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벨의 말을 곱씹던 하데스의 표정 이 미묘해졌다.
그가 곧 아벨의 손에 들려 있던 손수 건을 쏙 빼앗아들었다.
“앗! 도, 돌려주세요!”
“있어봐. 잠깐 보기만 하마.”
“아, 안 돼요! 돌려주세요!”
“아니, 잠깐 보기만한다니까?”
짧은 다리로 손수건을 뺏으려 깡충 깡충 달려드는 아벨을, 하데스가 이리저리 피했다.
아벨이 갖고 있던 손수건은 자신이 식당에서 주웠던 것과 꼭 닮아 있었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의 얼굴을 수놓 은 손수건.
하데스의 시선이 슬쩍, 제 한참 아 래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아벨에게 향 했다.
손수건을 돌려달라며 빽빽거리는 아들은 친자가 아니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와 닮아 있었다.
수놓인 자수는, 확실히 아벨의 얼굴이라 해도 위화감 없었다.
“아버지이이!”
“닳는 것도 아닌데 좀 보면 어때서 그러냐?”
“때 타요! 그리고 그렇게 세게 쥐면 구겨지잖아요!”
“허……?”
아니, 아버지가 손수건 좀 들고 봤 기로서니…….
아벨에게 손수건을 돌려준 하데스 가 심통 난 얼굴로 말했다.
“아벨.”
아들은 토라졌는지 빰을 키우고 입술을 삐죽인 채 대꾸가 없었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돌려받은 손 수건을 탁탁 털어 구김살을 펴는 아벨의 모습을 보며, 하데스는 황당했다.
신선한 아들의 모습이었다.
“너 이 녀석…….”
“…….”
“뻬졌어?”
“아니요.”
“삐졌으면서 그러네.”
아벨답지 않은 모습이 썩 귀엽기도 해서, 하데스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 렸다.
그가 무릎을 굽혀 아벨과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좋으냐?”
“음……. 네.”
언제 토라졌냐는 듯 아벨은 금세 아이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데스가 모른 척 물었다.
“그거 주면서…… 다른 말은 안 했 나?”
“영애가요?”
“응.”
“음……. 제가 물어봤어요.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시냐고…….”
“그래? 그랬더니 뭐라더냐?”
아벨은 아이샤를 떠올렸다.
「전 공자님이 이런 말 할 때마다 조금 속상해요. 꼭 잘해줄 이유가 없는데 잘해주는 것 같잖아요? 공자님 은 누구라도 좋아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예요. 전 공자님이 너무 예 쁘고, 착하고, 사랑스럽고, 좋아서 잘 해주고 싶어요. 」
아벨은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하데스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예 쁨 받고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하여 처음에는 아이샤도 말뿐인 줄 로만 알았다. 어쩌면 말뿐이라도 좋 았기에 그녀에게 더 매달렸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잠들어있는 자신의 옆에서아이샤가 눈물까지 흘려줬을 때, 아벨은 그녀의 진심을 믿을 수밖에 없 었다.
그건, 어린 아벨의 가슴을 꽤 벅차 게 만들었다.
“제가…… 제가 좋아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라서, 그래서 잘해 주시는 거래요. 전 그런 말을, 아버지 한테 말고는 처음 들어봐서…….”
아벨은 금세 눈물을 글썽였다.
항상 상냥하고 다정한 아이샤가 그 런 말까지 해줬을 때, 아벨의 기분이 어땠을지 하데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울먹이는 아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하데스가 말했다.
“맞는 말 했네.”
“아뇨. 저도 알아요, 아버지. 제가 그렇게 예뻐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 아버지가 좋아서 북부까지 온 영애라면 더더욱요.”
아벨은 겨우 눈물을 참고 말을 이었다.
아이는 아주 어렸지만, 모르는 게 없었다.
제 존재가 친모도 모르는 하데스의 사생아로 알려져 있고, 그런 하데스를 좋아하는 아이샤에게 자신이 얼마 나 아니꼬워 보일지.
하데스 또한 그것을 알기에 쉽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버지 말고는…… 저를 이렇게 예뻐해 준 사람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고맙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가 아니었으면 영애가 여기 올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그래, 그렇지.”
“만약에 왔다고 하더라도 저를 좋 아해주기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영애는 저까지 좋아해 주시는…… 아주, 아주 착한 분이에요. 천사일지도 몰라요…….”
진지하게 말하는 아벨의 모습이 귀 엽다는 듯 하데스가 픽 웃음 지었다.
“그러니까아버지.”
눈에 고인 눈물을 쓱 훔쳐낸 아벨이 하데스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영애는 아버지를 좋아하니까요, 꼭, 꼭 영애께 아버지가 잘해주셔야 해요. 저에게보다 더 잘해주셔도 괜 찮아요. 절대, 절대로 서운해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영애에게 잘해주세요. 꼬옥…….”
“못 도망가게?”
하데스가 픽 웃으며 묻자 아벨이 난 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그렇게 말한 건 아닌 데…….”
“알았다. 일단은.”
아벨의 머리를 다정하게 한번 푹 누 른 하데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벨의 얼굴이 수놓아진 손수건과 아이샤를 생각했다.
아벨의 말대로다.
아이샤는 아벨에게 진심이다. 그게 어떤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거짓 행동이 아니라는 건, 아벨과 함께 있는 아이샤를 십 분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을 테다.
하데스는 정말이지, 아이샤 같은 여 자가 존재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 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이샤는 나를 좋아하니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 신경을 안 썼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자신은 공작이라는 알량한 작위 빼고는 결코 매력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사생아인 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도 신경 쓰일 텐데, 작위는 무조건 그 아들에게 주겠노라 못까지 박았다.
만약 자신이 아이샤였다면 진작 도 망가고도 남았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대체 얼마나 나를 좋아하면, 아벨에게까지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줄 수 있는 거지?
고마운 것과는 별개로 하데스의 마음에는 다시 부채감이 차올랐다. 동 시에, 부끄러움도.
‘난 얼굴 한 번 안 본 후원자의 존재가 불쾌하다는 티나 내고.’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아이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다 른 여자와 조심성 없이 일을 치러 사 생아까지 본 사내나 다름없을 텐데.
하데스가 복잡해지는 이마를 짚곤 끙, 하고 못마땅한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샤에게 잔뜩 불만을 티 내며 징 징거렸던 제 모습이 떠올라 못내 수 치스러웠다.
심지어 지금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가 후원자와 연락을 끊으라고 말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빚지는 기분이 드는 쪽은 자신이다.
이 부채감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할 듯싶었다.
***
공작성을 나가 대충 일을 마쳤을 때쯤에는, 안 그래도 구리구리하던 하 늘에서 몇 방울씩 비가 떨어졌다.
함께 나갔던 앤이 내 방 앞에서 말 했다.
“아가씨, 찝찝하시죠? 목욕물 준비해서 가져갈게요.”
“너도 많이 맞았잖아. 난 괜찮으니 까 너부터 씻고 천천히 해. 아, 아니다. 오랜만에 같이 씻을까?”
“큭큭……. 그럴까요? 물 데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들어가 계세요.”
“좋아!”
별 문제없이 80억 노르트를 융통하는 데 성공한지라 나와 앤의 기분 은 최고조였다.
비를 좀 맞았지만 그마저도 전혀 찝찝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걸음으로 방문을 열었을 땐 벽등이 있는 복도와 달리 사방이 깜 깜했다. 천둥번개 치고 구름 낀 날씨 라 달도 없어 더 그랬다.
‘뭐 이렇게 한 치 앞이 안 보여.’
어두운 시야에 적응하기 위해 눈에 힘을 줘 가면서, 한 발자국씩 침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던.
그때였다.
‘……뭐지?’
아무도 없어야 할 내 방.
그러나 그 어둠 속에 숨어있는 어떤 낯선 기척을 육감으로 느꼈을 때.
번쩍, 번개가 한 번 치며 시야가 밝 아졌다.
우르릉.
쾅!
“오마낫!!!”
테이블 앞에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누군가의 얼굴 위로 번개 빛이 내리 비치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건, 하데스였다.
“뭐, 뭐, 뭐, 뭐예요! 사, 사람 노, 놀라게…….”
B급 공포영화 속 한 장면처럼 사람을 놀라게 한 그는 다시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가, 곧 다시 드러났다.
갑자기 밝아진다 싶었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촛대 위로 불이 붙어 있었다.
성냥도 없는데 어떻게 초를 켰나 생 각하다가, 곧 그가 화기의 이능을 자 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자임을 떠올리 곤 가슴을 쓸어내 렸다.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내가 물 었다.
“대, 대체 뭐예요, 전하?”
하데스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또 불만 이 있는 얼굴이었다.
“전하?”
“어디 갔다 왔지?”
“어디 갔다 오긴요. 지참금을 준비하겠다고 했잖아요. 자작님께 연락드 리고 왔죠.”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았 나?”
“제가 빚지기 싫다고 하지 않았던 가요?”
고집 부리는 하데스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가 지참금으로 융통하려 고 하는 다이아몬드 광산은, 아벨을 위해 구매해둔 게 아닌가. 그걸 나와의 결혼을 위해 미련 없이 털어내겠 다니…….
이거 누가 보면 완전 참사랑 아니 냐?
아니, 진정하자. 자의식 과잉 환자 옆에서 지내다 보니 나도 옮으려는 모양이다.
“이야기 좀 하지.”
착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그 익숙 한 포즈로, 하데스는 거만하게 제 맞 은편 의자를 턱짓했다.
쭈뼛쭈뻇 다가간 내가 자리에 앉자 마자 하데스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 내 테이블 위로 휙 던졌다.
뭔가 하고 보니…….
‘손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