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나는 그 길로 가스펠 백작부인, 애거사의 방을 찾았다.
애거사의 방에는 하녀들이 꽤 많았다.
그녀가 백작령에서 데려온 하녀들 과, 공작성에 와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이곳의 하녀장까지.
내가 알기로 이곳의 하녀장은 가스펠 백작 가문에서 뽑아 보낸 여인이 었다.
하급 귀족 가문의 귀부인으로 나와는 스무 살 남짓 차이가 나는 중년이 었는데, 아마 계속 이곳에 머물 수 없는 애거사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심 복일 터였다.
또한, ‘불우한 아벨의 유년시절’에 가담한,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악역 조연 고용인이라는 데에 나는 아벨을 위해 짬짬이 수놓고 있는 손수건 조 공품도 걸 수 있었다.
그 어린 아이를 그렇게나 끔찍하게때려놓고도 애거사는 한가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냐는 듯, 시건방진 표정으로 찻잔을 기울이며 눈으로 물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한 척 허리를 숙이 며 말했다.
“백작부인, 어제 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괜찮으 시다면 하녀들을 좀 물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부터 깽판을 칠 생각인데, 물론 치밀하게 굴 것이었다. 보는 눈많은 곳에서 바보처럼 성을 내며 내 이미지를 깎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고분고분한 말투와 주눅 든 표정에 애거사는 벌써부터 날 이겨먹은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행히도 숙이고 들어가는 내 모습 이마음에 들었는지 애거사는 흔쾌히 하녀들을 물려주었다.
“앉아요. 방금 차를 다 마셨는데, 한 잔 더 하고 싶군요. 따라보겠어 요?”
의자 뒤로 느긋하게 몸을 당겨 앉으 며, 애거사가 웃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라 있는 차제구를 턱짓했다.
나를 무슨 하녀 대하듯 하는 시건방 진 꼬라지에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아벨이 당한 괴롭힘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 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달라진 내 표정에 애거사의 얼굴에서는 반대로 웃음 이 싹 가셨다.
“손모가지 멀쩡하시니 직접 따라 드시고…….”
나는 어제 식당에서 애거사가 그랬 듯이, 가슴 앞으로 착 팔짱을 낀 채거만 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당신, 내 아들 때렸어?”
애거사의 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보다 더 놀랄 수 없을 정도로 놀 란 표정이 볼만했다.
“영애? 지금 무슨…….”
“내 아들 때렸냐고 묻잖아.”
하, 하…….
몇 번 헛웃음을 터뜨리던 애거사의 눈이 뒤집어졌다.
“……못 배워먹은 계집 같으니라 고. 이제 아주 대놓고 본색을 드러내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군. 내 이럴 줄 알았지.”
애거사는 마치 대단한 중거라도 잡 은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그럼 그렇지. 천박하게 치마 걷고 사내 흘리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계집이…… 어디서 여우처럼 수작을 부리나? 그 둔한 애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거든.”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굳이 당신 눈 속여가면서까지 빌빌거려야 할 이유, 없어요. 그래도 내 남편의 누님 이시니 최소한의 예의로 대우해줬는 데…… 이렇게까지 선을 몰라?”
“……뭐라고?”
너무 황당한 나머지 애거사는 말문 이 막힌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하녀들까지 다 쫓아내고 치 밀하게 자기를 잡아먹으려 들 줄.
“지, 지금, 나한테, 이렇게 굴고도, 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정신이 아주 나가버렸어?”
“내, 아들, 때렸냐고, 지금 세 번째 물었어. 대답할 생각이 없으신가?”
“고 악마 같은 것이 쪼르르 일러바 치기라도 했는가 보군.”
이를 악문 애거사가 턱을 바르르 떨 며 말했다.
“천것이 루버몬트의 성을 달았으면 그 격에 맞게 굴어야 할 터인데, 하도 예의 없이 굴어 내 직접 교육을 해주 었지. 나는 공작의 누이이고, 루버몬트에 평생을 바친 루버몬트의 사람이 네. 그 아일 교육한 것이 무에 문제가 되는가?”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피차 고것이 아니꼬운 건 마찬가 지일 텐데, 이리 싸고도는 꼴을 보니 좀 알겠군그래. 하데스가 죽고 못 사는 아이이니 그런 모양이지? 잘 대해 주는 척 양모 자리라도 꿰차 앉고 싶 어서?”
나를 빤히 노려보는 애거사의 눈에는 혐오가 형형히 들어차 있었다.
더러운 벌레 보듯.
아마 애거사는 분명, 저런 눈으로 어린 아벨을 바라봤을 것이었다.
그녀의 입김이 닿아있는 공작성의 돼먹지 못한 심복들도 전부.
아벨은 거듭되는 이런 취급 속에서어쩌면 자신의 존재가 쓸모없는 버러 지나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 해왔을지도 모른다.
「영애는 제가 밉지 않아요? 」
자신을 향해 던져지는 시선은 하데스의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모진 핍 박과 혐오뿐이었을 테지.
그렇게 모두가 자신을 몰아붙이는 데, 누군들 남의 호의를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자길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 믿기지 않는 듯 의아해하던 아벨을 떠올리며,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시작했다.
화를 다스리지 않으면, 찻주전자에 담긴 얼음물도 아닌 것을 애거사의 머리 위로 들이붓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말했다.
“예의 없이 굴었던 것은 부인도 마 찬가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만히 테이블로 올린 손이 그 위를 쓸었다.
내 움직임을 따라 애거사의 시선이 붙는 게 느껴졌다.
“내 아들이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 은 거라면.”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나는 꿀릴 것 하나 없었다.
다시 한번 되새기지만, 아벨의 아버님은 내게 막무가내로 행동해도 좋다 고 하셨다.
“부인도 이 자리에서, 내게 발바닥 이 터지도록 회초리를 맞아도 이의 없겠지?”
“뭐, 뭐?!”
끝내 애거사는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어디서 이런 건방진 것이 들어왔 나! 네가 벌써 공작부인이라도 된 줄 아는 게냐?!”
“곧 될 것인데, 조금 먼저 윗사람 행세를 한들 무에 문제가 되겠나?”
나는 애거사의 고상한 말투를 조롱하듯 따라하며 대꾸해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제 분에 못 이겨 휘청거렸다.
“어, 어, 어디, 어디서 이런…… 돼 먹지 모, 못한 계집을 드, 들여와서는…….”
“천박하게 계집, 계집, 하지마시 게. 가문에 헌신한 것이 대단하고 안타까워 어른 대접은 해 줄까 했더니, 찾아 먹을 예우도 제 발로 걷어차는 몽매한 꼴이라니.”
이어지는 내 말에 애거사는 아예 전 의를 상실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연신 앙상한 몸을 휘청거렸다.
“똑똑하신 분인 줄 알았더니 한참잘못 봤어. 나설 데와 안 나설 데 구 분은 하셨어야지.”
나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내 아들 교육은 내가 시킬 테니까 앞으로 손끝 하나 대는 일 없도록 하 시게. 그리고 예의 운운할 생각이라 면 부인이야말로 그 천박한 주둥아리에 박음질부터 하고 와야 할 거야.”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키자 애거사와 눈높이가 맞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내려다보고 있 지 않았다.
“내 남편을 어머니처럼 키웠다 했지.”
사실 하데스와는 애정이 절절한 사 이도 아니었고, 우리 관계도 그저 일 종의 계약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애거사 앞에서 마치 그가 내 편인 것처럼, 남편, 하고 불러보니 퍽 든든 하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우군이 라도 옆에 낀 기분이었다.
물론 이건 전부, 제멋대로 굴어도 좋다고 허락해 준 하데스를 믿기에 나오는 자신감이 지만.
“그렇다면 불쌍한 내 남편도 당신 같은 여자 밑에서 어떻게 자랐을지뻔히 보이는군.”
“이이…….”
“부인이 가문에 헌신했다 하여 내 남편이랑 아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자 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부인 이 힘들여 잘 가꾼 이곳의 주인은 이제 내 남편이니, 분수도 모르고 물을 흐리려 했다간 큰코다치고 말 거야.”
“이, 정신 나간 것! 내게 이리 막돼 먹게 군 걸 하데스가 알면, 널 가만히 둘 거라고 생각하느냐?”
“글쎄. 내 남편도 부인에게, 여간 질린 게 아닌 것 같던데……. 어쩌면잘했다고 칭찬해줄지도 모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부인이 망쳐놨던 내 남편과 내 아 들의 어린 시절은, 내가 열심히 보상해줄 생각일세. 그러니 부디 방해는 말아줘. 아.”
말을 마치고 애거사의 방을 나서려 다가, 못 한 말이 남았음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내 손으로 부인의심 복들을 하나하나 골라내서 내치기 전에, 알아서 잘 정리해 데려가시게. 내 집에 뒷방 늙은이가 붙인 더러운 눈 과 귀가 기어 다니는 꼴은, 도저히 못보겠거든.”
“뭐, 뭐야?”
북부에 온 지 얼마되지도 않은 내가 그런 것까지 파악할 줄은 몰랐던 듯, 애거사는 순간 당황했다.
그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벨을 위해 그 정도도 유추할 수 없을 만큼 멍청한 내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있 었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알량하 게 주둥아리나 털어대려고 부인을 찾 은 것은 아니네.”
부들부들 떠는 애거사를 향해 나는 힘주어 덧붙였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권력이라는 것과는 영 거리가 멀었던 사람인지라 윗사람 행세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적웅해야 했다.
여긴 이런 곳이니까.
그리고 애거사는 분명, 지나친 잘못을 했으니까.
“내 아들을 때린 걸 곱게 봐주고 넘 어갈 생각은 전혀 없어. 내가 정식으 로 루버몬트의 안주인 이름을 얻는 날에, 꼭 내 방으로 오시게.”
나는 마지막 인사를 남겨두고 홀연 히 애거사의 방을 나섰다.
“그날은 네 발바닥이 터지는 날이 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