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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3화 (13/221)

13화.

“……전하?”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기를 한참.

아이샤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하데스는 멍해 있던 정신을 차렸다.

“아!”

화들짝 놀란 몸이 뒤로 기울며 소란을 피웠다.

아이샤가 하데스의 팔을 덥석 잡았다.

잡아줄 정도로 벌러덩 넘어갈 것까 지는 아니었는데…….

왜인지 붙잡힌 팔뚝 언저리가 불에 덴 듯 뜨거워 하데스는 당황스러웠다.

“쉿.”

그러나 아이샤는 태연했다.

소란 피우지 말라는 것처럼, 미간을 좁힌 채 입술에 검지를 붙인 그녀의 모습에 하데스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잠든 아벨을 내려다봤다.

다행히도 그는 깨지 않고 잘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벨의 모습이 예뻐 죽겠다는 듯 아이샤는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하데스가 한참, 빤히 응시했다.

‘나가요.’

곧 아이샤가 입 모양으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고 나서야 아이샤는 어깨가 제법 무거운 걸 느꼈다. 낯선 옷가지는 하데스가 덮어준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온 아이샤가 하데스의 옷을 돌려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벨이 옆에 있어달라고 떼를 썼 나? 불편했을 텐데, 적당히 거절하고 방으로 돌아가지 그랬어.”

하데스는 한숨 쉬며 아이샤가 내민 옷을 받아들었다.

안 그래도 미안하건만, 계속 미안해 야 할 일뿐인지라…….

그러나 아이샤는 전혀 귀찮은 기색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있어주겠다고 했어요. 하나도 안 불편했어요.”

“…….”

배시시 웃는 아이샤는, 벌써 식당에 서 애거사와 있었던 일은 다 잊은 사람 같았다.

하데스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 백작부인이 그대에게 무 례하게 굴었던 것, 사과하지. 물론 그 대에게 직접 사과하라고도 말해뒀어.”

“음? 그게 왜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 이에요? 그리고 백작부인께도 꼭 사과 들을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기분 이 나쁘지도 않았는 걸요.”

“어떻게 기분이 안 나빠?”

“아, 음…….”

아이샤가 잠시 생각하는 듯 빰을 매 만지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아주 나 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해는 하니까요. 백작부인은 명예를 중시하 시는 분이죠. 원래는 후계자 교육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랬지.”

“만약 백작부인이 공작위에 오르셨 다면 결혼 상대도, 후계자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 고르셨겠죠. 사람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다르고 그건 인정해야 하니까요.”

하데스는 이어지는 아이샤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토록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이런 생각이 가능한가?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

“안타깝게도 이 나라의 제도 때문에 전하께서 공작위를 물려받으셨지만, 그렇다고 백작부인이 가문에 쏟 은 애정을 한순간에 뗄 수는 없을 테 니까요.”

“…….”

“그러니까 이해해요. 저를 오해하 실 만도 했고, 마음에 안 들어 하실 만도 해요.”

“사실이 아니잖아.”

“네. 제가 일부러 전하의 옆자리를 노린 건 아니지만, 주책없이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짐 싸서 북부까지 올라온 건 맞잖아요.”

담백한 고백에 순간 얼굴이 뜨거워진 하데스가, 손등을 들어 뺨을 덮곤 시선을 비꼈다.

“아무튼, 앞으론 그런 소리 그냥 듣 고만 있지 마. 그대가 사과할 일도 아니었고.”

“음, 뭐, 일단은 알겠어요.”

“그리고, 뭐라고 했었지? 내가 우리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해도 납득하겠다고 했던가?”

문득 아이샤의 발언을 떠올린 하데스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물었다.

“그럴 일, 절대 없어. 한 입 갖고 두말하는 사내는 아니라고 했잖나?”

단호한 말은, 혹시나 결혼이 엎어지 면 어떨지 걱정하는 아이샤를 안심시 키려는 의도였지만…….

‘내가 결혼하고 싶어 몸이 단 줄 아 는구나. 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 긴 한데…….’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기분에 아이샤는 멋쩍어졌다.

“그러니까 그대는 조금 더 막무가 내로 굴어도 좋아.”

“네?”

“그대는 루버몬트 공작부인이 될 거고, 그러면 황족을 제외하고는 가 장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되지. 그대 에게 감히 무례하게 구는 자들이 있 다면 참거나 보아주지 마. 너그러운 게 마냥 능사는 아니 니까.”

“그렇지만 저는 아직 공작부인이 아닌 걸요.”

“아, 젠장. 답답해 죽겠군. 난 그대 에게 한 청혼을 절……!”

아이샤의 어깨를 덥석 잡은 하데스 가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잔뜩 힘주어 말했다.

“……대! 무를 생각 없다니까?!”

어차피 공작부인이 될 테니, 지금부 터 공작부인처럼 굴어도 좋다는 얘기였다.

아이샤는 진지하게 뜬 하데스의 붉 은 눈을 마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 뜨렸다.

“네, 그럴게요.”

벌써부터 공작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라니…….

아까처럼 가스펠 백작부인에게 날 선 독설을 얻어맞았을 때, 참지 말고 같이 싸우기라도 하란 소린가.

아이샤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대인의 기준에서 보기에, 친정 가 문에 집착하는 애거사의 마음이 정말 이해가 되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네, 하고 대답은 했지만, 그 녀는 정말 자신이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

이튿날, 아벨은 제법 결연한 표정으 로 애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했던 대로 애거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 었다.

애거사는 정확한 시간에, 일 분도 늦지 않고 아벨의 방을 찾아왔다.

주름이 깊게 팬 얼굴과 깐깐해 보이는 표정은 매번 아벨을 주눅 들게 했다.

아벨이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셨어요, 백작부인.”

“앉으세요.”

애거사는 아벨의 인사를 무시하며 뒤따라온 제 하녀들에게 턱짓했다.

품 안 가득 두꺼운 책들을 산더미처럼 끌고 온 두 하녀가 책상 위로 그 것들을 내려두었다.

하녀들을 내보내고 애거사가 말했다.

“공자가 예법에 너무나도 무지한 듯하여, 첫 수업은 예절 교육으로 정 했습니다. 오늘 이 책을 전부 필사하 고 시험을 볼 생각이에요.”

“……네.”

고분고분한 아벨의 대답에 애거사의심이기가 뒤틀렸다.

작은 아이는 매번 이랬다. 다행스럽 게도 염치는 아는 짐승인지, 제 존재 가 하데스에게 얼마나 큰 짐인지는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어제 아이샤를 옹호하며 소리치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것이, 못마땅 해 죽겠는 것을 옹호하는 꼴이란.

아벨은 아이샤가 곧, 제 어머니 라도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애거사가 픽 코웃음 쳤다.

“공자는 에스클리프 영애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요?”

“저……. 부인.”

아이샤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벨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긴장했는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물고, 아벨은 애거사를 똑바 로 쳐다보았다.

“부탁이 있어요.”

“무엇인가요?”

“에, 에스클리프 영애를…… 나쁘 게 대하지 말아주세요.”

“하……. 뭐라고요?”

애거사는 황당했다.

“저……. 그, 그냥 드리는 부탁은 아니예요. 제가 부인께 열심히, 열심 히 교육도 받고…… 시,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문득 울컥해지는 마음에 눈물이 나 올 뻔했지만 아벨은 꾹 참았다.

아이샤는 북부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샤를 못마땅해하는 듯한 애거사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녀를 함부로 대한다면?

자신은 익숙해서 견디기 어렵지 않 다지만, 아이샤는 아니다.

귀족으로 사랑받고 자랐을 그녀는 애거사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결 국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테다.

허벅지 위로 얹은 두 주먹을 꼭 쥐 며 아벨은 눈물을 참고 말했다.

“영애에게는 잘 대해주시면 안 되 나요? 제가 더, 말 잘 들을게요. 아버지 말도, 부인 말도……. 그리고 어제처럼 버릇없게 말하지도 않을게요. 죄송합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아벨을 바라보는 애거사의 표정이 묘했다.

“잘 대해달라…….”

“…….”

“어제처럼 영애에게 나쁜 말을 하 지 말아달라는 건가요? 공자가 내게 어제, 영애에게 ‘나쁜 말’을 했다며 무례하게 소리쳤지요?”

“죄송, 죄송합니다.”

“우리 착하던 공자가, 어른들이 얘 기하는 데에 건방지게 끼어들어 소리 지르는 버릇은 어디서 보고 배웠는 지……. 난 어제 놀라 한숨도 자질 못했답니다. 아마 공작 전하를 보고 배 운 모양이지요.”

“아, 아니예요! 부인! 아니예요! 아버지는 그, 그러지 않아요. 제가, 제 가 나쁜…….”

아벨은 계속 눈물이 날 것 같은 기 분을 꾹 참고 말했다.

“……나쁜 아이예요.”

“그래요. 어제 공자님에게서는 예 의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지요. 루버몬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 었으면 좋겠다고, 제가 전부터 누누 이 말씀드렸는데도.”

애거사는 표정 없는 얼굴로 뻔히 아벨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 다시는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할 생각이 들지 않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자랐지요.”

“네…….”

“전하께서는 공자를 애지중지하느 라, 공자의 예의 없음도 전혀 지적하 지 않고 있지요?”

애거사의 질문에 아벨은 잠시 하데스를 떠올렸다.

그녀의 말이 모두 맞다.

뒷골목에서 곰팡이 핀 뺑이나 주워 먹으며 거지처럼 연명해왔던 자신이 귀족으로 몇 년 살았다고 크게 달라 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데스는 딱히 자신을 가 르치려 하지 않았고, 바보처럼 굴어 도 화내는 법 없었다.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벨이 대답하자마자 애거사는 자신의 하녀를 불렀다.

따로 무언가를 지시한 것도 아닌데 하녀는 가느다란 회초리 하나를 가져와 애거사에게 건넸다.

“공자의 부탁은 진지하게 생각해보 도록 하지요. 내가 에스클리프 영애를 예쁘게 보길 원한다면, 공자가 노 력 하세요.”

“네, 네. 그럴게요. 그럴게요.”

“벌을 받는 것에는 이의 없나요? 공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체벌은 없을 거예요. 교육받고 싶어 하지도 않는 공자에게 벌을 준 일로, 전하께서 나를 나무라시면 곤란하니.”

빙긋 웃으며 말하는 애거사에, 아벨 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고개 저었다.

“받을게요. 잘못……했으니까.”

“좋습니다.”

애거사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회초리로 각진 책상 위를 툭툭 두 드렸다.

“신발을 벗고, 이 위에 올라가서 무 릎 꿇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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