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허둥거리던 아벨은 풀린 손수건을 다시 황급히 내 손목 위로 묶었다.
으으, 저 고사리 같은 손이 야무지 게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려니 흐뭇 하구나.
별생각 없는 나와 달리 아벨은 상당 히 충격 받은 듯했다.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장기를 덜렁덜렁 빼놓고 있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어.
“왜, 왜 이걸 안 숨기시는 거예요?”
“안 숨긴 게 아니라, 못 숨기는 거 예요. 어떻게 숨겨야 하는지 모르겠 어요. 이것 때문에, 전하도 언짢아하 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 그, 그러면 영애의 탓이 아닌 데……. 우울해하지마세요.”
“고마워요. 공자님은 대단해요. 벌 써 한참 전에 핵석을 숨기는 데 성공했죠? 보통 열 살은 훌쩍 넘어야 한 다던데, 역시 천재는 떡잎부터 다른가 봐요.”
“예에?! 천재라뇨? 전 그런 거 아니 에요. 그리고 이걸 못 숨긴다고 해서 바보인 것도 아니예요. 그러니까 정말로…… 우울해하지마세요.”
아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손목에 묶인 손수건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영애는 조금, 위험해 보여요. 이런 약점을 아 무한테나 말하면 안 돼요.”
“공자님은 아무나가 아니잖아요?”
“아…….”
내 말에 아벨은 놀란 듯 눈을 크게떴다가, 곧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런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내 앞에서 한참 부끄러워하던 아벨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가 위험하지 않게, 제가 잘 지 켜드릴게요.”
세상에.
성덕이 된 것도 모자라 아벨에게 ‘지켜주겠다. ’는 말까지 듣다니.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수확에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남주의 지킴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어디 혼한 일이던가.
주책없이 코끝이 찡해지는 바람에 나는 겨우 진정하고 말했다.
“고마워요, 공자님.”
***
아이샤와 아벨이 누구보다도 행복 한 한때를 보내고 있을 즈음.
하녀 앤은, 어제 가스펠 백작 내외를 만나고 오자마자 사뭇 어두운 표 정으로 아이샤가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앤, 여기 하녀들이랑 좀 친해져 볼 수 있을까? 난 여기 분위기를 전 혀 모르니까, 네가 알아봐줄 게 있 어. 」
「뭔가요? 」
「공작성 고용인들이 아벨을 어떻 게 대하는지 말이야. 무시나 학대는 없는지, 뭐 그런 거. 있다면 어떤 수준인지도. 」
하필 백작 내외를 만나고 돌아오자 마자 그런 부탁을 하는 걸 보니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 지만, 앤은 깊이 묻진 않았다.
아이샤는 북부로 올 때 챙겨온, 적 당히 값어치 있는 패물 꾸러미까지 내어주었다.
「이건 혹시 필요하면 쓰고. 사람들 꾀어내는 데 돈보다 좋은 게 없는 거, 그동안 나랑 일해 보면서 다 깨우쳤 지? 」
제법 눈치와 처세가 좋은 앤은, 사실 아이샤가 부탁하기 전부터도 공작 성의 몇몇 하녀들과 적당히 친분을 다져놓았다.
하나 앤이 그들을 파악하기 위해 눈 치를 보고 있는 만큼 그들 또한 낯선외부인인 앤에게 섣불리 공작성의 사 정을 떠벌리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그다지 쓸모 있는 수확은 없었다.
아이샤와 산책 나간 아벨의 방을 정 리하고 나온, 하녀 둘의 대화를 엿듣 기 전까지는.
“백작부인이 무서운 사람이란 건 알아봤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내 발바닥이 다 아프더라. 그런데 도 꾸역꾸역 산책하러 나가겠다고 하는 거 봐.”
아벨의 방이 가까워질 때쯤, 고요한복도에서 소곤소곤 들려오는 작은 대 화에 앤은 개빨리 걸음을 멈추고 모 퉁이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공자도 보통 독한 게 아니라니까. 아무렴, 전하의 피가 흐르는데 평범하 진 않겠지?”
“당연하지. 에스클리프 영애와도 뭐, 산책하고 싶어서 나갔겠어? 잘 보여야 하니까 그런 거지. 어린 게 악 바리야, 아주.”
“그나저나 백작부인, 저렇게 대놓 고 공자를 괴롭히셔도 되는 거야? 전하가 아시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시지?”
“너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백작부인 이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데. 공자가 원하지 않으면 체벌하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못을 박으셨다고. 거기에 대 고 공자가 뭐라 할 말이 있겠어?”
“하긴…… 공자 성격에, 백작부인 에게 맞은 걸 전하께 쪼르르 일러바 칠 일도 없고. 혹시나 전하가 아시더 라도 공자가 체벌 받는 걸 동의했다 고 말하면 그만이 려나?”
“어휴, 난 루버몬트 사람들 전부 무 서워.”
몸을 바르르 떨며 양쪽 어깨를 쓰다 듬던 하녀가, 문득 화들짝 놀랐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복도 끝 모 퉁이에서, 아마도 모든 대화를 전부 엿들은 듯한 에스클리프의 하녀 앤이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놀라 허둥거리는 두 하녀 앞에 나타 난 앤이 그녀들을 안심시키려는 듯태연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도 수고가 많아요. 공자님 방 정리하고 나오는 길인가 봐요?”
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지만, 두 하녀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앤은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말 했다.
“……가스펠 백작부인이, 공자를 함부로 대하기라도 했나 봐요?”
“우, 우린 잘 몰라요.”
“가볼게요.”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는 하녀들의 앞을 앤이 가로막았다.
“제가 안다고 뭐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언니들이 공자를 괴롭힌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당황하세요? 그냥 제가 심심한 걸 싫어하고 궁금한 게 많아서 그래요. 무슨 일인지 좀 알 려주면 안 돼요?”
두 하녀는 서로 시선을 나누면서 계 속 앤을 경계했다.
빙긋 옷은 앤이 소맷자락에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아이샤가 챙 겨준 패물이었다.
“이제 저도 공작성에서 쭉 지내게 될 텐데, 우리 그러지 말고 조금 친해져 봐요.”
***
“그랬단 말이지…….”
톡, 톡.
테이블 위를 가만히 두드리며 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 그러니까 나는.
화가 났다.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이 정도로 화가 나 본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아, 아가씨…….”
앤이 내 눈치를 보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샤 에스클리프는 제법 예쁜 얼굴이었지만 표정이 없는 편이라, 겉으로만 보면 쌀쌀맞고 새치름한 성격 같았다.
그런 얼굴을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 그러뜨리기까지 했으니 지금 내가 얼 마나 무서워 보일지는 굳이 거울까지 안 봐도 뻔했다.
그래, 나는 지금, 정말 화가 났다.
“발바닥…… 말이지.”
“아가씨는 전혀 모르고 산책 나가 자 하셨잖아요. 괜히 또 죄책감 느끼고 계신 건 아니죠?”
아벨과 산책을 끝마치고 방으로 돌 아오자마자, 나는 피곤함에 누울 새 도 없이 앤이 가져온 소식에 충격 받 고 말았다.
「예절 교육을 한다는 명분으로 체벌을 하셨던 모양이에요. 발바닥을 굉장히 심하게 맞으셨다는데 살이 다 터져서 붓고 피도 나고 그랬대요. 」
「바닥에 흘린 피를 닦는데…… 걸 레 빤 양동이가 시뻘겋게 물들 정도였다더라고요. 」
열 살짜리 어린아이는 약하고 소중하다. 잘못이 있다면 말로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이 먼저다.
언젠가 자식을 낳게 된다면, 하고 상상했을 때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를 말하려 면, 구질구질해도 전생의 기억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술을 마시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나 있는 딸이었던 내 유년시절은 썩 행복하지 못했다.
맞기도 많이 맞았고, 그 나이 때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욕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듣곤 했다.
어쩌면 사랑받지 못했던 과거의 기 억 때문에, 더 절실히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덕질에 영혼을 판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도록 해왔으니까.
머리가 크고는 모진 기억들과 적당 히 타협하며 살아왔다.
그래도 부모인데 얼굴을 안 보고 살 수는 없었고, 생활비를 가져다줄 때뿐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그들은 미안했다는 말도 해주었으니까.
시간이 꽤 지났으므로, 나는 이미 그들을 용서했고 내심으로는 아무렇 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다 자란 아벨은, 그냥 나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겠지.’
어떻게 그 모진 학대의 기억들이 그 저 지난 일로 퇴색될 수 있겠는가?
나는 더 이상 부모에게 맞지 않게되었던 나이에도 이따금씩, 어린 시 절의 꿈을 꿨다.
그건 용서한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했던 상처 입은 마음이 만들어 낸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내 부모는 분명히 어렸던 나를 학대했다.
시간이 지나 서로 그것을 묻고 살아왔다 해도, 과거의 기억은 정당화되 거나 미화되어선 안 됐다.
그렇기에 나는 애거사 가스펠이라는 여자의 생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 로, 그녀의 도를 지나친 학대를 묵인할 수 없었다.
불우한 유년시절을 겪고 있는 아벨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나뿐일지도 모르니까.
“아, 아가씨? 뭐 하시려고요?”
표정 없는 얼굴로 벌떡 일어난 나를, 앤이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백작부인에게 가보려고.”
“헉! 아니, 아가씨……. 조금 진정 하세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더 해보는 게 어떠세요? 백작부인이 그냥 백작부인도 아니고…….”
“백작부인이 뭐? 난 곧 아벨의 엄마가 될 거고, 이 공작성의 안주인이 될 거야. 앤.”
아벨의 아버님은, 어제 나에게 분명 히 말씀하셨다.
조금 더 내키는 대로, 막무가내로 굴어도 좋다고 말이지.
“내가 착각한 게 있었어, 앤.”
“……뭔데요?”
이 시점에서도 아동학대범과 원만 히 잘 지내보겠다는 생각이 남아있다 면 그건 내가 정신 나갔다는 중거겠 지.
“난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더라고.”
왜, 백작부인을 만나자마자 떠올렸 던,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려서 엔딩을 봐야하는 게임.
생각해보니 난.
“갔다 올게.”
참을성이 없어선지, 그런 종류의 게임을 단 한 번도 공략 성공해본 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