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제가요? 제가 누구랑요? 덕이랑이요?”
하데스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직시했다.
꽤 불만인 것처럼 보이는 하데스의심이리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저 표정, 저 대사.
아무래도 내가 더글라스와 각별한 사이로 보이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인데…….
음, 서로의 이익을 위해 교류하는 사이라고 해도 하데스로서는 불쾌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까.
그런데 역시, 그의 의심에 헛웃음이 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와 더글라스 후라네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전혀 상상되지 않기 때 문이었다.
그와 내가 아주 친밀한 가족 같은 느낌이라서?
아니면, 이성 관계로 발전할 여지라 곤 없는 여사친과 남사친 같은 사이 라서?
그것보다는…….
‘내가 덕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 면…… 나는 나와 연애한다?! 뭐 이런 건가?’
실토하자면, 더글라스 후라네는 곧 아이샤 에스클리프요, 아이샤 에스클리프는 곧 더글라스 후라네였다.
이 제국에서 세상물정 모를 18살의 시골 출신 귀족 영애가 무난하게 재 산을 불리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하여 내가 돈놀이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준비했던 것은 적당한 차명 신 분을 만드는 일이었다.
아무렴, 작가님의 작명 센스가 바닥을 친다 하더라도, 더글라스 후라네 따위로 이름을 막 지을 일 있겠는가?
더글라스 후라네.
애칭은 덕. 조금 더 서양식으로 발 음을 굴리면 더그…… 정도가 될까? 아무튼, 붙여서 덕후라네.
그것은, 내가명이었다.
어린 귀족 영애가 아니라, 제국의 각종 사업 판에서 잔뼈 굵은 거부들을 수월하게 상대하고자 만든 제2의 신분 말이다.
사실 더글라스 후라네는 서류상으 로만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없었다.
대부분의 계약은 서면으로 논의. 불 가피하게 대면해야 할 경우에는 대리 인을 구해 세웠는데, 제국 사업가들 은 그런 식으로 계약을 논의하는 경 우가 흔했기에 의심 살 것도 없었다.
어린 귀족 영애가 그 배후라는 걸 아는 순간, 배짱 좋게 계약조건을 후려치려는 치들이나 호시탐탐 뒤통수 칠 궁리하는 사기꾼들이 뒤꽁무니에 진딧물처럼 달라붙을 건 자명한 사실.
남작 영애 ‘아이샤 에스클리프’로서 사업 판에 뛰어드는 것이 위법은 아니었으나, 구태여 결과가 뻔히 보이는 모험을 하지 않겠다 결심한 이유 가 그것이었다.
아무튼 그런고로, 나는 하데스의 의심이 귀엽게 느껴지는 바람에 참지 못하고 풉,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어?”
“아, 아니…….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지는 알겠는데, 후라네 자작님과 저는 그저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 일뿐이에요.”
“세상에 어떤 후원자가 80억 노르트나 되는 돈을 선뜻 내놓지? 그건 후원 수준을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는 데?”
하데스는 추궁하듯이 계속 물었다.
“게다가 그대의 표정이나 말하는 걸 보니, 그 후원자라면 거절 없이 무 조건 그 거액을 내어줄 거라고 거의 확신하는 듯 보여.”
그의 탐정 빰치는 예리한 추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당연하지. 거절하고 말고 할 게 뭐 있겠는가? 내 돈인데.
사실을 털어놓을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속으로 고개 저었다. 안 될 말이다.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 차명 신분으 로 거래한 것부터 제국법에 아주 조금 저촉되는 부분이 있었으므로, 진 실은 끝까지 묻어둬야만 했다.
우리 가문에도 적당한 금액을 후원하는 척하면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상당히 노력해왔던 나다.
‘으음…….’
돈은 융통해야 하고, 그러려면 더글라스를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한 데에 핀트가 꽂혀버린 하데스 때문에 나는 조금 난처해지고 말았다.
뭐, 이럴 때는 대충 얼버무리고 튀는 게 상책이지.
“전하. 지금 절 의심하시는 거예요? 이미 전하께서 오해하고 의심하기로 마음먹으셨다면 제가 더 말해 봐야 뭐 하겠나요.”
불쌍한 척 몸을 축 늘어뜨리며 말하 자, 예상대로 하데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덧붙였다.
“아직 서로 믿을 만큼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분명 아니라고 했는데도 이렇게 자꾸 추궁하시 다니 조금 서운하네요.”
은근히 마음 약한 공작 전하의 죄책 감을 자극하려니 내 양심이 약간의 통증을 호소했지만.
“에휴…….”
무시하고, 한숨까지 완벽하게 마무 리.
예상했던 대로, 난처해하던 하데스는 곧바로 제 말을 정정했다.
“아니야. 나는 그대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 후원자를 의심하는 거야. 혹시나 그자에게 불순한 의도가 없다 고 확신할 수 있나?”
“그건 걱정하지마세요. 제가 바보 도 아니고 그런 거 하나 못 알아보겠 어요? 아무튼 지참금 문제는 여기까 지만 얘기하면 안 될까요? 80억 노르트 정도는 제가 충분히 융통할 수있는 돈이니까 걱정 마시고요.”
“됐어. 괜히 그자에게 연락해서 아 쉬운 소리 할 필요 없어. 내가 지참금을 준비할 테니…….”
“전하.”
그의 말을 자르고, 나는 생각했다.
80억 노르트는 아주 큰 돈이다. 약 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생으로 따져 봤을 때 80억 원 정도와 동일한 가치이고, 그건 이제국에서 적당히 부유 한 영지를 한 서너 개쯤 처분해야 나 오는 액수다.
아무리 루버몬트 공작가가 부유하다고 한들 80억 노르트를 한 번에 융 통해낼 도리는 없다.
하데스는 아마도 후에 아벨에게 물 려주려 익명으로 계약해 두었던 중부 펠로체령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팔아 치우려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 그 광 산 시세가 약 100억 노르트 정도 되 니까.
그걸 지금 팔아치우면 아주 큰 문제 가 된다.
바쁜 와중에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 겠지만, 핵심만 짚고 넘어가자면 그 다이아몬드 광산은 아벨과 데보라가 만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장 치였다.
돈이라면 나에게 넘쳐나는데, 굳이 그걸 팔아 원활한 로맨스 진행에 찬 물을 끼얹을 필요 있겠는가?
나는 아벨에게 폐 끼칠 일은 손톱만 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은 둘이 하는 거니까 준비도 둘이 같이 해야죠. 전하가 이것저것 다 해주시려고 하는 건 감사하지만, 받기만 하면 전 빚지는 기분에 마음 이 무거울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정도는 제가 하게 해주세요. 아셨죠?”
“아이샤!”
나는 대화가 길어지는 걸 막기 위해 급히 일어났다.
내 뒤로 당황한 하데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서.
북부 쪽에 있는 수십 개의 부동산과 각종 상단, 교역권 같은 것들을 얼른 머릿속에 떠올렸다. 무엇을 적당히 처분할지 고민해봐야 했다.
서두르자. 80억 노르트를 준비하려 면, 할 일이 많았다.
***
아이샤가 도망치듯 돌아간 뒤, 하데스는 그녀를 잡는 대신 조금 불쾌한 상상에 아주 오래도록 잠겨 있었다.
「덕에게 부탁하면 될 거예요. 」
마치 아주 친근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처럼 익숙한 표정으로, 아이샤는 덕, 하며 제 후원자를 애칭으로 불렀다.
왜인지 하데스는 심기가 뒤틀렸다. 안중에도 없었던 에스클리프 남작가의 후원자가 이렇게 신경 쓰일 거라 고는 생각 못했다.
더글라스 후라네 자작.
그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부분이다.
영지가 없는 몰락 귀족이 평민 거부 들에게 작위를 파는 일은 퍽 흔했고,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귀족의 성을 얻 은 더글라스 후라네 또한 그런 경우였다.
돈 많은 귀족들이 특정 가문이나 개 인을 후원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 중에는, 알량한 후원금 몇 푼으로 피후원자를 불순한 마음으로 휘두르려는 경우가 꽤 많았다.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보여줄 사람이 없다는 걸, 왜 모르지?’
아이샤는 후라네 자작이 그런 사람 이 아니라고 했지만, 하데스는 믿을 수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유 없이 3년 내 내 거액의 후원을 해올 리 없다.
분명 아이샤에게 흑심을 품었을 테 고, 나아가서는 그녀와 연인으로 발 전한다든가 결혼으로 맺어지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쾽!
순간 욱한 하데스는 책상 위로 주먹을 거칠게 내질렀다.
‘80억 노르트를 단숨에 융통할 수 있는 재력가였다고?’
개개인의 재산 보유 현황까지 조사해낼 재주는 없었기에, 그저 돈 좀 굴 리는 데 성공해 귀족 작위를 산 평민 출신 사내쯤으로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부자야?!’
아이샤가 자신을 좋아하고, 결혼 약속까지 한 상황이다. 그 음흉한 녀석에게도 생각이 있다면 더 수작을 부 리지는 않겠지만, 하데스는 어째서인 지 기분이 나빠 견딜 수 없었다.
아니다. 어째서인지……라니?
기분 나쁠 이유는 확실하지 않은가. 외간남자의 돈으로 지참금을 마련하는 상황인데.
「받기만 하면 전 빚지는 기분에 마음이 무거울 거예요. 」
아이샤가 그렇게까지 말했기에 일 단은 두었지만, 역시 안 될 말이었다. 어떻게든 80억 노르트의 지참금은 자신이 해결할 것이었다.
하데스는 오랜만에 의지를 불태우 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방법이 떠올 랐으니 당장 아이샤에게로 가야 했다.
받기만 하는 게 미안하다며 그녀가 계속 거절 의사를 밝힌다면?
명분을 만들어 억지로 안겨주면 된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대귀족인 루버몬트에서 공작부인을 맞는 일인데, 결혼 선물은 스케일이 남달라야지 않 겠는가.
‘가져! 다이아몬드 광산!’
왜인지 전쟁터에 나갈 때보다 더 전 의가 불타오르는 걸 느끼며, 하데스는 아이샤의 방을 향해 거의 달리듯 걸었다.
제게로 오고 있던 듯한 아벨을 만난 건, 아이샤의 방까지 절반쯤 왔을 때였다.
“어? 아버지, 어디 가세요? 저 안 그래도 아버지께 가려고 했었는 데…….”
“어, 아빠 지금 바쁘다. 할 말 있으 면 나중에.”
아벨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 게 먼저였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데 아벨의 의아한 목소리가 발을 잡았다.
“혹시 에스클리프 영애에게 가세 요? 지금 성에 안 계실 텐데.”
“뭐?!”
하데스가 화들짝 놀라며 지나쳤던 아벨을 돌아봤다.
“어디 갔는데?”
“그건 모르겠어요. 외출 준비를 하 시고 제 방에 잠시 오셨거든요. 나갔 다 올 데가 있다고 하셨어요.”
왜인지 다급해 보이는 하데스에, 아벨은 의아해하며 아이샤의 행적을 알 렸다.
하데스가 낭패라는 듯 주먹 쥔 손을 허공으로 하릴없이 내질 렀다.
그녀는 80억 노르트의 후원을 받기 위해 더글라스 후라네를 찾아간 것이 분명했다.
“젠장, 나도 나갔다 와야겠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지체 없이 아이샤의 뒤를 쫓으려 급 히 방향을 틀던 하데스가, 순간 아벨을 보고 멈칫했다.
정확히는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아벨이 손에 소중히 들고 있는 한 장의 손수건에.
“너…… 그거 어디서 난 거냐? 내 것 같은데…….”
“네? 이거요?”
검은 머리, 붉은 눈의 제 모습이 귀 엽게 수놓인 손수건.
아무리 봐도 제 방 서랍에 있는, 아이샤가 손수 자수 놓은 그것이 맞아 보이는데…….
의아해하고 있는 하데스를 향해, 아벨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거…… 영애가 외출하시기 전에 제 방에 들러서 선물이라고 주고 가신 거예요. 직접 수놓으신 거래요.”
아벨은 아이샤를 떠올리는지 수줍 게 웃고는 덧불였다.
“안 그래도 아버지께 자랑하려고 가던 길이었어요. 영애께서 이거 만 드느라 엄청 고생하신 것 같아서…… 감동이었어요. 원래 만들고 계시던 걸 잃어버리셔서 새로만드느라 혼나 셨다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