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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8화 (18/221)

18화.

못 한 말없이 시원하게 질러준 뒤 애거사의 방을 나왔지만, 왜인지 가 슴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막무가내로 굴어도 좋다고 했더니 정말로 뒷일 생각 안 하고 망나니처럼 행동했다고 하데스가 나를 탓할지 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게 걱정스럽 지는 않았다.

아니, 결혼하면 이제 하데스와 나는 부부 사이가 아닌가?

물론 이혼 서류에 도장 찍으면 남보 다도 못한 사이가 되 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원칙적으로 우린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될 것이다.

부부는 무려 무촌.

그런 아내 편이 아니라 자기 누님 편을 든다면야 뭐, 그걸로 하데스는 더 바랄 것도 없는 못난 사내일 테니.

되레 내 쪽에서 결혼은 사양할 거라 이 말씀이야.

아무튼 시원하게 깽판을 치고 왔어도 고구마 백만 개는 먹은 것처럼 가 슴이 답답한 이유는, 아벨 때문이었다.

「저 산책하고 싶어요. 영애랑 같이 있으면 좋단 말이에요. 」

「하나도 안 피곤하니까 걱정하지마세요. 」

망할 늙은이에게 발바닥이 다 부풀 어 터질 정도로 얻어맞고도, 산책하 자며 찾아온 나를 거절하지 않고 매 달리던 아벨.

“아, 오랜만에 욕 나오네. 정말…….”

울컥 눈물이 솟구친 나머지 나는 아 무도 없는 복도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수도꼭지 튼 것처럼 줄줄 흐르는 눈 물은 연신 닦아냈는데도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아벨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고, 또 눈치 없고 바보 같은 내가 좀 원 망스러웠다.

아픈 걸 꾸역꾸역 참고 있는 거 하나 눈치 못 채는 내가 아벨을 덕질할 자격이 있는지…….

“미안해…….”

아벨은 듣지 못할 사과를 소리 내어 하고 나니 감정이 더 북받쳤다.

연신 손등으로 쓸어내린 눈가가 쓰 라렸다.

그때였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는지, 방에 있 던 앤이 나왔다가 엉엉 우는 나를 보 고 놀라 달려왔다.

“에, 에그머니나! 아가씨!”

“애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백작부인 이 아가씨께 또 뭐라고 했어요?”

어제 식당에서 있었던 일은 아벨이 맞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난 뒤 앤 에게 대강 설명했는데, 그녀는 언제 나 그랬듯 나보다 더 화를 내줬다. 지금도 그랬다.

“이, 이…… 미친 아줌마 같으니라 고. 우리 아가씨도 남작령에서는 얼 마나 곱게 자란 딸인데. 이, 이 나 쁜…….”

“아니야. 할말다하고 왔어.”

“그래도 뭔가 아가씨를 속상하게 했으니 이렇게 울고 계시는 거겠지 요! 그냥, 그냥 제가 가서 그 할망구머리채를 확 잡은 다음에 공작 전하 께 벌을 받든, 어쩌든 할게요. 기다려 보세요.”

앤이 홍분하며 팔을 걷어붙였다.

금방이라도 애거사의 방을 찾아갈 기세에 내가 급히 앤을 잡아 말렸다.

“정말이야. 내가 말도 못 나오게 제 대로 쏘아붙여주고 왔어. 그것 때문에 우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

최애의 건강 상태조차 체크하지 못하고 팬 미팅을 해 달라 울부짖은 못난 덕후로서, 그 자질 없음에 눈물이 난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 텐가.

그러나 앤은 내가 이 세계에서 깨어 난 이후 3년 동안 나를 지켜봐 온 아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마음이 이해되는지, 푹 한숨을 내쉬며 나를 살짝 끌어안았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잖 아요. 아가씨 잘못 아니예요. 울지 마 세요. 웅? 뚝.”

“앤, 난 아벨을 덕질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나 같은 팬이 있다는 걸 알면 아벨은 엄청 수치스러울지도 몰 라.”

“아가씨도 참.”

앤은 안은 내 둥을 토닥이며 작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좀 위로가 되는 듯했다.

이곳에서의 나와 동갑인 앤은 분명 스무 살 남짓한 어린애일 텐데, 어떨 때는 한없이 어른스러워서 지금처럼 이렇게 기대고야 마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막 이곳에서 눈을 떠 아주 조금 당황스러웠을 때에도 옆에는 앤이 있어줬다.

내 덕질을 이해시키려고 했을 때에 도 그녀는 퍽 너그러웠지.

죽었다 살아난 아가씨가 정신이 나 갔다고 생각할 법한데도, 앤은 참을 성 있게 내 곁에 있어주었다.

이렇게 우울하고 씁쓸해서 마냥 울 고 싶은 순간에도.

“아가씨이.”

“으웅…….”

“공자가 어떤 분인지 직접 겪어보 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 공자 님처럼 순수하고 마음 예쁜 어린이는 처음 봤어요. 왜 아가씨가 공자님을 덕질하려고 했는지 바로 이해했다니 까?”

“그치? 아벨은 최고야…….”

“공자님이 아가씨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시는지 아시잖아요. 아가씨가 공자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걸 알고 나면, 얼마나 좋아하실지 전 상상도 안 되는 걸요.”

“설마…….”

“진짜라니까요? 말 나온 김에 오늘 새벽에는 손수건에 자수 놓는 걸 끝 내보도록 하세요. 빨리 공자께 조공해야죠.”

“흑. 그래, 그러자……. 그런데 이시간에 어디 가려고?”

뒤늦게 눈가를 훔치며 내가 묻자, 앤이 들고 있던 작은 꾸러미를 들어 보였다.

“이걸 공자님께 전해드리고 올까 해서요.”

나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봤다.

아마 퉁퉁 부어 터져 있을 상처에 바를 만한 연고쯤 되는 모양이었다.

“들어보니 공작성의 고용인들은 공자님을 유령 취급하는 것 같더라고요. 공자님이 맞은 거 뻔히 알면서도 챙겨줄 사람들은 없어 보이고 해 서…….”

“아.”

나는 또 울컥하고 말았다.

유령 취급이라.

그래, 아벨의 어린 시절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루버몬트 공작의 유일한 오점, 더러 운 사생아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그는 어떻게든 버텨왔다.

누구보다 자길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니까.

하데스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 력했지만, 공작이라는 지위 때문에 의도치 않게 아벨을 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에도, 아벨은 이 외로움과 고난을 감내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아벨은 바쁜 아버지에게 외롭고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아이도 아니었다. 너무 빨리 커버린 것 같았다.

내가 본 하데스는, 아벨이 조금 더 아이다웠더라도 충분히 그를 아끼고사랑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인 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몇 줄 되지 않는 서술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버린 아벨의 유년시절이 안타까웠다.

“하아…….”

“어머, 아가씨. 또 왜 우세요? 공자 님이 불쌍해서 그래요? 아이고, 오…….”

앤은 나를 다독여주며 들고 있던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공자님에게 직접 다녀오시는 게 어때요? 가서 꼭안아주고 오세요. 울지 말고.”

“아, 아벨한테 갔다 오라고?”

“네.”

조금 망설였지만, 고민은 짧았다.

아벨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한 것과는 상관없이, 아파서 잠에나 제대로 들 수 있을지 모를 그가 걱정되어서.

***

아벨의 방 앞은 휑했다.

마치 공작성 안에서 내버려진 아벨의 외롭고 공허한 마음 같아서 나는 또 울컥 터지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저기……. 공자님.”

조용히 아벨을 불렀으나 답은 없었다.

문을 여니 멀리 침대 위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아벨의 작은 몸이 보였다.

피곤했겠지. 오늘 하루는 아벨에게 무척이나 힘들었을 거야.

그냥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아벨에게로 향했다.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았을 그의 상 처가 걱정되어서…….

얼마나 피곤했는지 아벨은 내가 가만히 침대 위에 몸을 앉혔을 때에도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이따금씩 귀에 감겨왔다.

“공자님.”

아벨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기에, 나는 그의 작은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발끝에서부터 살짝 들어보았다.

달빛이 밝아 아이의 작은 발이 훤히 드러났다.

“아어김없이 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내 손바닥만 한 아이의 발은, 들었 던 대로 엉망이었다.

가느다란 회초리가 수십 번 가르고 지나간 흔적.

터지고 찢어져 갈라진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고 하얀 이불 군데 군데가 붉은 꽃이 핀 것처럼 물들어 있었다.

아마 억지로 산책하면서, 안 그래도 심했던 상처가 더 벌어졌을 터였다.

“하, 미치겠네. 정말.”

아벨의 이부자리 위에 눈물을 떨칠 수는 없어서, 나는 눈을 크게 치뜨고 손부채질을 하며 겨우 참았다.

“아벨…….”

지쳐 잠든 아이를 깨우긴 싫었지만, 치료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벨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두 기로 하고, 나는 앤이 꼼꼼히 챙겨준 꾸러미를 열어 아벨의 상처를 보기 시작했다.

깨끗한 천으로 상처 위를 조심히 닦 아내고 약을 바르는 동안, 아벨은 아픈지 무심코 몇 번 움찔거렸을 뿐 곤 히 잠들어 깨지 않았다.

나는, 그 끔찍한 상처 위에 약을 바 르면서 결국.

다시금 숨 죽여 울고 말았다.

“흐끅…….”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참기 힘들 어서 억지로 겨우 입술을 물었다.

중간중간 시야가 흐려 팔등으로 눈 가를 쓸어내도 눈물은 금세 다시 고였다.

“미, 미안, 미안해…….”

아픈 발로 내 걸음을 따라 걸으면 서, 이 작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 까.

“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너를, 아프게 했어…….”

바보같이, 절뚝거리면서도 주인밖에 모르는 강아지처럼 따라오던 걸 알아봐주지도 못하고.

“외로웠지. 그래서…….”

어떻게 내게 그렇게 금방, 마음을 열어주었는지 궁금했는데.

외로웠겠지. 만날 때마다 얼어붙어 서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지도 못했던 나인데도,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그깟 산책이 다 뭐라고. 아픈 발로 억지로 나와 함께 걸어줄 필요는 없 었는데.

이 아이는.

대체 왜 이렇게…….

“조, 좋아, 흡…… 좋아해줘서 고, 고마워, 아벨. 나, 나는, 그렇게, 좋 은, 끅, 사, 사람이 아닌데…….”

바보 같고.

“내, 내가…… 내가 너처럼 예, 으 으…… 예쁘, 고 착한, 아이의 엄마로 정말, 어울릴까? 바보처럼 아픈 것도 못 알아봤는데…….”

눈물 훔치랴, 고해성사 같은 사과를 하랴 정신없으면서도 나는 최대한 공을 들여 아벨의 상처에 붕대를 감았다.

아픈지 아이는 작은 발을 움찔 떨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나는 또, 잠시 숨을 멈추고 한참을 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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