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어제 아벨의 일로 딱히 입맛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약해빠진 이 몸으로 한 끼라도 걸렀다간 걸을 힘도 안 날 게 분명했다.
공작성의 요리사가 제법 신경 써서 준비해 준 음식들은 가짓수가 많았지만 같이 먹을 사람은 없었다.
넓은 식당에는 나 혼자뿐.
문득문득 고요한 식당 안이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이따금씩 칼질을 멈추고 멍하니 비어있는 의자들을 바라봤다.
아벨도 매일 이런 풍경을 보고 지내 왔을까?
“허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기분에, 나는 되는대로 꾸역꾸역 음식들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누군가가 식당으로 들어온 건 그 때쯤이었다.
인기척에 돌아보니 수프 그릇을 들 고 있는 아벨이었다.
“고, 공자……. 컥!”
미처 삼키지 못한 고기 한 점이 목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목을 붙잡고 캑캑거리는 내가 걱정됐는지 아벨이 단숨에 달려왔다.
“여, 영애. 괜찮으세요?”
들고 온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아벨이 내 앞에 와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채 씹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네. 컥……. 괜찮, 괜찮아요.”
겨우 대답한 내 시선은 본능적으로 아벨의 발에 닿았다.
아직 걸어 다닐 만한 수준이 아닐 텐데, 식당까지 온 게 걱정되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벨은 잠시 머 뭇거 리다가 말했다.
“같이…… 식사해도 돼요?”
“네? 어어, 당연하죠. 앉아요. 조 심……하고.”
발바닥의 상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는데, 아벨은 의아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아벨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벨은 붕대가 감긴 제 상처를 보았을 것이다.
공작성에서 자길 챙겨줄 만한 사람 이 하데스 말고는 없다는 걸 아는 아벨은, 아마 어제 저녁에 내가 다녀갔 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하는 눈치였다.
“저……. 영애.”
“……네.”
“혹시…….”
“…….”
“매, 매일 이렇게 같이…… 식사해 도 돼요?”
아벨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두려운 것처럼.
나는 시린 눈에서 주책없이 눈물이 흐를까 봐 꼭 참고 대답했다.
“……당연하죠.”
“식사하고 나면…… 영애의 방에서 같이, 간식 먹는…… 건요?”
“그럼요. 되고말고요.”
“바, 발이 나으면…….”
입술을 삐죽거리던 아벨은, 기어코 울고 말았다.
작은 뺨을 타고 흐른 눈물방울이 그 룻 안의 수프 위로 뚝뚝 어룽져 떨어 졌다.
울음에 뭉개진 발음으로 아벨이 한 번 더 물어왔다.
“……매일, 가, 끅, 같이…… 사, 산 책하는, 건요?”
벌게진 눈으로, 아벨은 나를 바라보 았다.
「엄마, 오늘은 집에 와? 」
「보고 싶어. 오늘 같이 자게 빨리와 주면 안 돼? 」
어릴 적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도 같아서…….
“그래요. 좋아요. 너무, 너무 좋아요.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결국, 나도 울음이 터 졌다.
바로 옆에 앉았던 아벨이 안겨들자, 나는 그의 머리를 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먹먹한 가슴이 가라앉을 때쯤 울음을 멈춘 나와 아벨은, 엉망이 된 얼굴을 마주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님은 울면 안 되겠어요. 예쁜 얼굴이 망가지잖아요.”
사실 우리 아벨은 우는 얼굴마저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지만, 나는 장난 스레 말했다.
아벨은 한참 웃다가 다시 내 허 리를 끌어안고는 얼굴을 비비적거 렸다.
“영애는 우는 얼굴도 예뻐요.”
이런…….
언젠가 아벨이 여주 데보라에게 했 던 대사가 떠올라 나는 또 웃고 말았다.
데보라에게는, 우는 얼굴이 예쁘지 않다며 울지 말라고 했었는데.
물론 우는 여주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건넨 말일 테지만, 나는 내 멋대 로 해석하기로 했다.
데보라와 달리 나는 아벨에게 우는 얼굴도 예뻐 보인다 이거야.
“공자님.”
“……네.”
“앞으로는 아프면 꼭 말해야 해요.”
“네에…….”
“몸이 아픈 것도 말해야 하고, 누가 마음을 아프게 해도 말해야 해요. 나한테 와서 바로 일러요. 알겠어요?”
“…….”
품에서 떨어진 아벨이 우물쭈물하 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는 아마도 애거사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벨이 걱정하지 않게끔, 아무 렇지도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백작부인이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다시는 공자를 괴롭히지 말라 고, 아주 화내고 왔으니까.”
“네?!”
아벨은 사색이 되었다.
“정말로 걱정 안 해도 돼요. 공자님을 괴롭히는 사람은 다 혼내줘도 된 다고, 공작 전하께서 허락하셨는 걸 요?”
“……저, 정말요?”
“그으럼요. 아마도?”
대답하면서도 나는 아주 살짝, 걱정 이 되었다.
아마 지금쯤 애거사는 하데스에게 찾아가 날 내쫓으라고 난리를 쳤을 게 분명했다.
어제 그렇게 깽판을 치고 나왔으니…….
하데스는 분명 막무가내로 굴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그 허락에도 적당한 선이 있다는 걸알아야 했다.
백작부인을 하대한 것도 모자라 욕 지거리에 조롱까지 퍼붓고 온 걸 알 고 나면, 하데스는 굉장히 분노할지 도 모른다.
어쩌면 너 같은 망나니를 공작성에 들일 생각을 했다니 내가 잠깐 정신 나간 모양이 라며, 이 추운 북부 바닥에 맨몸으로 내쫓을지도 모르고…….
“히익!”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을 거라 자신만만했던 마음이 놀랍도록 소심 해지고 말았다.
아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 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정말로.”
걱정할까 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쫓겨나면 어떡한담.
그렇게 되면 이제 아벨을 먼발치에 서 보는 것도 힘들 텐데…….
쾅!
“어맛!”
“헉!”
그때였다. 나와 아벨은 성난 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나는 놀라운 타이밍에 소름이 다 돋고 말았다.
거의 다 부술 기세로 식당 문을 박 차고 들어온 사람은 하데스였다.
그는 지금까지 봤던 것 중 가장 무 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법 먼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쳤음 에도 그 흥흉한 기세에 오금이 저릴정도였다.
나를 잠깐 쏘아보던 하데스는, 성큼 성큼 다가와 아벨의 앞에 섰다.
“아, 아버지?”
하데스는 대답 않고 아벨의 앞에 무 릎 꿇었다.
무작정 신발을 벗겨내는 그의 행동에 아벨이 허둥거렸다.
“저, 저…….”
신발이 벗겨지자 어설프게 붕대로 감아 놓은 맨발이 드러났다.
피가 배어나온 하얀 붕대는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하데스는 아벨의 발을 보며 잠시 침 묵했다.
“저, 아버지…….”
“아벨.”
하데스가 나지막이 아벨을 불렀다. 그러나 덧붙이는 말은 없었다.
그는 아벨의 상처를 어떻게 알았을 까?
아마도 어제 일을 일러바치러 갔을 애거사와의 대화에서 유추해냈을 가 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방에서 난리를 치고 나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 지.
고 못된 늙은이가 당시 정황과 대화를 있는 그대로 전달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하데스에게 아주 미친년으로 낙인 찍혀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분명 그럴 테지.
말없이 아벨의 상처를 한참 내려다보던 하데스가, 그의 발목을 가볍게 쥐었다.
그 순간.
마력이라곤 쥐뿔도 없어 핵석도 못 숨기는 나였지만, 어떤 이상한 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하데스가 무얼 하려는지 곧바 로 알아보았다.
“저, 전하! 그러지 마세요. 그럴 필요까지는…….”
끼어드는 나를, 하데스가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인지 엄청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서, 결국 끝까지 말리지 못하고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데스가 몇 번 발목을 어루만지자아벨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탄성이 터 졌다.
저건, 속성을 불문하고 모든 코어 쥬얼이 보유하고 있는 이능인 ‘흡수’였다.
외부에 의해 생긴 모든 신체적 변화는 이 흄수의 이능을 이용해 다른 대 상으로 전이시킬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지금 하데스가 아벨의 상처를 대신 가져갔다는 뜻이다.
아벨이 아프지 않으면 좋겠는 마음 으로는 하데스를 말리지 않는 게 당 연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상처의 고통은 흡수한 대상에게 고 스란히 전달되니까.
신전의 치료사들이 전부 백속성인 이유는 이것이었다.
백속성만이 가진 ‘정화’의 이능은, 옮겨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겪지 않 고 낫게 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이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건, 하데스가 바로 이 흡수의 이능을 사용하고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꼭 이렇게, 폭주한 아벨의 내 상과 붕괴된 정신을 흡수하고 죽고야마니까…….
“아, 아버지.”
고통이 말끔히 사라진 사실이 신기 한지 아벨은 당황스러워했다.
아주 미묘한 변화였지만, 나는 아벨의 고통을 고스란히 옮겨 받은 하데스가 미간을 찌푸리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아주 잠깐이었다. 하데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아벨을 번쩍 안아들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의 목을 끌어안은 아벨의 모습은, 퍽 익숙해 보였다.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그들만의 유대가 느껴졌다.
하데스는 아벨을 안은 채 나를 내려 다보았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왜 애거사에게 그런 식으로 행패를 부렸냐고 따질 생각일까?
그렇게 물어온다면 대답할 말이 떠 오르지 않았다.
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하데스의 시선을 그냥 피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