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무릇 주인공들에게 능력치를 몰아주는 것이 수많은 장르 소설들의 핵 심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면 책에 이름 한 줄 안 나온 조연들은 뭘 먹고 살아간답니까, 작 가님?!’
나는 아벨만큼이나 덕질해댔던 작 가님을 처음으로 원망해 봤다.
아마 조연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다 면, 감히 은혜로운 아벨의 조물주를 탓할 생각은 못 했을 테다.
‘아니, 난 솔직히 조연도 아니잖아요.’
일단 책 내용에 등장은 해야 주연이 든 조연이든 결정지어질 것이 아닌 가.
한데 왜 나는 하필 듣도 보도 못한 ‘어딘가에는 등장했을 지나가는 캐릭 터 1’이 되어버렸느냔 말이다.
이렇게 존재감 하나 없는 인물로 환 생을 했다면, 차라리 일말의 기대도 안 들게끔, 길가에 널린 돌멩이 수준의 설정이기라도 할 것이지.
대에 대를 거듭하면서도, 혼혈이 나 오지 않도록 철저히 백속성의 피를 지켜왔던 요상한 가문.
그 가문의, 어딘가 많이 부족해 보 이는 외동딸.
아마 제국에서 유일하게—하데스는 유일하게 나뿐일 거라고 확신했다. — 급소인 코어 쥬얼, 핵석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여자.
등장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치고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특이한 설정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내심으로는 기대했다.
내가 이곳 세계에 적응하는 순간, 뭔가 특별한 각성을 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그런데 아무래도…….
“흐읍!”
“몸에 힘주란 소리가 아니라니까?”
……그른 것 같다.
“전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전하도 제가 답답하시죠?”
시무룩해져서 묻자 하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아벨에게도 항상 비슷한 말을 하지만, 그대도 마 찬가지야. 꼭 뭔가를 해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으니까.”
“능력 좋고 완벽한 전하께서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게 지켜주실 테니 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 이죠?”
“그렇지.”
……라고, 일 년 후에 돌아가시는 아버님께서는 또 우쭐한 표정으로 대 답하셨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전하께서는 위험한 곳에 자주 노 출되는 분이시니까……. 막말로 전하 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전 이 꽃다 운 나이에 과부가 되는 거 라고요.”
그래, 일 년 후에는 싱글맘으로 아벨을 키우게 될 예정인걸.
미래를 알고 있는 내 합리적인 의심 에도 하데스는 그저 코웃음 쳤다.
“그런 게 걱정인가?”
“조금…….”
“걱정하지마.”
하데스는 테이블 아래로 마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면서, 잘생긴 얼굴을 갑작스레 바짝 들이밀었다.
깜빽이 안 켜고 들어오는 건 부전자 전인가?
훅 가까워진 얼굴에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씩 웃으며 하데스가 말했다.
“아내를 남겨두고 혼자 죽을 만큼 무책임한 남편은 아니니까.”
***
하데스와 함께한 첫 수업은 결국 아 무 진전 없이 끝났다. 의미 없는 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나는 거의 진이 빠져 있었다.
내내 나를 답답해하던 하데스의 구 박과, 쥐뿔도 쓸모없는 내 존재에 대 한 자기감에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곧 바로 아벨의 방을 찾았다.
막 백작부인과의 예절 수업을 끝냈 다는 아벨은 생각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사실은 고 못된 마귀 같은 백작부인 이 분명 아벨을 괴롭혔을 거라 생각하고 그를 찾은 길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별일은 없었던 것 같아 안심이 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아벨의 표정이 멀쩡하다 해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아벨은 너무나도 자기 상 처를 잘 숨기는 조숙한 어린아이였 고, 백작부인은 틈만 나면 그런 아이를 몰아붙이는 여자였으니까.
아무튼 산책하자는 내 제안에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 아벨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이 지 기분 최고였다.
최애를 보고, 듣고, 만지는 것도 모 자라 그에게 사랑까지 받는 삶! 좋 아!
사실 사랑받는다, 까지는 확신 못 하겠지만…… 망상은 죄가 아니 니까.
“저……. 그런데 공자님, 어디 불편 해요?”
방에서부터 온실 정원까지 걸어 나 오면서, 아벨은 왜인지 불편한 걸음 걸이로 이따금씩 제자리에서 멈추곤 했다.
표정이 영 어두운 것이 무슨 고민이 있는 것도 같고…….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피곤한 거 아니예요? 내가 괜히 산 책하자고 했나 봐요. 맞네. 열심히 수 업 듣느라 피곤했을 거야. 우리 그냥 돌아갈까요? 역시…….”
“영애!”
아벨은 다급한 표정으로 빽 소리 질 렀다. 그는 놀란 나를 보며 힘껏 고개 저었다.
“……싫어요. 저 산책하고 싶어요. 영애랑 같이 있으면 좋단 말이에요. 하나도하나도 안 피곤하니까 걱정하지마세요. 네?”
아벨은 내가 또 들어가자고 할까 봐 걱정되기라도 하는지, 멀어졌던 거리를 금세 좁혀 와서는 손을 꽉 쥐었다.
꼭 길을 잃어봤던 어린아이가 엄마 손을 놓치기 싫은 것처럼 간절해 보 이는 얼굴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뭔가 안쓰럽지만 귀엽고 사랑스러 워.
이런 모순적인 매력덩어리 같으니 라고…….
아벨은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다.
그는 온실 정원에 제법 수두룩하게 핀 꽃과 수목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아세요? 제가 아버지께 영애 가 꽃을 좋아한다 했더니, 정원사들을 시켜서 새 꽃을 저렇게나 많이 심 으신 거예요.”
“아, 그래요?”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시간까지 정 원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 했다.
어쩐지 전부터 정원사들이 분주해 보인다 싶었는데, 하데스의 명령이 있어서였다니 새삼스러웠다.
‘생각했던 거랑은 영 딴판인 성격이 란 말이야.’
하데스는 만나면 만날수록 내 편견을 재고하게 되는 남자였다.
북부의 공작님은 보통 무심하고 차 가운 성격이 아니었나?
레이디를 위해 정원에 꽃을 심어줄 만한 로맨티시스트 스타일은 아니었 던 듯한데.
아니면 혹시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겠지, 이런 건가?
아니지, 일단 ‘내 여자’라는 전제부터 틀렸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나와 하데스는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은근한 계약 관계가 아닐까?
나는 수월한 덕질을 위해, 하데스는 공석인 루버몬트의 안주인 자리에 바 지사장을 세워두기 위해.
그래도 아버지와 예비 어머니의 다 정한 관계를 나름대로 상상하고 있을 아벨에게 구태여 그런 현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놀란 척했다.
“어머나. 그것까진 몰랐는데, 나중에 전하를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해야 겠어요.”
특별히 꽃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 만…….
“헤헤……. 아버지는 정말 다정하 신분이에요. 그리고…… 영애도요.”
아벨은 부끄러운 듯 나를 힐끔 올려 다보곤 금세 눈을 내 렸다.
제가 한 말이 낯 뜨거운지 발끝을 끼적이며 뺨을 붉히는데, 하마터면 덥석 끌어안고 저 통통한 뺨에 내 얼굴을 마구 비비적댈 뻔했다.
진정하자, 아이샤.
아직은…… 아직은 이르다.
“맞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전하는 다정한 분이에요.”
가까스로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 고 대꾸하는데, 정말로 퍽 다정했던 하데스의 얼굴이 떠올라 또 우울해지 고 말았다.
어차피 죽을 운명을 어떻게 하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갈수록 그 게 아니었다.
아벨이 느끼고야 말 죄책감의 무게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 하데스가 죽기 전까지 그는 아벨에게 세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바꿔 말해서, 나를 대신해 아벨이 기꺼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내했다 고 생각해보자.
나는 나 대신 죽은 아벨의 시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너무 끔찍한데.’
어차피 하데스는 죽을 운명이니까, 라고 생각하고 넘기기가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듯했다.
남겨 진 사람의 슬픔과 죄책감.
아마 어린 우리 아벨은 그걸 고스란히 견뎌내야 할 테니까…….
“영애.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조금…… 안좋아요. 어, 제가, 뭔가 실수한 게 있나요?”
어두워진 내 표정 때문인지 아벨이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아! 아녜요. 그런 거 없어요.”
곧바로 대답했지만 아벨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나는 고민하다가, 무슨 말이라 도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음……. 정말 별 거 아니예요. 그 냥 아주 개인적인 걱정이에요.”
“뭔데요? 제게 알려주실 수 없나 요? 영애를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 모 르잖아요.”
아벨은 금세 의욕 넘치는 얼굴이 되 어 말했다.
나는 아벨에게 이것을 털어놓을까 말까 조금 고민했다.
물론 진짜 걱정을 숨기려고 둘러대는 말이지만 이것도 걱정거리는 맞으 니까…….
결국 걷다 말고, 나는 아벨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여전히 하데스의 손수건이 매여 있는 왼쪽 손목을 내보이자 아벨이 갸 웃했다.
“이건 비밀이에요.”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풀자 왼쪽 손 목이 드러났다. 안쪽에 박혀있는 백 색의 핵석이 탁하게 빛났다.
헛, 놀란 아벨이 곧바로 그걸 알아보곤 헛숨을 들이켰다.
“여, 영애!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