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다행스럽게도 후계위를 대체할 인 물은 있었다.
어머니의 둘째 남동생, 그러니까 나 에게는 작은 외숙 되는 분.
「이 아비는 그저 네가 행복하게 살 다 가길 바란단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려무나. 결혼도 네가 하고 싶은 사람이랑 하고…….」
몸 약한 나를 볼 때마다 눈물짓던 심약한 아버지는 항상 입버릇처럼 그 런 말을 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아버지는 후계위를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미안한 눈치였지만, 그걸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고 당장 나부터도 그 자리를 원하지 않 았다.
좁아터진 영지에서는 영주 소리 듣 기도 민망했고, 그마저도 대륙 남쪽 끝에 콕 처박혀있다.
내 소개라도 할라치면 꼭 상대 쪽에 서 에스클리프 가문인지 엑스칼리버 가문인지 되묻고야 마는 수준으로 유 명세도 전무하였으니, 그 수장 직에 무슨 욕심이 들겠는가?
나는 그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 고 있다는 완벽한 메리트 하나로 충 분히 여유로운 갑부인생을 즐길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 족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하실 분이 아닌데요? 제가 지나가는 거지를 데 려와서 남편 삼겠다고 해도 그러라고 하실 분이에요. 전하께서 뭔가 잘못아신 거 아니예요?”
대륙 횡단까지 해 새벽같이 도착한 아버지가 내 결혼을 반대할 이유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이다.
예정에도 없던 하데스와의 결혼을 나 혼자 냉큼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 도 그것이었다.
어차피 내가문에서 반대나 뒷말이 나올 리 없었으니까.
“아니야. 남작은 왜인지 우리의 결혼이 불만인 듯해. 정확한 이유는 말 해주지 않았지만, 그대가 백속성의 대를 잇지 않아도 되는 줄 아는데도 내게 그런 변명을 한 걸 보면…….”
“아버지가 불만을 가지실 그 어떤이유도 없어요. 그건 제가 잘 알아요. 굳이 짐작 가는 게 있다면…….”
“있다면?”
하데스는 그 이유를 안다면 근원부 터 통째로 뿌리 뽑아 없애버릴 기세 로 눈을 빛냈다.
“수준이 너무할 정도로 차이 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무리 곱게 기른 딸이라지만 루버몬트에 갖다 대기는 좀 민망하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
아주 약간의 고민도 없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하데스에, 나는 조금 얼 떨떨한 기분이 되어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넌 몸만 와, 하고 멋있게 프러포즈 하는 재벌 2세의 가난한 연인이 된 기분이었다.
분명 뭔가를 잘못 알았겠거니, 대수 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와 달리 하데스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신 미간을 문질렀다.
“그런데 남작의 반응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이 결혼이 거슬리는 이유가 분명히 있어. 분명히.”
“으음, 그건 제가 직접 여쭤보면 될 일이에요. 그런데 전하, 잠도 제대로 못 잔 얼굴로 날 밝자마자 제 방을 찾아오신 게…… 그러니까…… 결혼 못 할까 봐 걱정되어서예요?”
나는 정말 놀라워 물었다.
나야 이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면 영 영 합법 적인 아벨 덕질이 불가하기에 아쉬울 만도 하지만, 하데스는 그 정 도까지는 아닐 테다.
그래도 명색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공작 가문의 수장이 아닌가.
우리 아버지가 한 번 튕겼기로서니 이리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영 어울리 지 않는데.
하데스의 속내가 궁금해서 시선을 빤히 맞추고 표정을 살피는데, 그가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허둥거렸다.
“뭘 또 걱정되어서 잠을 못 자기까 지? 아닌데? 그냥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라 좀 당황했을 뿐이 지…….”
“으음, 아무튼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와 얘기해 볼게요. 지금 어디 계세요? 아버…… 헉!”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한 달 만에 보는 아버지를 찾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나는, 무심코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가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는, 우유가 담긴 유리잔을 든 아벨이 서 있었다.
저건 아침마다 건강한 하루 한 잔을 외치는 나를 위해 매일 앤이 가져다주는 거였다.
아마 오늘도 가져다주려다가, 어찌 어찌 아벨을 만나 대신 들려준 모양이었다.
도대체 아벨이 우리 둘의 대화를 어 디서부터 들은 걸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충 격 받은 표정을 보니 뭔가 문제가 생 겼다는 사실은 알아챈 모양이 었다.
“저, 저, 저어……. 공자님.”
“여, 여, 영애…….”
아벨의 적색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 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동공지진.
얼마 안 가 큰 눈망울에는 그렁그렁 물기까지 맺혔다.
옆을 돌아보니 하데스도 낭패라는 얼굴이었다.
이 조심성 없는 인간 같으니.
나는 하데스의 어깨를 아프라고 한 번 짝 때려준 후 속삭이는 목소리로 타박했다.
“문 좀 닫고 다녀요, 좀!”
한 대 맞은 어깻죽지를 쓱쓱 쓰다듬 으며 당황하는 하데스를 남겨두고 나는 급히 아벨을 향해 다가갔다.
“공자님.”
아벨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기 어코 떨어졌다.
“나, 나, 남작님이 결혼을 바, 반대하시는 거예요?”
“아니예요, 아니예요.”
“아니야.”
당황한 나와 하데스는 일단 잡아떼 고 봤지만, 눈치 빠른 아벨은 뭔가 일 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좀처럼 진 정하지 못했다.
들기에 버거워 보이는 우유 잔을 받 아들자 아벨은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작고 통통한 손이 연신 눈가를 훔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저, 저 때문인 게 분명해요.”
“아니예요!”
“아니야!”
“그러, 그렇지만…… 아버지가 지금까지 결혼을 못 하신 건…….”
“아니예요, 공자님! 그건 공작 전하의 문제지 공자님의 문제가 아니에 요!”
“……내가 뭐?”
“아, 좀!”
눈치 없이 끼어드는 하데스에게 핀 잔을 주자 그가 불만스럽게 입꼬리를 내렸다.
이건 뭐, 애를 두 명 키우는 기분이다.
“공자님,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전하께서 뭔가 잘못 아신 거예요. 제 가 가서 아버지께 여쭤보고 올 테니 까, 울지 마세요. 응?”
아벨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자 그는 더 서러웠는지 아예 내 품에 쏙 안겨들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생기는 걸 무척이나 고대했 던 아벨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안쓰 러웠다.
동시에 연락도 없이 찾아와 하데스 에게 이해 못 할 말을 늘어놓은 아버지에게 약간 화가 났다.
당장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할 듯했다.
“전하,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세 요?”
“손님방에. 같이 가겠어?”
“아뇨. 일단 저 혼자 갔다 올게요. 전하는 공자님 좀 달래주세요.”
내 말에 하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우는 아벨을 번쩍 안아들었다.
판박이처럼 생긴 둘이 찰싹 달라붙 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데, 어째 곰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을 남겨두고 험난한 사회로 내던져지는 가장이 된 기분이 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와의 오해를 풀고 기필코 결혼 허락을 받아내리라.
결의에 찬 눈으로 방을 나서려던 그 때였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의 다급 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얼굴을 쏙 내보인 건 앤이었다.
“아, 아가씨! 어머, 전하랑 공자님 도 계셨네요?”
“무슨 일이야, 앤?”
“남작님께서 지금 얼른 아가씨를 보시겠다고…….”
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뒤로 익숙한 아버지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앤만큼이나 다급해 보였다.
“아이샤!”
대뜸 나를 부르며 들어온 아버지는 뒤에 선 하데스와 아벨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당황하고 있는 사이, 하데스의 품에 서 내려온 아벨이 쪼르르 내 옆으로와서 섰다.
그리고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훔치며 아버지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에스클리프 남작 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벨 루버몬트 라고 합니다.”
아마도 아벨은 자기가 아버지에게 예쁘게 보여야만 이 결혼이 성사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어린 나이에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퍽 안쓰럽게 느껴져서, 나는 말문을 잃고 그런 아벨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버지가 곧 묵례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자님. 벤자민 에스클리프라고 합니다. 저희 딸이 폐가 많습니다.”
“폐, 폐라니요? 아니예요, 남작님. 에스클리프 영애가 북부에 와서 저는 하루하루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여, 영애가 계속 여기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호소하는 아벨에 아버지는 나처럼 말문을 잃은 모양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보아, 왜인지 하데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내게 결혼은 안 된다고 말하러 온 듯한데…….
하데스와 아벨을 내보내고 말을 할까 하던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물었다.
“아버지. 전하에게 얘기 전해 들었 어요. 저희 결혼을 반대하신다고요. 전하가 뭔가를 잘못 아신 거겠죠? 아버지가 그러실 리 없잖아요?”
“저, 그, 아이샤…….”
“사실이라면 무슨 이유인지 알려주 세요. 실은 무슨 이유가 됐든 전 이 결혼을 포기할 생각이 없지만요!”
단호한 내 대답에 방 안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둣 싸늘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앤 이 쭈뼛거리며 도망치듯 방을 나가는 게 보였다.
“아이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지 이 루버몬트 공작 가문이 어떤 곳 인지 모르는 것 같아.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란다.”
“남작! 정말 그런 걱정을 하는 건 가? 영애가 신경 쓰거나 부담을 느낄 일 없도록 내가 알아서 잘 하겠다는 데도?”
하데스가 흥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언제가 됐든 우리 아이를 공작가의 일원으로 받아들 인 걸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루버몬트와 에스클리프는 어울리지 않아요. 저는 전하께서 이 사실을 가장 잘 아 실 거라고…….”
“아버지!”
내가 빽 소리치며 아버지의 말을 끊 었다.
“이제 와서 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언제는 결혼. 하고 싶은 사람이랑 하 라면서요? 누굴 데려와도 제가 아까 울 거라면서요? 저처럼 귀엽고 똑똑 하고 예쁜 딸에게는 이제국의 황제 폐하도 아까울 거라고 하셨잖아요?”
“아, 아니? 아이샤! 내, 내가 언 제…….”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이었겠지만 아무튼 황족을 능욕하는 발언이었던 지라, 아버지는 하데스의 눈치를 보 며 한껏 당황해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 았다.
내가 루버몬트 공작부인이 된다면 아버지는 쌍수 들고 환영해야 옳았다.
에스클리프 남작가는 귀족사회에서 단숨에 주목받게 될 것이었다.
그야말로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 되는 격인데…….
도무지 아버지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어 답답해진 내 시선이 무심 코 옆에 선 아벨에게로 향했다.
내 치맛자락을 꽉 붙든 아벨은 입술을 삐죽이며 눈물 그렁그렁한 눈을 반짝였다. 억지로 눈물을 참는 얼굴이 더 안쓰러워 보였다.
못난 덕후가 마음 여린 최애를 벌써 몇 번이나 울리고 만 건지!
정작 하데스는 가신들도 치우고, 우리 결혼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은 착착 없애놓았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다니?
나는 아벨의 손을 꽉 잡고서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전 이 결혼을 꼭 해야겠어요!”
“아이샤!”
“말 안 듣는 철부지 딸처럼 보일까봐 이렇게 떼쓰지는 않으려고 했는 데! 결혼 허락 안 해주시면 저 콱! 나 가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여, 영애!”
“아니, 아이샤…….”
당황한 아벨과 아버지가 허둥거렸다.
내 단호한 태도에 살짝 현기증이 나는이지 아버지가 비척거리며 물었다.
“이, 이 아버지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이해해줄 수는 없겠니? 북부에 놀 러 간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무슨 한 달도 안 되어서 영지에 혼인문서를 보내고…….”
“제 마음은 한 달짜리가 아니예요!”
나는 여전히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아벨을 바라보며 결연하게 대꾸했다.
“벌써 몇 년이나 키워왔던 마음이 라고요! 전 이 사람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결혼 허락 안 해주시면 정말로 콱죽어버릴 거예요!”
진지하게 소리치자 방에는 다시 정 적이 내려앉았다.
고요함을 깬 건 뒤에서 들려오는 하데스의 당황한 헛기침 소리였다.
“어음! 크흠! 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