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냐? 내 촉은 틀린 적 이 없는데.’
책을 한 장 한 장 핥았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닐 정도로 소설을 정독했으 며, 그리하여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던 나도.
딱 하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점 이 있었다.
죽기 전, 작가님과의 만남을 고대하 며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던 질문도 그것이었다.
「Q. 작가님! 도대체 왜 소설 제목이〈페르소나〉인가요? 」
페르소나.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우리는 흔히 이것을 ‘거짓 인격’을 표현하고자 할 때 쓴다.
그러니까 어쩌면.
속내가 1인칭으로 서술된 주인공 아벨을 제외하고는.
내가 아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모든 전제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악!!!”
그 순간 나는 놀란 마음에 빽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벌컥, 놀란 듯 내 방문이 거침없이 열어젖혀진 것은 동시였다.
그곳에는 하데스가 있었다.
그는 왜인지 창백해진 낯빛과 잔뜩성이 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성큼성 큼 걸어왔다.
하데스는 내 앞에 무언가를 거칠게 내던졌다.
무엇인가 보니 내가 알아봐 달라고 그에게 주었던 약이었다.
“아이샤. 도대체…….”
하데스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내 어깨를 꽉 붙든 채 이를 악 물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걸 왜 먹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