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뭐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아버님.
뭐지? 하데스가 이 시간에, 누가 봐 도 여기서 잘 것 같은 차림새로 온 이유가…….
우리는 멀리서 서로를 마주 보며 잠 시 생각하다가, 동시에 아벨을 바라봤다.
귀여운 장난꾸러기는 꼭 천사처럼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의 웃는 표정은 매우 귀여웠으나 어째서인지 냄새가 폴폴 풍겼다.
무슨 냄새? 계략남의 냄새.
「그래도 오늘은……」
「오늘은? 」
「아! 아니예요. 헤헤」
나는 아벨이 무슨 앙큼한 장난을 저 질렀는지 바로 깨달았다.
같이 자자는 소원을 나한테만 말한게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사랑이라곤 못 받고 자랐던 아벨이 아버지와 (예비)어머니를 양옆에 끼고 잠들고 싶은 마음 이야 이해하지만…….
‘일단 나랑 하데스는 아직 그런 부 부놀이를 하기엔 너무 많이 어색하다 고!’
한참 당황하고 있는 나를 마찬가지 로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데스도,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며 예의 그 자의 식 가득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어쩐지…… 한 번도 이런 말 한 적 없는 녀석인데, 갑자기 같이 자자고 해서 뭔가 싶었지.”
그래,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데스는 피곤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덧붙였다.
“같이 있고 싶으면 그냥 직접 말하 면 될걸, 뭘 애한테까지…….”
“아닙니다, 전하.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아…….
이 억울함을 어찌하면 좋나? 정말 자수하고 광명 찾을까?
누군가 이 상황이 활자로 쓰인 소설 책을 읽고 있다면 대단한 고구마 구간이라고 여길 게 분명했다.
날로 높아지는 하데스의 자의식 과 잉이 심히 걱정스러웠으나, 오늘도 나는 한 조각의 변명도 하지 못한 채로 한숨만 쉬었다.
아벨은 우리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 는지, 그저 어리둥절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와 하데스를 번갈아 바라볼뿐이었다.
“자, 누워라.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하데스는 정말 셋이 나란히 자도 괜 찮은 모양이었다. 그는 누운 아벨을 살짝 밀어내고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당황스러웠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 었다.
좋다고 배시시 웃는 아벨의 기분에 초를 칠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눕자, 하데스가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참…….
“헤헤…….”
나와 하데스를 양옆에 끼고 누운 아벨은 정말이지 기분 좋아 보였다.
그의 고개는 왼쪽, 오른쪽, 연신 나와 하데스를 번갈아 바라보느라 바빴다. 그리고는 이따금씩 얼굴을 붉히 고 웃었다.
그래, 아벨. 나는 괜찮아. 너만 행복 하다면 나는…… 자의식 과잉 공작 전하께 오해받는 삶이라도 충분히 견 딜 준비가 되어 있단다.
“저……. 아버지와 영애가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말이에요.”
한참 옷으며 좋아하던 아벨은, 꺼내 기 부끄러운 말을 꺼내려는 것처럼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 제가…… 영애를 뭐라고 불러 야 할까요?”
가만히 듣고 있던 하데스가 풉, 하 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아벨의 수 줍은 질문에 웃음이 나왔다.
대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하는 그 이유, 잘 알지. 그 말이 듣고 싶으니 까.
나는 그런 아벨을 보며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요?”
“으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귀여운 아벨의 모습을 차곡차곡 눈에 담다 가, 결국 나는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 리고 말았다.
“엄마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공자님이 그렇게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아…….”
아벨은 행복해했다. 그 표정이 꼭, 화관 역조공 세례를 받고 비로소 성 덕으로 거듭났을 때 나의 그것과 비 슷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기분이 조금 미 묘했다.
뭐랄까, 놀라면서도 설레었달까.
우리 설마…… 정말 혹시지만…… 서로를 덕질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아벨?
상상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있는 내게 아벨은 천사처럼 대답했다.
“네. 너무…… 좋아요.”
그는 곧 들뜬 표정으로 하데스를 돌아봤다.
“아버지, 아버지. 결혼식은 언제 올 리실 거예요?”
하데스는 그런 아벨이 귀여운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성으로 가신들이 오기로 했 으니 그들과 얘기를 나눌 거다. 그리고 에스클리프 영지에 보낸 혼인 문 서가 도착하면 바로 날짜를 잡으마. 뭐, 준비만 끝나면 지체할 필요는 없 으니…….”
그는 말하다 말고,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식은 최대한 빨리 올리는 걸로 하 지. 걱정이유난스러우니.”
“하하…….”
자기와 결혼을 못 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가련한 여자를 보는 표정이었다.
공작령에 온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나는〈표정으로 읽어보는 공작 전하의 속마음〉같은 책도 충분히 집필할 수 있을 것이다.
민망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내가 물었다.
“저기, 전하. 가신들과 회의에서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요? 가스펠 백작 부터 절 그렇게 내켜하지 않는 데…….”
그저 화제를 돌리려 했을 뿐인데, 말하고 보니 정말로 걱정스럽기는 했다.
나는 가난뱅이 남작 영애 따위 절대 인정 못 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던 가스펠 백작 내외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뭇 걱정하는 표정으로 하데스를 바라보니,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 고 있었다.
“그대는 대체 왜 그런 걱정을 하지? 가신 회의는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야. 내가 내 성에 내 사람을 들이 겠다는데 그들이 뭐라고?”
“맞아요, 영애. 그런 걱정하지마 세요.”
똑 닮은 부자는, 괜한 걱정 말라는 듯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뭐라 더 할 말이 있었지만, 어차피 유난스러워한다는 대꾸로 일축할 것을 알기에 나는 그저 끄덕하고 말았다.
“아벨, 밤이 늦었으니 자라.”
하데스가 아벨의 이불을 단단히 덮 어주며 말했다.
아벨은 조금 더 조잘거리고 싶은 것 같았지만, 하데스의 말을 거스르기는 싫은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제가 잠들면…… 아버지 방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하데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 저 었다.
“아니? 내일 네가 일어날 때까지 곁에 있으마.”
아벨은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이번 에는 날 돌아봤다.
“영애는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저도요.”
“헤헤…….”
아벨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턱 끝까지 덮인 이불을 꽉 붙잡고 눈을 감았다.
나도 그를 따라 눈을 감았지만, 아마 쉬이 잠들 수는 없을 듯했다.
어린 날 봄 소풍을 앞두고 설레어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던 것처럼…….
***
행복한 하루의 여파였는지, 그날은 환상적 인 꿈을 꿨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아벨은 열 살짜리 꼬마였으니, 장성한 모습의 그가 내 앞에 있다는 건 꿈일 게 분명했다.
하데스와 판박이처럼 생긴 얼굴은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꿈속의 아벨은 나를…….
“엄마!”
……라고 불렀으므로, 개의치 않고 안겨드는 그를 꽉 안아줄 수 있었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 예요.”
“아벨…….”
“전 세상에서 어머니를 제일 사랑해요. 데보라보다 더요!”
“어머나…….”
감격에 겨운 나를, 아벨은 빙긋 웃으며 꽉 안아주었다.
듬직하게 자란 아들의 품은 아주 널 찍하고 따뜻했다.
이것이 잘 키운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인가?
미천한 덕후에서 역조공 세례까지 받은 성덕으로, 그리고 장성한 그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흡.”
나는 감동에 흐르려는 눈물을 겨우 삼키며, 마주 안은 아벨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분명 귀염뽀짝한 어린 시절에는 내품에 쏙 안기는 사이즈였는데, 크고 나니 어깨와 가슴이 아주 태평양처럼 넓어진 게…….
잘 자라주었구나!
“아이샤.”
그 순간, 아벨이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허허, 녀석……. 엄마가 아무리 좋 다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름을 부 르다니. 물론 나야 뭐라 불리든 상관없지만 하데스가 엄한 척하면서 혼내 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이샤.”
어라.
문득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벨의 목소리가, 그의 얼굴처럼 누군가와 꼭 닮 아있다는 걸 느낀 순간.
나는 아벨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보니 그는, 확실히 하데스였다.
이제는 매우 익숙해진, 자의식 넘치는 그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하데스 가 말했다.
“내 넘치는 매력이 죄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당신이란 여자…… 정말피곤하군.”
뭐라는 거야, 진짜?
아벨이 다 컸으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꿈에서라도 자수하고 광 명 찾기 위해, 굳게 마음을 먹었다.
번쩍 눈이 뜨인 건 그 순간이었다.
“아…….”
무거운 눈꺼풀이 벼락같이 열렸을 때에, 나는 낯선 풍경을 마주했다.
그것은 적당히 그을린 구릿빛 피부의…… 아주 탄탄한…….
‘가슴?!’
화들짝 놀란 내가 고개를 번쩍 쳐들 었다.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는 하데스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