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네? 신전에서요?”
“그래. 애초에 내가 결혼하든 말든 그쪽과는 관련 없는 일인 데다가, 딱 히 연락하고 지내는 관계도 아니지. 한데 갑자기 방문해 축하하고 싶다고 연락을 보내와서 뭔가 싶었는데, 그 대 때문인 모양이야.”
“전 신전에 아는 사람 없는데요?”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하데스의 말대로라면 신전에서 갑 자기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보내왔고, 그 이유가 단순히 결혼 사실을 공표 해서가 아니라는 얘긴데…….
결혼 상대가 아이샤 에스클리프라는 사실을 듣고 이곳에 방문하길 원 한다고?
나는 소설에 이름 한 줄 등장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조연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하데스의 추측대로 내가 딱히 신전과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도아니다.
“약은 신전에서 보내주고 있는 것이라며? 그렇다면 남작이 신전과 관 계 유지를 잘 해오고 있는 모양이지. 어찌 되었든 나쁘지는 않아. 신전이 딱히 내게 필요한 곳은 아니지만, 그 래도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건 없으 니.”
“아아, 아버지요.”
나는 내 아버지, 에스클리프 남작을 떠올렸다.
하얗게 센 머리에 마찬가지로 흰 수 염도 덥수룩한 그는 눈꼬리가 축 처진 착한 아저씨 인상이었다.
막 아이샤의 몸으로 눈을 떴을 땐 웬 산타 할아버지 코스프레 하는 외 국인이 눈앞에 있어서 여기가 디즈니 월드쯤 되는 줄 알았다.
그런 남작이 내 새로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나쁘지 않은 기 분이었다.
그는 딸인 나를 매우 사랑해주는 아버지였으며, 몸이 약한 것을 자주 안 타까워하는 착한 사람이 었으므로.
전생에서 아버지라는 존재에 그다 지 애정을 느낄 일이 없었던 나는, 3년 동안 에스클리프 남작과 퍽 돈독 한 부녀 관계를 유지해왔다.
거기에 신전이 한가한 곳이 아니라 는 걸 하데스에게 듣고 나니, 아버지 가 조금 고맙게 느껴졌다.
일이 많은 곳이라는 건 알지만, 소설 속에서는 신전이나 데보라나 툭하 면 등장해댔기에 그 공사다망함이 크 게 와 닿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 까…….
아무튼 신전은, 따로 시간을 낸다든 가신경 써서 약을 만들어준다든가 할 여유가 없는 곳인 모양이었고, 그런데도 나를 위해 신전에서 약을 융 통해왔던 아버지를 떠올려보면 새삼 감동스러웠다.
“전하의 말대로겠네요. 약은 꽤 어 렸을 때부터 먹어왔으니까 신전과는 연락을 오래 해오셨을 거예요. 친한 분이 있기는 하겠죠. 저는 잘 모르지만.”
“그래서 좀 바빠지겠어. 신전 맞을 준비도 해야 하고, 오늘이나 내일쯤 에는 에스클리프에 보낸 전령이 도착할 테니까.”
“벌써요?! 내가 여길 거의 두 달 걸려서 왔는데?”
대륙 끝에서 끝까지 왕복하는데, 시 간이 한 달도 안 걸린다니.
놀란 나를 보며 하데스가 혀를 쭛쭛 찼다.
“고작 하녀 하나에 호위 하나만 데리고 삯마차를 갈아타면서 두 달 만 에 온 게 더 놀랍군. 혼인 문서를 보 내는 일인데 당연히 전령들은 술사 (術師)로 고용했지. 풍속술사와 토속 술사면 대륙 횡단은 2주 만에도 해.”
“오, 돈 좀 쓰셨군요.”
“당연하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 부탁하는 일인 데.”
어머. 조금 멋있는 멘트라 살짝 설 렜지만, 정작 하데스는 별생각 없이 말했던 모양인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역시 맥락 없는 자의식 과잉만 아니 었더라면, 내가 하데스를 덕질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늘 혼인 문서가 도착한다는 말에 나는 뒤 늦게 들뜨고 말았다.
‘드디어 아벨의 엄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가…….’
할렐루야.
미리 불러도 좋다고 사심을 담아 아벨을 꼬셔도 그는 단호했다.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걱정하는 것 같았는데, 계속 강요할 수도 없어 기 다리고만 있던 차.
이제 혼인 문서가 도착하고, 식을 올리기 전에 먼저 서류상으로 하데스의 아내가 되기만 해도 나는……!
‘합법적인 덕질 가능! 아벨에게 엄마 소리 듣는 것도 가능!’
“아잉…….”
순간 부끄러워지는 바람에 붉어진 빰을 감싸고 수줍어하다가, 나를 보는 하데스의 눈과 마주쳤다.
아, 실수.
이번에도 역시 하데스는, 좋아 죽는 나를 보고 한심하다는 둣 픽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좋냐고요?”
대사를 빼앗아 불쑥 끼어들자, 하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 네. 좋고말고요.”
“흥분하기는. 그대를 위해서라도 서류 처리부터 예식 준비까지 최대한 빨리 진행할 수 있게 노력해보지. 나 만 믿어.”
“아, 예.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판사판. 되돌 릴 수 없다.
아벨에게 선물 공세하고 편지 썼던 일도 다 자기 좋아 그런 줄 아는 인 간이니, 내가 사실을 말해도 안 믿을 기세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냥 초연해지기로 한 것이었다.
“아무튼 식을 올리기 전에는 살을 좀 찌웠으면 좋겠는데. 보는 눈 많은 데서 픽 쓰러져버리기라도 할까 걱정 되는군.”
“내가 무슨 종이인형이에요?”
……라고는 해도, 워낙 픽픽 쓰러진 전적이 많은지라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럼 네가 종이인형이 아니면 뭐냐는 듯한 하데스의 시선을 슬쩍 피하 자, 그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로 말했다.
“뭐, 여기 뒷산에서 곰이라도 잡아다 줘?”
나는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말이 뒷산이고 말이 곰이 지, 북부의 만년설 쌓인 설산은 온갖 흉포한 마 수들의 집결지가 아닌가.
“웅담으로 보약이라도 지어주시게 요?”
“못 할 거 없지.”
“됐어요. 몸이 좀 허한 건 맞는데 틈만 나면 쓰러질 정도는 아니고, 신 전에서 준 약도 꼬박꼬박 먹고 있으 니까요.”
지금이야 그렇지만, 막 아이샤의 몸으로 눈을 떴을 땐 매일 약을 챙겨 먹는 것에 익숙지 않아 한 이를 걸렀 던 적이 있었다.
그때 심장 쪽에 오는 짜르르한 고통에 숨이 넘어갈 뻔하고는, 내 새로운 몸이 개복치와도 같이 쉽게 흑 가버 릴 수 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기 로 했다.
그때부터는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 고 식사도 거르지 않는 건강한 삶을 살아왔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북부에 와서부 터 거르고 있는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할까 싶었다.
나는, 예쁜 우리 아벨을 덕질하며 오래오래 살고 싶으니까.
***
성문을 지키던 전령 기사가 하데스의 집무실에 당도한 것은, 새벽이 아 주 깊었을 때였다.
해도 해도 밀려있는 일거리에 눈도 못 불이고 있던 하데스는, 기사의 전 언에 놀랐다.
“에스클리프 남작이 함께 왔다 고?!”
“예, 전하. 지금 루버몬트령에 들어왔다고 하니 성까지 도착하려 면 삼십 분 정도 걸릴 듯합니다.”
“아니, 직접을 필요까지는 없었는 데?”
혼인 문서에 도장만 찍어 보낼 줄 알았는데, 낭패였다.
미리 연락이라도 줬다면 맞을 준비를 했을 터인데, 하필 새벽에 도착한 데다가 고생스럽게도 지금 북부는 날 씨까지 안좋았다.
하늘이 뚜린 것처럼 쏟아지는 빗줄 기가 연신 창을 때려 신경까지 거슬 릴 정도였다.
“젠장, 눈이라도 좀 붙여둘 걸 그랬 군.”
무거운 눈꺼풀 위를 꾹꾹 누르며 일 어난 하데스가 기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 어떤가?”
“……예?”
“보기에 괜찮으냐는 말이야.”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쓱쓱 정리하며 하데스가 재차 묻자, 당황하던기사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뭐…… 항상 그렇둣이 잘 생기셨습니다.”
“잘생긴 거 말고.”
그건 항상 그러니까.
“퀭해 보인다거나, 피곤해 보인다 거나…… 아무튼 좀 없어 보이거나 그러지는 않나?”
“아, 예…….”
기사의 대답에도 영 만족스럽지 못 한지 하데스는 한참 머리를 정리하 고, 눈가를 쓸고 했다.
난데없이 새벽에 열린 (예비)장인 과의 독대라니.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건 아이샤 쪽인데.
결혼 승낙을 받는 것도 그저 형식적 인 절차일 뿐일 텐데.
왜 이렇게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긴장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데스의 시선이 넌지시 빗줄기 내 리치는 창밖으로 향했다.
***
하데스는 준비를 마치고 성문까지 나와 에스클리프 남작을 맞았다.
비를 막는 가리개를 씌워주고 선 하 인들과 기사 몇이 하데스의 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에스클리프 남작은 곧바로 하데스를 알아보고는 쓰고 있 던 낡은 로브를 걷고 다가왔다.
공작성의 시종들이 재빨리 가리개를 펼쳐 남작을 보필했다.
“……루버몬트 공작 전하. 처음 뵙 습니다. 벤자민 에스클리프입니다.
우선 절 받으시지요.”
크게 손을 펼쳐 인사하려는 남작을 하데스가 황급히 막아섰다.
“아니오. 이제 곧 내 장인이 될 터인데, 내가 남작에게 이리 딱딱하게 격식 지키는 인사를 받을 수야 있 나.”
“아, 저…… 전하.”
남작은 어딘가 쫓기는 사람처럼 불 안한 태도였고, 어두운 낯빛이었으나 하데스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웃으며 남작을 이끌었다.
“미리 연락을 주었더라면 먼 길 편하게 오도록 더 준비를 했을 터인데, 갑작스러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 소. 미안하군.”
“아닙니다, 전하. 연락도 없이 찾아왔으니 제가 죄송하지요.”
“아니오. 이렇게 보게 되니 반갑고 좋군.”
“저기, 전하. 아이샤는…….”
“아, 영애도 함께 데리고 나오려 했 는데…… 잠이 곤히 든 듯해 미처 깨 우질 못했소. 내일 식사를 함께 하는 걸로 하지. 오늘은 날이 늦었고, 남작 도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씻고편히 쉬도록 하시오.”
성으로 들어온 하데스는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미리 언질을 받았던지 그들은 빠릿 빠릿하게 움직였다.
공작성은 넓고 화려한 데 반해 무섭 도록 고요했다. 중앙에 있는 벽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그래서인지, 방으로 안내하려는 하 인들을 거절하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하데스의 앞에 선 남작의 목소리는, 아주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전하. 저, 사실……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송구스러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섭니다.”
밝은 곳에서 본 남작의 얼굴은 왜인 지 사색이 되어있었다.
하데스가 의아해할 틈도 없이 남작 이 말했다.
“저는, 저는…… 딸애를, 데려가려 고왔습니다.”
“……웅?”
“저는 이 결혼을 승낙할 수가 없습 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생각지도 못했던 남작의 말에, 하데스는 말문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