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와 아버지, 아벨이 물끄러미 하데스를 돌아봤다.
그는 귀까지 빨개진 채 민망한 얼굴 로 헛기침 종합세트를 내뱉고 있었다.
그런 하데스를 낭패라는 듯 바라보 던 아버지가 조심스레 말했다.
“일단, 아이샤……. 단둘이 얘기 좀하자꾸나.”
은근히 눈치를 주자 하데스가 얼른 아벨을 안아들었다.
모쪼록 잘 이야기를 나눠보라는 말을 남겨둔 채, 그는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로 바람같이 내 방을 나 섰다.
하데스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아버지는 다시 다급한 얼굴이 되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이샤!”
“왜요!”
뜬금없이 문제를 일으켜 아벨을 울린 아버지가 야속해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약은 제때 챙겨 먹고 있는 게 냐?”
……약?
곧바로 나를 설득할 줄 알았던 아버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영 생뚱 맞은 것이었다.
갑자기 약은 왜?
의아한 마음에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나를 향해 아버지가 재차 물었다.
“북부에 와서도 빠짐없이 잘 챙겨 먹고 있었지? 응?”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세요?”
“어, 어?”
“…….”
“아니……. 호, 혹시라도 깜빽했을 까 봐 걱정이 돼서 이러는 게 아니 냐.”
아버지의 얼굴은 정말로 걱정스러 움이 가득했지만, 나는 그 얼굴에서 어떤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방금까지 한참 결혼 얘기로 열을 올 리다가 뜬금없이 약은 잘 챙겨 먹고 있느냐고?
물론 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 만…….
「신전에 친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있나? 」
「이번에 그대의 이름을 알리고 다시 소식을 전했더니, 신전에서 급하 게 연락을 보내왔어. 당장 내일이라 도 방문하겠다고 하더군. 」
왜 그때 하필, 하데스의 말이 떠올 랐을까?
약을 만들어 보내줄 뿐이지 나와는 한 번도 교류가 없었던 신전.
결혼 발표를 하자마자 난데없이 내얼굴을 보겠다며 공작령에 방문하겠 다고 연락해온 신전.
그리고 정확한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공작령까지 찾아와 결혼을 반대하고 나서는 아버지.
인간에게는 촉이라는 것이 있다.
과학이 발전한 21세기에서 살다 오 긴 했으나, 나는 대체로 비과학적일 지도 모를 이 ‘촉’이라는 것을 믿는 편이었다.
촉.
직감이라는 것은, 일생의 모든 경험 들을 모은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 뇌에서 알리는 경고 신호라는 말 도 있지 않은가.
싸한 느낌은 그저 느낌만이 아닐 거 라는 강한 확신이, 그 순간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뭔가 있나? 약……. 그냥 영양제 같은 게 아닌가?’
순간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의심 이 떠올랐으나, 나는 그런 마음을 감 추고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당연히 잘 챙겨 먹고 있죠. 그건 걱정 하수지 마세요.”
“그래, 다행이구나. 그리고 결혼 문제는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루버몬트 공작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야.”
아버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나와 하데스에게는 사실대 로 말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지금은 속으로 고민해봤자 답이 나 오지 않을 문제였다.
나는 그저 한 발 물러서는 척하기로 했다.
“음…….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알겠어요.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당장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 기는 좀 그래요. 전 정말 이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여전히 단호했지만 그래도 한풀 꺾 인 내 태도에 아버지는 조금 망설이 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버지도 한 발 물러서긴 했 지만 이 갈등이 쉬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건대, 당장은 한 껏 떼쓰는 나를 달래두고 어떻게든 설득할 생각인 듯했으니까.
하나 내 머릿속에는 이미 결혼 허락을 맡고 말고 하는 문제는 저만치 날 아가 사라져 있었다.
매일같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먹어 왔던 그 ‘약’의 정체가 뭔지 의심이 든 순간부터, 좀처럼 태연한 척하기 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자마자 나는 하데스의 방을 찾았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초조한 얼굴로 정신 사납게 이리 갔다 저 리 갔다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일단은 아버지를 여기 머물게 하 면서 설득해보려고요. 곧바로는 대화 가 안 끝났어요.”
“……그렇군.”
“걱정하실 거 없어요. 계속 반대하 시면 황실에 탈적 요구서를 제출하고 가문에서 나오면 되는 걸요.”
내 말에 하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레센타 제국의 고리타분한 혼인제도.
보통 가문의 일원들은 가주가 공식 적으로 혼인을 허해주지 않는 이상 마음대로 결혼할 수는 없었다.
철부지 귀족 후계자들이 평민들과 눈 맞아 세기의 사랑을 부르짖으며 결혼시켜 달라 생떼 쓰는 일이 더러 있었으나, 정말로 그런 결혼이 성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이유였다.
다만 개인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 시할 수는 없으니, 혼인 문서 없이도 결혼이 가능한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그것이 바로 ‘탈적’.
쉽게 말해, 에스클리프라는 성을 버 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혼인 문서 에는 아버지의 인장이 필요 없다.
‘아이샤 에스클리프’가 아니라 그냥 ‘아이샤’가 된 내 지장만 찍고 나면 그뿐이었다.
내가 이런 말까지 꺼낼 줄은 몰랐던 지, 하데스는 놀란 눈치로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뭘또 그렇게까지…….”
“음, 어차피 결혼으로 덕을 볼 만한 가문은 아니었으니 제가 성을 잃더라도 딱히 아쉬운 건 없으시겠죠?”
에스클리프라는 성을 버리면 나는 더 이상 귀족이 아니다.
사실 귀족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던지라, 하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하지 만…….
나에게는 의미가 좀 크긴 했다.
서류상이긴 해도 집도 절도 성도 없는 무연고의 제국인이 된다는 건.
“그래도 귀족 영애를 아내로 맞는 거랑, 신분도 뭣도 없는 평민을 아내 로 맞는 건 좀 다르긴 하네요. 죄송해요.”
뒤늦게야 눈치를 보며 말하는 나를, 두 눈 깜빽이며 가만히 응시하던 하데스가 버럭 했다.
“뭔 소리야, 그건!”
“어마, 깜짝앗!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그대는 날 대체 뭐로 보는 거야?”
하데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덧붙였다.
“내가 그딴 걸 아쉬워할 이유가 뭐 가 있어? 왜 죄송해? 나는 그대가 불 법으로 망명해온 타국 노예였더라도 상관없어. 알아듣겠어?”
웬 오바…….
하데스의 불같은 반응은 퍽 당황스러웠지만,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내가 뭐가 됐든, 하데스는 결혼을 강행할 의사가 확실해 보였으니까.
잔뜩 흥분한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정말로 나는 그대가 그런 극단적 인 선택을 해서 설사 성을 잃게 된대 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
“그래도 천륜을 저버리는 희생까지 그대에게 요구하는 건, 맘이 좋지 않 아.”
“아, 네. 그렇죠. 당연히 최대한 설 득해보고, 정 답이 없을 때 고를 선택 지예요. 아버지가 여기 계시는 동안 제가 더 얘기해 볼게요.”
달래듯 말하자 하데스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그는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음…….
대충 결혼 문제는 일단락된 듯했지만, 내가 하데스를 찾아온 이유는 이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조금 머뭇거 리다가 말했다.
“저기, 전하.”
“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다소 걱정하는 듯한 내 표정을 알아봤는지 하데스가 의아해했다.
“뭔데?”
패기 있게 하데스를 찾아왔던 것치고,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나는 당장 내가 복용하고 있던 약이 도대체 뭐였는지 시급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한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가 막막했다.
신전에서 직접 만든 약이다. 그 약을 조사하는 것은…….
제국 황실, 루버몬트 공작가 다음으 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신전의 뒤를 캐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당장 신전의 눈을 피해 약을 조사해 줄 만한 인맥도 내게는 없었을뿐더러, 어찌 찾는다고 해도 믿을 만한 인 물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약이 어떤 것인지 모른 채 계속 먹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몸이지만, 그렇다고 덮어놓고 계속 이 약을 복용하기에는 30년 인 생의 빅 데이터에 기반한 촉이 요란 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기에.
아무튼 신전의 뒷조사 좀 해달라는 말을 쉽게 꺼내놓을 수 없어 망설이 고 있는데, 문득 하데스가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아왔다.
“이봐, 아이샤.”
“네.”
“그대는 내 아내가, 내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내 사람은, 내게 뭔가를 부탁할 때 이렇게 망설일 필요 없 어.”
“아…….”
단호한 하데스의 말에 나는 잠시 멍 해졌다.
“들어보고, 라는 말은 없어.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서 뭘 요구하든 다 들 어주지.”
“……정말요?”
그의 말이 너무나도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다시 한번 확 인받고 싶은 마음에 내가 물었다.
하데스는 그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 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내가 이제국에서 그대를 위 해 하지 못할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