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9화 (19/221)

19화.

상처를 치료해준 아이샤는 방을 나 갔지만, 아벨은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막지 않으면 설움이 금세 입 밖으로 터 질 것만 같아서였다.

그는 꽉 쥔 주먹을 억지로 물었다. 이가 박힌 손이 아팠지만 참았다.

“끄으…….”

미처 막지 못한 틈새로 우는 소리가 조금씩 빠져나왔다.

눈을 꼭 감자 흐른 눈물이 베 갯잇을 홍건히 적셨다.

상처를 치료해주고도 한참 곁에 남 아 중얼거리던 아이샤의 혼잣말을, 아벨은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그녀는 한참 울었고, 그 울음이 겨 우 멎었을 때에야 뭉개진 목소리가 선명했다.

「외로움에 익숙해지지 마. 사람들 이 너를 미워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 지도 마. 」

「아벨, 너는……. 」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아이 야. 네가 사랑받고 행복했으면 좋겠 어. 」

「나로는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언제든 너를 사랑해줄 거야. 네가 만약 미운 행동을 해도, 나쁜 말을 해도, 나를 싫어해도…….」

「나는 꼭 네 옆자리에 있어줄게. 그러니까……. 」

「나한테는 울고, 웃고, 소리치고, 아이처럼 투정 부려줘. 네가 조금 더미운 아이처럼 굴었으면 좋겠어. 나는. 」

「그런 너도 사랑스러우니까. 」

아벨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흐끕, 혹…….”

아버지 하데스는 항상 아벨에게 ‘넌 더 노력할 필요가 없다. ’고 말해줬지만, 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적 없었다.

아버지에게 오점이 되고 싶지 않았 고,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부담이 되 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기에…….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당연해졌다.

주변에서 보내오는 멸시의 시선, 냉 랭한 삿대질, 무시, 점점 고립되어가 며 혼자 있을 때마다 찾아오는 외로 움 같은 것들.

힘들지만 그럭저럭 잘 참을 수 있다 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 다 착각이 었던 모양이라고, 아벨은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이샤의 따뜻한 말에 이렇게 눈물 흘릴 일 없겠지.

당장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품에 안 겨서 투정부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 지 않았겠지.

나 정말 외롭고.

힘들었어요.

안아줄 수 있어요?

그런 말들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을 거야.

“아, 으으…….”

가슴이 울렁거렸다. 기분 나쁜 느낌 은 아니었다.

그저 만져지지 않는 가슴 안쪽의 작 은 응어리가, 누군가에게 어루만져진 기분이었다.

아주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아벨은 제 상처를 만지며 숨죽여 울 던 아이샤의 목소리를, 내내 곱씹었다.

아주, 오랫동안.

창밖이 어스름하게 밝아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서.

어느새 밝아진 방 안이 새삼 놀라웠다.

한 번도 무섭지 않은 적 없었던 밤 이, 어째선지 그날만큼은 길지 않았다.

***

바쁜 일을 전부 제쳐두고, 요새 하데스는 고서를 뒤지느라 정신없었다.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아이샤가 핵석을 숨기지 못하는 사실은 큰 문제였다.

그녀처럼 핵석을 숨기지 못하는 크레센타인이 이전에도 있었는지 조사하면서 하데스는 에스클리프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클리프는 대대로 백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을 들여온 가문이었다.

서로 다른 속성 사이에서 무조건적으로 우성 형질을 가진 속성의 자식 이 태어나므로, 6속성 중 가장 열성 인 백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에스클리프는 오직 같은 속성을 가진 자만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마력도 건재하지 않아 쓸모도 없는 백속성을 굳이유지해왔던 이유가 무 엇인가?

처음에는 그저 가문의 상징성을 위 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조사해보니 아니었다.

‘이건 거의 미신 수준이 아닌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신전의 출범과 함께 1대 성녀로 이름 올렸던 여인이 바로 에스클리프의 선조였다.

당대에는 그 능력이 대단하여 천인 (天人)으로까지 칭송받았다 하는데, 속성의 이능을 자유자재로 다룸은 물론이고 신통한 예지(豫知) 능력이 있 어 세계의 대소사를 기가 막히게 읽 어냈다 하였다.

그런 성녀가 죽기 전 남겼던 유언이 바로.

「내가 다시 에스클리프의 성녀로 재림하여 멸망 앞의 제국을 구원하게 될지니. 」

그것이었는데.

‘원시인이야, 뭐야? 무슨 500년 전에 죽은 사람의 터무니없는 신탁을 떠받들고 있어?’

하데스는 황당했다.

지금의 상황으로 미루어봤을 때, 무 슨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 대륙이 몽 땅 가라앉지 않는 이상 제국은 향후 몇백 년은 더 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녀가 재림할 시기는 앞으로도 전혀 올 일 없어 보였지만, 에스클리프 가문은 꿋꿋이 그녀의 신탁을 믿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조사하다 보니 아이샤와 관련된 황 당한 사실도 알아냈다.

모종의 이유로 사경을 헤매던 아이샤가, 관 뚜껑을 덮기 전에 눈을 떠서 겨우 생매장을 면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하데스는 약 십 분 정도 말을 잇지 못했다.

……에스클리프에는 의원도 없는 걸까?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땅에 묻기부터 한다고?

만약 관 뚜껑을 닫은 뒤에 아이샤가 정신을 차렸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 가.

혹시 에스클리프의 영지민들이 전 부 원시 부족인 건 아닌가 고민하다 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샤를 떠올리고는 겨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특이한 가문이야.’

결과적으로는 핵석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샤의 상태에 관해 쓸 만한 정 보는 하나도 찾지 못한 채, 골머리만앓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창밖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침침한 눈을 감고 미간을 지그시 누 르자 쌓여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러나 하데스에게는 잠깐 동안의 평화도 허락되지 않았다.

날이 밝길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새 벽같이 제 방으로 쳐들어온 애거사 덕분이었다.

그녀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이이……!”

한숨도 못 잔 듯 수척한 얼굴과 퀭 한 눈으로, 악에 받쳐 이를 갈고 있는 애거사가 하데스는 의아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그녀가 이렇게 감 정을 내보인 적은 거의 없었기에.

“대체 어디서, 어디서! 그런 경우도 없는 계집을 데려와!”

애거사는 다짜고짜 성난 얼굴로 소리 질렀다.

하데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설마아이샤를 그딴 식으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니 겠지?”

“하.”

그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친근 한 부름에, 애거사는 황당한 듯 헛웃 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동생이 아이샤에게 단단히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제 식당에서의 일 도 그렇고, 제게 이렇게 굴 수 없다.

왜 이렇게 되었나?

아벨을 만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하데스는 여자 문제로 제 속을 썩인 적 없었다.

혼기가 차도 결혼을 마다하던 녀석이었지만 애거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내인지라 젊은 시절 많은 여자를 만나보고 싶어 할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 아니 었다.

적당히 밤을 데우고 헤어지는 일회 성의 관계까지는 자신이 관여할 바 아니니…….

어차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 면, 그의 곁에서 루버몬트의 안살림을 잘 도맡아 꾸릴 수 있는 적당한 권세가의 영애를 안주인으로 앉히겠 노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데스는 5년 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생아 하나를 데려와 수 치도 모르고 루버몬트의 성을 나눠주 었다.

어미를 모르는 근본 없는 피였다.

그저 금덩이나 챙겨 어딘가로 보내 버리고 말면 될 것을, 괜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일을 키웠다.

사생아의 존재가 알려지고, 심지어 하데스가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겠다 고 선언하자, 애거사는 수치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지키고 꾸려온 루버몬트의 이름인데…….

사생아를 내칠 궁리만으로도 머리 아팠던 애거사는, 거기에 또 불을 지 른 하데스의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 안에 단둘이 남자마자 본색을 드 러내던 건방진 얼굴…….

애거사는 아이샤의 얼굴을 떠올리 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당장 그 계집을 내쫓아! 당장!”

“미쳤어? 나가.”

“어제 그것이 내 방에 와서 뭐라 했 는지 아느냐?”

잔뜩 성난 얼굴로 달려온 애거사가 하데스의 책상 위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뒷방 늙은이는 더 이상 루버몬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하더구나. 공자의 교육에서도 손을 떼라고.”

“뭐?”

또 애거사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 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던 하데스는 조금 놀랐다.

아이샤가?

“그뿐인 줄 아느냐? 식당에서 내가 무례하게 굴었다며, 공작부인의 이름만 받으면 각오해야 할 거라고 으름 장을 놓고 돌아갔지. 내 발바닥을 터 뜨린다고 하더구나. 허, 참…….”

흥분해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애거사의 말에, 하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그 계집이 음 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 다고. 너는 어찌 그것을 못 알아봐?”

“…….”

“당장 매질을 해서 내쫓아라. 그런 무례하고 멍청한 것이 내 공작성에 하루라도 더 머무는 건 용납 못 해.”

“애거사.”

왜인지 하데스의 목소리가 소름 돋을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애거사가 순간 멈칫했다.

하데스는 가만히 자신의 누이를 바 라보았다.

아이샤가 이유 없이 애거사를 찾아 가 소란을 피 웠을 거 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무슨 계기가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하데스는, 공자의 교육이며 발바닥 어쩌고 운운하는 애거사의 말을 듣고, 문득 떠오른 의심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누이에게 후계자 교육을 받던 시절, 밖에 나가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발 바닥에 매질 당했던 기억은 그에게도 선연했다.

하데스는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

“……내 아들 때렸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