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흐읍!”
나는 말라비틀어진 겨울나무 같은 앙상한 왼쪽 손목을 뚫어져라 노려보 았다.
어째 눈이 뜨거워지는 것이 마법 레 이저라도 쏟아지는 게 아닌가 했지만, 능력치가 0에 수렴하는 내게는 당연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눈에 힘 주랬나? 정신을 집중하고 몸 안에 도는 기운을 잡아 느끼 라는 말이야.”
“저기요, 전하. 그게 쉬웠으면 저 여기 없다니까요? 진작 신전에 스카 우트당해 성녀 소리 듣고 있을 거라 고요.”
힐러 능력치 만렙 여주, 데보라처럼 말이지.
아무튼 나는 지금 하데스의 방에 와 있었다.
핵석을 숨기는 법을 단련이라도 해보자던 말은 그냥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었는지, 아침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그의 집사가 나를 찾아왔다.
하데스는 자꾸 크레센타 제국인이 라면 몸 안에 품고 있는 요상한 기운을 뽑아내 보라고 했는데 말이 쉽지, 아무리 힘을 줘 봤자 느껴지는 건 하 나도 없었다.
몇 분 전에는 하도 힘을 줬더니 실 수를 할 뻔했다.
화장실에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은 데 정작 나보다 진지한 하데스에게는 말을 꺼내기도 미안했다.
“아니, 핵석을 숨기지도 못하는 주 제에 무슨 성녀 소리까지 하고 있어? 머릿속에 아주 망상만 가득하군.”
두꺼운 책을 뒤적거리고 있던 하데스가 내 옆에 서며 황당하다는 듯 픽 웃었다.
손목에 예쁘게 박힌 백색 핵석을 보 고 있자니 폭 한숨이 나왔다.
몸 밖에 드러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인데, 이것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다니. 이거야말로 예쁜 쓰레기 아닌가.
“제국인들 3분의 1이 핵석의 힘을 사용하지 못해. 그대가 못난 게 아니 고, 당연한 거야. 제국인의 피가 짙은 이들만 핵석의 이능을 자유자재로 쓰지.”
“전하처럼요?”
“그래, 나처럼.”
하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자의식 과잉이 심할 때부터 눈치챘 지만, 분명 그는 자기 자랑에도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을 것이다.
“그럼 그 대단한 능력 좀 보여주세요. 궁금해.”
한번 물꼬 튼 마당에 제 자랑을 할 시간을 더 줘보기로 했다.
아벨을 아끼는 아버지이니, 미천한 아벨 덕후인 나는 그에게도 충분히 물개 박수 쳐주며 아부해 줄 의향이 있었다.
하데스는 조금 고민하다가, 갑자기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손목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백색의 핵석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리던 그의 검지가 손바닥 아 래쪽을 지그시 누를 때쯤.
“와!”
내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건 마치 겨울철 핫팩이 손끝에 스 치는 느낌이었다.
적색의 코어 쥬얼을 지닌 제국인들 은 화기(火氣)를 다루는데, 이렇게 몸의 온도를 높이는 잔재주도 이능에 포함되는 모양이 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거 완전 손난로잖아요? 전하가 이 추운 북부에서 가벼운 차림으로도 왜 오들오들 안 떠나 했더니 다 이유 가 있었나 봐요.”
신기한 마음에 하데스의 손을 덥석 쥐었다.
검지 하나가 닿을 때와는 달리 정말로 묵직한 손난로 느낌이 었다.
그의 방은 제법 쌀쌀하기도 했고, 뜨끈한 온도가 좋았기에 나는 뜨거워진 그 손을 한참 만지작거 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무심코 만지작거리던 하데스의 손 이 내 손 안에서 휙 빠져나갔다.
올려다보니 그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차, 나는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뜨끈하니 좋아서.”
“더위 탄다며?”
“아하, 그랬나요?”
덕질을 걸린 줄 알고 당황했을 때, 식은땀 흘리는 걸 변명하느라 그런 거 짓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데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더위도 잘 타는데 그런 변명까지 할 필요는 없어. 손잡고 싶으면 말로 해. 스킨십에 인색한 편은 아니니 까.”
“……예?”
그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자의식이 충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하면 지금이라도 미천한 네 손쯤 은 잡아줄 수 있다는 듯한 얼굴.
나는 아버님의 넘쳐흐르는 자기애에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괜찮다니까?”
하데스는 어디 한번 잡아보라는 듯제 큰 손을 내 눈앞에 불쑥 내 밀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 저 었다.
“남녀가 유별한 법인데…….”
“우리가 남남인가? 곧 부부 사이가 될 텐데 뭐, 내외해?”
아니, 대체 이 사람 왜 이래. 꼭 지금 당장 손 안 잡으면 큰일 날 것처럼.
“잡아!”
“됐어요.”
“잡으라니까?!”
“됐다니까요?!”
“지금 아니면 기회 없을 텐데?”
이거 참…….
하데스가 이렇게 당황스럽게 굴 때 마다 내 머 릿속에서는 자수하고 광명 찾자는 오랜 진리의 슬로건이 떠올랐 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참아냈다.
어째서 내가 그의 수치스러움까지 꿋꿋이 지켜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 만…….
“예예, 전하. 그럼 실례할게요.”
나는 오른손으로 내밀어진 그의 왼 손을 아예 깍지 껴 잡았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을 줄은 예상하 지 못했는지 하데스가 눈에 띄게 당 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정작 잡으라고 난리 친 사람 맞는지 모르겠네.
“이제 빨리 이거 숨기는 법이나 알 려 주세요.”
하데스의 손을 잡은 채, 나는 테이블 위에 손목을 보이게 뒤집어놓은 왼팔을 턱짓했다.
그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약간 떨 어진 곳에 있는 의자를 내 옆자리로 쭉 끌어왔다.
깍지 낀 손이 불편할 법한데도 풀지 않고 꼭 잡은 채로.
나란히 앉은 우리는 꼭 비밀 연애하는 고등학생들이 책상 아래에서 몰래 손이라도 잡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엄……. 그러니까…….”
하데스는 자유로운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뭔가 열심히 고민하는 척했지만, 왜인지 신경은 온통 붙잡은 손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모른 척 물었다.
“그런데…… 백속성의 능력은 쓸 수만 있다면 꽤 유용하죠?”
“음, 그렇지. 게다가 백속성을 가진 자들 자체가 희귀하니까.”
에스클리프 남작가는 그 희귀하고 유용한 속성을 타고나서 대대로 잘 유지해온 몇 없는 가문이지만, 놀라 울 정도로 의미가 없었다.
정작 그 능력을 운용할 마력은 타고 나지 못했으므로.
아마 내 대에 이르러 그 무능함은 만개한 듯했다.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도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숨 길 수 있다는 코어 쥬얼을 이렇게 덜 렁덜렁 내놓고 다닐 일 없었겠지.
“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손목 위의 보 석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하데스 가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뭔가 하고 돌아보니 그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애쓸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난 그대의 도움이 필요할 일, 없어. 대체 어떤 대단한 놈이 날 상처 입힐 수 있다고?”
역시 또 혼자서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내가 그림의 떡과도 같은 백속성의 핵석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 하데스가 하고 있을 오해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일 년 후에 있을 아벨의 폭주와 하데스의 죽음을 막을 만한 힘인데도, 전혀 쓸 수가 없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 여주 데보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속성의 적색 핵석이 화기의 이능을 다룬다면, 백속성의 핵석이 다루는 이능은 정화(淨化).
치유의 능력으로도 잘 알려진 백속성이능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대상의 상처나 오염된 정신을 흡수하여 정화하는 것이었다.
아벨은 막강한 능력치를 가졌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핸 디캡이 있었다.
그건 바로 주기적으로 이능들이 부 딪히며 폭주하는 것인데, 그럴 때면 아벨은 정신의 오염과 육체의 붕괴라는 이단 콤보를 함께 겪으며 사경을 헤매곤 했다.
그런 아벨의 상태를 쏘옥 흡수해 정 화해줄 수 있는 고수준의 백속성 능력자는 이 세계관 내에서 단 한명.
여자주인공, 데보라 플로렌스뿐이 었다.
다른 백속성 능력자들은 아벨의 거 대한 힘을 정화할 만큼 강한 마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어찌 흡수까지는 하더라도 그 감당하기 힘든 마력을 정화하지 못하니 아벨을 대신해 개죽음이나 겪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아벨에게 데보라의 존재는 진정제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천생연분.
뭇 독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한 설정이 아닌가.
강하지만 주기적으로 그 강한 힘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하는 남자와, 그를 유일하게 안정시켜줄 수 있는 여 자라니.
확실히, 〈페르소나〉의 작가님은 아벨의 유일한 구원으로 여주 데보라를 설정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이 세계에서 유 일하게 백속성의 이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자인 이유였고, 동시에.
얼마 있지도 않다는 나머지 백속성을 가진 이들이, 지나치게 무능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