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뭐라고?”
놀란 하데스의 표정에 메이슨이 비 죽 입술을 기울이며 웃었다.
그를 바라보는 하데스의 눈이 가늘 어졌다. 역시, 조용히 넘어갈 늙은이 가 아니 었다.
“장난하나?”
“예? 저희는 지극히 진지하게 임하 고 있습니다만.”
빙긋 웃는 메이슨을 보며 하데스가 바득 이를 갈았다.
라즐리 백작과 가렌 백작도 이 사안에 동의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대답을 요구하는 하데스의 시선을 피하며 침묵했다.
사실 말은 안 해도, 두 가신 또한 아벨의 일로 하데스에게 내심 실망하고 있었다. 루버몬트에 진심으로 헌신하는 이들이라 더 그랬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하데스는 욱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에스클리프의 사정을 알 만한 이 들이 80억 노르트나 지참금으로 요 구했다는 건, 이 결혼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보면 되는 건가?”
“전하? 저희는 전하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하께서 어 떤 가문과 연을 맺고 싶어 하시든 그 저 따를 뿐입니다. 다만 대 루버몬트 공작 가문의 혼인은 제국의 모든 이 목이 집중되는 대사(大事)가 아니겠 습니까?”
메이슨은 조곤조곤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상대 가문이 과연 루버몬트와 격 이 맞는지에 세간의 관심이 쏠릴 터인데, 비등한 입지를 가진 권력 가문 이 아니라면 재력으로라도 루버몬트에 버금갈 수 있음을 보여줘야 마땅 하지 않을는지요? 두 가문의 화합에 자그마한 명분이라도 있어야지 않겠 습니까?”
술술 말하는 메이슨은 한 대 때려주 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사실 저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데스 또한 그들이 아이샤와의 결혼을 무조건 반대하고 나서지 않는 이상,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고 자 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샤를 위 해서였다.
안 그래도 가문의 힘이 미약한 그녀는, 막무가내로 결혼을 진행시킨다면 가신들은 물론 귀족령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루버몬트 혈족들에게도 업신여겨질 확률이 다분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적당히 타협할 수 있다면, 가신들의 요구에 응한 뒤 뒷 말이 나올 수 없도록 아이샤의 위치를 공고히 해두는 편이 나았다.
“에스클리프는 그만한 여유가 없는 모양입 니다, 전하?”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메이슨은 고 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하데스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고 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기둥뿌리를 뽑아야 할 수준이긴 하겠지만, 80억 노르트 정도라면 에스클리프에서 어찌어찌 충당할 수도 있겠지. 알겠소. 내 그대들의 요구 사 항을 에스클리프에 전하도록 하지.”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하데스가 혼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슨이 당 황했다.
에스클리프가 아무리 쥐어 짜 봐야 기름 한 방울 안 나올 가난한 영지라는 걸 뻔히 아는데, 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 하데스가 이리 태연한지 모를 일이었다.
옆에 있던 두 백작도 당황한 건 마 찬가지였다.
하데스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 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지참금 80억 노르트를 에스클리프에서 준비하는 걸로 이 결혼에 대한 논의는 끝이오. 추후 뒷말이 나 온다거나, 거액의 지참금까지 들여가 며 이 공작성으로 올 내 부인이 그만 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긴 다면.”
하데스는 한마디 덧붙이고는, 제 집무실을 바람같이 빠져나갔다.
“책임은 그대들이 지는 거요.”
***
결혼 문제를 논하는 가신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하데스가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표정을 보니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예상 못 했던 건 아니라, 나는 별 감 흥 없이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내게 자리를 권한 하데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 고 한참 침묵했다.
느리게 콧대를 문지르는 손이 피곤 해 보였다.
뭐랄까, 마치 자소서 쓰면서 일주일 밤낮 꼬박 새웠던 전생의 나를 보는 기분이 랄까. 조금 안쓰러 웠다.
“전하.”
“응.”
“역시 결혼은 안 된대요?”
하데스가 눈을 가린 손을 내리곤 확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럼 뭔데요?”
“후……. 있어봐.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 중이니까.”
뭔가 문제가 있기는 했던 모양인데.
아니, 이렇게 사람 앉혀두고 혼자 고민할 거면 왜 벌써 불렀담. 고민 끝나 면 부를 것이지.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한참 침묵하는 하데스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 른 생각이 있어 물었다.
“전하.”
“왜.”
“발 괜찮아요?”
“발?”
하데스는 눈을 뜨고 의아한 표정으 로 되물었다.
“발바닥이요.”
“발바닥이 갑자기 왜?”
“공자님 상처 낫게 해준 거 말이에요. 그거 핵석의 이능을 사용하신 거 아니었어요? 상처를 대신 흡수하는 능력 말이에요.”
내가 묻자, 하데스가 조금 놀란 표 정을 지었다.
“그런 것도 알아?”
이건 무슨 무시람.
내가 사실은 이 세계의 모든 원리에 대해 거의 신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 하데스 가 얼마나 놀라워할지 그 얼굴 표정이 궁금했다.
나는 조금 토라진 티를 내며 말했다.
“왜 바보 취급해요?”
“아니, 핵석을 숨기지도 못하고 마력이라곤 쥐뿔도 없는데 그런 이능이 있다는 걸 아니까 놀라워서 그러지. 그대를 바보 취급한 건 아냐? 그대만 큼 똑똑하고 연기도 잘하는 여자가 어디 있다고?”
아, 연기 아니라니까 그러네.
또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그냥 넘어 가기로 하고.
“그냥 상식으로 아는 거죠.”
“흐음…….”
왜인지 하데스는 피식 웃으며 즐거 워하는 표정이 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는 모르겠 지만, 다음에 나올 대사가 또 자의식 충만한 발언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래서, 상처를 고스란히 가져갔 으면? 아벨에게 했던 것처럼 약 바르 고 붕대라도 감아주겠다 하려고?”
역시.
“마음은 고맙지만 아쉽게 됐군. 고 통이 같은 수준으로 전이되는 건 맞지만, 외상(外傷)을 홉수한다고 해서 그 상처가 똑같이 새겨지는 건 아니 야. 조금 잘못된 상식이었어.”
“아하…….”
정화 능력이 없는 속성의 등장인물 이 외상을 홉수하는 장면은 나온 적이 없었기에, 미처 몰랐던 부분이었다.
백속성도 아니면서 흅수의 이능을 사용한 건, 내가 아는 소설 내용 중에 서는 하데스가 유일했다.
물론 그가 흡수한 아벨의 상처는 내 상(內傷)과 정신 붕괴였기에, 외상이 어떤 식으로 전이되는지는 알 턱이 없었고.
아무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흥미 로웠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픽 웃었다.
“궁금하면 곧바로 물어보지 그랬 나. 걱정되어서 잠은 제대로 잤나 모 르겠군.”
하아…….
나는 깊이 한숨 쉬며 얼굴 위로 두 어 번 마른세수 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가신들이 뭐라고 했는지나 좀 알 려주세요. 혼자보다는 둘이 같이 고 민하면 좋잖아요.”
“막대한 지참금을 요구했어. 이 결혼에 토를 달지 않는 조건으로.”
“어머! 정말요?”
나는 하데스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내용이 만족스러웠다.
가신들은 어떻게든 우리의 결혼을 방해하려고 할 터였다.
에스클리프야 시골 촌구석에 처박 힌 가난으로는 제일가는 영지이니, 당연히 요구하는 지참금을 지불할 수없을 거라 생각하고 그런 조건을 내 밀었을 테고.
그러나 그들은 아주 잘못 생각했다.
‘후후…….’
이곳 크레센타에서 아이샤 에스클리프로 눈을뜬 지 3년.
덕질하는 마음이야 3년 내내 한결 같았으나 본격적으로 아벨을 따라다 니기 시작한 건 1년 전부터였다.
그럼 여기서 문제.
막 눈을 뜬 내가 2년 동안 준비한 것은?
덕질하는 데 꼭 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있다면 무엇보다 큰 도움 이 될 만한 요소.
그것은 바로…….
재력!
전생에서 내가 악착같이 공부해 취 직하고 돈을 벌었던 건 전부 원활한 덕질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아벨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준의 조 공품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재력을 보유할 필요성을 느꼈고,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2년 만에 만족스러운 성과를 손에 넣었다.
나는, 지금 내가 보유한 재산이 이제국을 쌈 싸먹고도 남을 수 있다는 데 하데스의 멀쩡한 발바닥을 걸 수도 있었다.
“지참금을 얼마 요구했는데요?”
“80억 노르트. 그렇지만 그대가 걱 정할 필요 없어. 가신들이 모르는 내 재산을 융통할 거니까. 문제는 에스클리프에서 보낸 것으로 하려면 문서를 위조해야 한다는 건데…….”
“그거면 돼요?”
껌이네.
어째선지 활짝 웃는 내 얼굴에 하데스가 의아해했다.
“그거 면 되냐니?”
“걱정하지마세요. 그 정도는 낼 수 있어요.”
아벨의 엄마 자리를 위해서 내가 뭔 들 못 하겠나?
하데스는 태연한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인지 미간을 좁히며 물어왔다.
“그대가…… 그 돈을 어디서 융통해?”
물론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고변명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내 뒷조 사를 한 하데스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을 터였다.
“덕에게 부탁하면 될 거예요. 그러 니까 전하는 아무런 걱정 마세요.”
“……덕?”
“저번에 알고 계신다고 하지 않으 셨어요? 제 가문을 후원해주시는 후라네 자작 말이에요.”
“아, 더글라스 후라네 자작.”
하데스는 기억났다는 둣 탄성을 터 뜨렸다가, 왜인지 곧 불쾌한 표정으 로 잠시 침묵했다.
반응이 이상해 눈치를 보던 내가 뭐 문제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애칭으로까지 부르고…….”
애칭이라니?
설마, 덕(Dug)?
“……꽤 각별한 사이인가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