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악!”
놀란 나는 버럭 소리 지르며 잽싸게 몸을 물렸다.
하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 어막았다.
“뭘 또 놀란 척이야?”
“노, 놀란 척이 아니라 진짜 놀랐어요! 이게 뭐예욧!”
적나라하게 벌어진 침의의 앞섶을 닫으며 일어나 앉은 하데스가 황당하 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두 팔을 들어 가슴을 가린 나를 말없이 한참 바라보다 가 말했다.
“……. 가 보면 내가 달려든 줄 알 겠는데?”
“그, 그럼…….”
내가?
“그대는 제도에 가서 배우를 해도 되겠어.”
“……네?”
갑자기 뭐라는 건지 의아해하는 내게 하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잠에서 못 깨어나는 척하는 연기 가 일품이더라고.”
“뭐, 뭐라는 거예요? 저 방금 일어난 거 맞거든요?”
“그래, 그렇겠지…….”
분명 긍정의 대답을 하면서도 하데스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졸지에 깨어났으면서도 여전히 잠 든 척하며 하데스의 품을 탐낸 요망한 여자가 되어버리고 만 나는 황당 했다.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 존재하신다 면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 이까. 당신은 정말로 하데스의 자의 식 과잉을 치료해줄 생각 따윈 없으 신 건가요.
“전하, 이건 진짜 오해를 바로잡아 야겠는데…….”
그는 어디 한번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아보라는 듯, 착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가 잠버릇이 심한 편이 전혀 아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잘 모르 겠네요. 꿈을 꿨는데 잠시 착각하 고…….”
“아하.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못 하 고 달려들었다?”
“거, 달려들었다는 표현은 좀……. 저도 뭐 알고 그랬던 건 아니니까…….”
“그래서 아벨이 나가자마자 기다렸 다는 듯이 안겨들어?”
“맞다! 공자님! 대체 어디로 간 거 예요?!”
그때 타이밍 좋게 방문이 열렸다.
언제 나갔는지도 모를 아벨이 제 몸 만한 물주전자를 들고 뒤뚱뒤뚱 걸 어 들어왔다.
아벨은 일어나 있는 우리를 보고 방 긋 웃으며 인사했다.
“일어나셨어요? 목이 마르실까 봐 물을 가져왔어요.”
아벨은 짧은 다리로 총총총 걸어와 협탁에 물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아니, 그런 건 하녀를 시켜, 아벨…….
하데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살짝 미간을 좁힌 얼굴로 침대 맡의 설렁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벨, 저건 장식용인 줄 아는 거 냐? 목이 마르면 하인들을 부르면 될 것이지, 왜 네가 나가?”
아벨은 침대 위로 포르르 올라와 나 와 하데스 사이에 자리 잡으며 대답했다.
“제가 직접 가져다드리고 싶어서요.”
“윽.”
곧바로 나오는 아벨의 귀여운 대답에 나는 또 참지 못하고 심장을 부여잡았다.
하데스는 저 미친 여자가 또 왜 저 러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공자님이 나가시려 할 때 전하께 서 말리면 됐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민망한 상황도 없었을 거 아니냐고.
“나도 자고 있었어. 누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가슴팍까지 파헤쳐 열고 안겨들어 깬 거지.”
대수롭잖게 대답하는 하데스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일단 그의 표정으 로 봐서 거짓은 아닌 듯했다.
아, 제발…….
대체 왜 그랬던 거니, 비몽사몽간의 나야?
“일단…… 죄송합니다, 전하. 의도 치 않게 불쾌하게 해드리고 말았네요.”
“불쾌하진 않았어. 뭐, 그대가 이렇 게 굴 걸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 고…….”
“뭐요?”
“아무튼 난 가신들을 맞을 채비를 해야 하니 먼저 나가봐야겠군. 일정 이 바쁘지 않으면 그대를 깨우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안타깝겠지만 다 음을 기약해.”
그렇게 말하고, 하데스는 내게 더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홀연히 아벨의 방을 나섰다.
금세 닫힌 문을, 나는 한참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는 뭐, 오해고 자시고 풀 의욕도 사라지고 말았다.
***
아벨의 방에서 나온 하데스는 벽에 등을 불이고 선 채 크게 한번 심호홈했다. 그는 태연한 척하느라 혼났다.
“후, 하…….”
아벨이 조용히 나간 건 하데스도 정말 몰랐다. 세상모르고 편히 잠든 건 퍽 오랜만이었으므로.
몽롱한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깨운 건 난데없는 온기.
아벨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언제 왔는지 모를 아이샤가 제 옷을 활짝 까발리고 품에 얼굴을 묻고 있 었다.
같이 있고 싶었던 모양인지 아벨까 지 시켜 자길 방으로 부른 그녀가, 물론 조용히 잠만 잘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니, 저 여자는, 부끄럽지도 않은 가?’
……설마 대담하게 옷을 벗기고 껴안기까지 할 줄이야.
당황한 마음에 품에 안긴 작은 머리 통을 밀어도 보고 이름도 두 번이나 불러봤는데, 그녀는 그럴수록 더 보 란듯 안겨들었다.
맨가슴 위로 바짝 붙인 얼굴을 비비 적대기까지 하자 하데스는 아주 약간 위험한 상태가 됐다.
색색거리는 더운 숨이 피부 위에 닿는 느낌은 혈기왕성한 스물일곱 사내의 몸을 난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했는데 깨어나 지 않을 린 없고, 분명 곤히 잠든 척 일부러 자길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결국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정도가 되어 하는 수 없이 아이샤를 힘으로 밀어내려 했을 때.
‘뭐야, 그건.’
하데스는 쿵,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환청을들었다.
그 소리는 제 가슴에서 난 것도 같 았고, 머릿속에서 난 것도 같았다. 정 확히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번쩍 고개를 쳐든 아이샤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했던, 바로 그 순 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길 올려다보던 아이샤의 얼굴…….
하데스는 손을 들어 제 양쪽 뺨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 저었다.
“후! 하!”
덧불여 심호흡 몇 번에, 팔을 털며제자리 뛰기도 했다.
‘젠장.’
그래도 여전히 몸은 뜨거웠고, 아이샤의 얼굴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털어 지지 않았다.
***
쿵.
하데스는 이 소리가 심장 부근에서 부터 들리는 거라는 데에 아이샤가 저를 주려고 만들었던 손수건도 걸수 있었다.
쿵.
잊을 만하면 들리는 이 소리는, 생 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 아이샤의 얼굴이 그려질 때 마다 들려왔다.
쿵.
‘아, 젠장.’
“……전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하데스는 겨우 상념에서 건져내졌다.
“어, 어…….”
의아한 표정을 한 가스펠 백작, 메 이슨이 보였다.
그의 양옆으로는 중년의 두 백작이 앉아있었다.
지금 모인 세 귀족들은 공작의 혼인을 논의하러 온 루버몬트의 가신들 로, 하데스가 영주가 된 이후 수족들을 엄선하는 과정에서 최측근으로 자리매김한 이들이었다.
하데스는 즉위 이후 수 개의 가신 가문들을 쳐냈고 또 새로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메이슨의 옆에 앉아있는 데인 라즐리 백작과 로마르디오 가렌 백작은 하데스가 남겨놓은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측근들이 었다.
애거사의 시가라 매번 하는 수 없이 타협하고 마는 가스펠과는 달리 라즐리와 가렌은 하데스가 자주 성으로 불러 루버몬트의 정시(政事)롤 논하 고는 했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그답지 않게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가신들은 의아해했다.
하데스는 멋쩍게 헛기침하며 덧붙였다.
“생각할게 좀 있어서…….”
……는 개뿔이.
하데스는 크게 한 번 고개를 털어냈다. 중요한 자리에서 한가로이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좀 이상 하게 생각되었다.
“저희는 전하의 결정에 따를 뿐입 니다. 에스클리프에서 답신이 오는 대로 성심성의껏 루버몬트의 주인이 신 공작 전하의 혼인 준비에 힘을 보 태겠습니다.”
“……뭐?”
메이슨의 말에 하데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사실 가신 회의에서는 언성이 높아 질 줄 알았다. 아이샤를 아니꼬워하는 메이슨이 호락호락하게 이 결혼을 승낙할 리 없었기에.
그렇기에, 하데스는 가신들의 의견을 일부 묵살하더라도 결혼을 진행시 킬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벨을 후계자로 세우기로 결심한 시점부터 가신들이 원하는 루버몬트의 ‘격’에 맞는 결혼은 불가능 했다.
한데…… 이렇게 아무 마찰 없이 가신들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고?
하데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대들의 의견은 잘 알겠소. 불필요한 언쟁을 할 필요 없 어 마음이 좋군. 그러면 에스클리프에서 답이 오는 대로…….”
“감사드립니다, 전하. 저희들이 제 시했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에스클리프에는 있는 것이겠 지요?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메이슨은 갑자기 하데스의 말을 자 르고 끼어들었다.
요구 사항?
다른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했다. 멋쩍은 표정으로 하데스가 되물었다.
“요구 사항이…… 뭐라고 했더라?”
“대공작가와의 결속입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에스클리프에서는 루버몬트와 격이 맞음을 증명해야 함이 온당하지요.”
“그래서?”
“이 혼인의 대가로 에스클리프 가 문은, 지참금 80억 노르트 정도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