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게…… 무슨 말인가, 남작?”
“가당치도 않게 들리실 줄 압니다. 그렇지만 저는 정말로 이 결혼을 승 낙할 수 없습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 로 이해해주십시오, 전하.”
“아니, 그러니까, 이유가 뭔데?”
하데스가 다급히 묻자, 남작은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에스클리프 남작가는 대대로 백속성을 유 지해 온 가문입니다. 1대 성녀 아벨라 에스클리프의 신탁을 지키기 위 해, 저희는 백속성의 피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건 알고 있소. 헌데 어차피 영애를 후계로 삼을 생각은 없었잖나?”
다소 홍분한 하데스의 언성이 높아 졌다.
그의 말에 남작이 흠칫 놀랐다.
에스클리프 남작가를 조사하면서, 당연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에스클리프 남작가의 피를 이어받 아 다시 재림하리라는 성녀의 500년 전 신탁을 따라, 그들은 절대 다른 속성의 피가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백 속성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아이샤는 에스클리프 남작의 외동 딸이다.
원래대로라면 남작의 뒤를 이어 작 위를 이어받아야 하지만, 그녀는 후 계자 수업을 받은 적 없었다.
남작이 애초에 방계 쪽의 사내에게 작위 계승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런 행적을 따져보면, 결혼을 반대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데스가 그러한 가문의 세세한 사 정까지 알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지, 남작은 당황한 눈치였다.
어두워진 남작의 낯빛을 본 하데스 가 덧불였다.
“개인적인 사정을 조사한 것에 남작의 기분이 불쾌했다면, 사과하겠 소. 하나 영애와 결혼을 논하게 된 시 점에서 그쪽의 사정을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소.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오.”
“……괜찮습니다.”
“그러면 결혼을 반대하는 정확한 이유를 내게 알려주시오. 뭔가 남작의 마음을 거슬렀거나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해결책을 찾 도록 할 테니…….”
하데스는 꼭 결혼을 허락받지 못하 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초조해 보였다.
제 주인과 남작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시종들은 놀랄 수밖에 없 었다.
루버몬트 공작가와 에스클리프 남작가의 결합.
솔직히 말하자면, 나란히 언급하기 도 민망할 정도로 그 입지와 위세가 천지 차이인 두 가문이 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굴어도 모자랄 남작의 미지근한 반응도 이해가 안 됐지만, 더 의아한 것은 하데스의 태도였다.
감히 콧대 높게 구는 에스클리프를 쉽게 코웃음 치며 무시해도 좋을 대 루버몬트 공작가 수장이, 도대체 어 째서?
이제는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걱정스러워하는 하데스의 모습에 시종들 은 확신했다.
처음에야 에스클리프 영애의 열렬 한 구애로 시작되었던 관계지만, 이제는 제 주인이 그녀에게 더 안달하 고 있는 모양이 라고!
“우리 애가 아직 철이 없어서 북부까지 공작 전하를 보겠다고 올라온 모양입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만, 전하께서 철부지인 그 애를 이렇게까지 받아주실 필요는 없 습니다. 제가 바로 데려가도록 하겠 습니다.”
“아니오, 남작. 영애가 철없이 매달 려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려는 게 아니오.”
하데스는 잠시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심호흡하고는 말했다.
“매달리고 있는 건 내 쪽이지.”
이어지는 말에, 남작을 포함한 시종 들 전부 놀라 숨을 삼키고 말았다.
가장 먼저 제정신을 차린 건 남작이 었다.
그는 하데스의 말에도 단호한 태도 로 일관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전하. 저는 절대로 이 결혼을 승낙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말하지도 않고서, 남작은 시종일관 굳건한 태도였다.
남작을 바라보는 하데스의 눈빛이 묘했다.
지금 남작의 반응으로 보아서는, 쉬 이 해결될 문제가 아닐 듯했다.
하데스는 한 발 물러섰다.
“일단은 밤이 늦었소. 날이 밝고 나 서 영애와 함께 얘기해보기로 하지. 방을 내어줄 테니 여독을 푸는 게 좋겠소.”
네 말은 알겠으나, 지금 당장 멋대 로 아이샤를 데려갈 생각은 말라는 완곡한 협박이었다.
뭐라 대꾸하려던 남작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쾅쾅쾅쾅!
“아니!”
쾅쾅쾅쾅!
꼭두새벽부터 뭔가를 두드려 깨는 소리에 불쾌하게 눈을 뜨고 보니, 방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이샤! 아이샤! 일어났나? 일어났으면 얘기 좀 하지? 아이샤?”
“……전하?”
집 앞에서 굴삭기로 대공사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그저 하데스가 방문 두드리던 소리였던 모양이다.
막 일어난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는 귀찮은데.
그렇다고 방금 잠에서 깨 씻지도 않 은 채로 하데스를 만나기에는 조금신경 쓰였다.
귀찮음과 매너의 경계에서 줄다리 기를 하던 내 의지는, 결국 내 이름이 닳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애타게 불러재끼는 하데스가 걱정되는 마음에 굴복하고 말았다.
오해는 말았으면. 정말로 씻고 준비할 여유까지 부리기에는 하데스가 너무 급해 보였을 뿐이다.
“들어오세요. 일어났어요.”
대충 눈곱만 쓱쓱 떼고 들어오라 하 니 벼락같이 문이 열렸다.
들어온 하데스가 쏜살같이 내 침대가로 달려왔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람?
거의 슬라이딩 하듯이 날아 붙은 하데스는 내 침대 옆에 눈높이를 맞추 고 앉은 다음 허둥거 렸다.
할 말을 준비하려는지 잠시 숨을 고 르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놀랐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세상에, 전하!”
“아이샤, 그러니까 어제 새벽에…….”
반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은 내 손이 반사적으로 먼저 나갔다.
거뭇거뭇한 눈 밑을 어루만지자 하데스가 멈칫했다.
“얼굴이 뭐 이렇게 없어 보여요?! 잠 못 잤어요?”
“어, 없어 보인다고?”
아차. 하데스가 충격 받은 얼굴로 되물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에게 없어 보인다는 외모 지적은 꽤나 충격적일 터였다.
내가 정정했다.
“아, 물론 전하는 여전히 잘생기셨 지만요. 오해는 마세요. 제 말은, 걱 정될 정도로 피곤해 보인다는 뜻이에요.”
“그렇겠지. 오해는 안 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수척한 뺨을 몇 번 쓰다듬던 하데스 가 다시 다급히 말했다.
“어제 새벽에 에스클리프에 보낸 전령이 도착했어.”
“아, 그래요?”
그게 뭐 별 건가.
“그런데 남작도 같이 왔더군.”
“네? 아버지가요? 그냥 혼인 문서에 도장만 찍어 보내실 줄 알았는 데.”
의외였지만 이렇게 놀랄 일까지는 아니었다.
혹시나 이 사람만큼 없어 보이는 몰 골이진 않을지, 대수롭지 않게 거울 있는 화장대로 향하던 내 뒤를 하데스가 졸졸 따랐다.
“그런데 오시면 오신 거지, 왜 이렇 게 흥분하세요? 설마 아버지가 지참 금이라고 암소 백 마리를 끌고 오신건 아니겠죠? 그거 우리 가문 전 재 산일 텐데…….”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더군.”
“네?!”
막 일어난 얼굴을 살피던 나는 화들 짝 놀라 하데스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왜요?”
“에스클리프 가문은 대대로 백속성을 유지해왔다면서 외동딸인 그대를 백속성의 사내와 결혼시킬 생각…….”
“잉?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라고는 했지만, 확실히 말 도 안 되는 소리지. 남작은 그대의 작 은 외숙 되는 리프너 경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잖아.”
하데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여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했다는 말에 일 차로 놀랐다가, 시골 남작 가 문의 후계 사정까지 눈에 훤히 꿰고 있는 하데스의 말에 이 차로 놀라 소름 돋았다.
흠칫 몸을 떠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결혼할 상대 가문에 대한 기 본적인 정보 정도는 나도 가지고 있 어야지?”
“그, 그건 그렇지만…….”
역시 공작가의 정보력, 무섭다.
하데스의 말대로였다.
에스클리프 남작가는 전통처럼 백속성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원칙적으 로 제1 계승 순위인 나는 무난히 대를 잇기 위해 같은 백속성의 상대와 결혼해야 할 운명이었다.
백색의 핵석이 달린 손주라도 아버지께 안겨줄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6속성 중 가장 열성인 백속성은 그 어느 속성과 만나도 꽝이었다.
괜히 백속성 제국인들의 개체 수가 손에 꼽는 게 아니다.
하물며 가장 우성이라 일컬어지는 화속성과 결합한다면?
더 볼 것도 없다.
뜬금없이 든 상상이지만 내가 하데스의 애라도 낳는다면 분명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판박이인 아이가 몸 어딘가에 시뻘건 적색의 코어 쥬얼을 달고 나올 것이 뻔하다.
워낙에 우월하신 유전자인지라 애는 태어나자마자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생각이 길어졌지만 아무 튼, 원래대로라면 나는 남편 하나 마음대로 고르지 못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누가 들으면 뭐 이런 미개인들의 전통이 다 있냐며 황당해할 테지만, 몇 백 년을 그래왔다고 하니 그냥 그런 가 보다 하고 수긍했다.
아, 물론, 결과적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기에 수긍했던 거였다.
이미 이 몸으로 눈을 뜨기 전부터, 아이샤는 에스클리프 가문의 후계위 와는 연이 없는 인물이 었기에.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의술의 발전이라곤 거의 전무하고, 치료법이라고는 백속성 신전 사제들의 세례뿐인 이 세계에서는 몸 약한이들이 단명한 사례가 많았다.
하여 계승권이 있다 하더라도 가문의 존속을 위해 미리서부터 후계자 논의에서 제외되는 개복치들이 왕왕 있었다.
그게 바로 나, 아이샤 에스클리프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