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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2화 (12/221)

12화.

아벨의 말에 식당에는 다시금 정적 이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백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벨이 자신에게 한마디 했 다는 게 몹시 아니꼬운 모양인지, 고 양이를 문 쥐를 본 표정으로 어버버거렸다.

“어디서 근본도 없는…….”

“부인!”

이번에는 나였다.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백작부인이 흠칫 놀랐다.

“머무시는 동안 또 뵙겠습니다. 식 사 맛있게 하세요. 가요, 공자님.”

웬만한 수준이면 모르겠는데 이런 독설을 어린 아벨에게 고스란히 듣게 할 순 없었다.

나는 뭐라 구시렁거리는 백작부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내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아벨을 끌어 급히 식당을 나섰다.

***

가스펠 백작부인, 애거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테이블 위에 있는 물잔을 기울였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 어가자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요즘 정신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결혼하게 되었다며 가신들에게 통보해 온 하데스는, 거의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이미 혼인 문서까지 보냈으니 번복 은 못 한다고 못을 박았다.

상대는 초라한 남작령의 시골 촌뜨 기 영애.

수행인들도 제대로 고용할 여유가 없는 가난뱅이가 맨몸으로 북부까지 올라왔다는데 그 의도가 빤히 보여 애거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 밀었다.

“제정신인가? 사람이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 못 해? 백작은 이런 소릴 하는데 말리지도 않고 듣고만 있 나?”

“글쎄요, 전하. 저는 아내가 하는 일에 잘 따르자는 주의라.”

메이슨이 모르는 척 코끝을 긁적이 며 발을 뺐다.

이를 갈며 하데스가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애거사, 에스클리프 영애에게 정식으로 사과해. 누님이라도 이건 도저히 못 넘어가 주겠 군.”

애거사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데스를 응시했다.

루버몬트를 걱정 없이 맡기고 떠나 올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고 강단있는 동생이었다.

제국의 방패, 북부의 수호령.

가문에 새겨진 무거운 이름을 충분 히 감당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었다.

빌어먹을 여자 문제로 제 속을 썩이 지만 않는다면.

“천것이랑 조심성 없게 뒹굴어 애까지 만들어 오더니, 이번에는 어디 서 거지를 데려와 신부라고 내 앞에 앉혀놔? 네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내라면 이럴 수가 있느냐? 우리 가문 은 조금도 생각을 안 해?”

“입 조심해. 누님이라고 내 인생에 관여할 자격 없어. 루버몬트에 안주 인을 누굴 들이든 그건 더더욱 신경 쓸 필요 없고. 아이샤에게 사과나 해.”

애거사는 기가 찼다.

사과를 하라니?

아벨을 싸고돌 때보다 더 심한 것 이, 동생은 여자 치마폭에 싸여 눈이 아주 멀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이샤를 떠올렸다.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시골 촌뜨기가 어떻게 하데스를 꾀어냈나 했더니 얼굴이 제법 반반했다.

애거사는 출세를 위해 치마를 걷고 사내의 침대에 오르길 망설이지 않는 여자들을 혐오했다. 울컥 토기가 밀 려왔다.

“부족한 거 하나 없는 놈이, 하필 계집질하는 버릇 때문에…….”

악문 이가 파르르 떨렸다.

하데스 또한 애거사의 독설에는 익 숙했기에, 전혀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사실이 아니니 발끈할 이유도 없 었다.

그는 그저 냉정하게 말하고, 백작내외를 내버려둔 뒤 홀연히 식당을 나섰다.

“내 아들이고, 내 부인이 될 여자 야.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면 나 또한 더 이상 누님 대우해줄 생각 없어. 경 고는 마지막이야.”

***

나는 아벨을 방까지 직접 데려다주 었다.

문 앞에서 헤어지려는데 아벨이 내 손을 꽉 불잡았다.

“가지 마세요.”

“네?”

“가지 마세요, 제발. 백작부인이 또 나쁜 소리를 하면 제가, 제가 지켜드 릴게요. 하지 말라고 말할게요. 그러 니까…….”

지금까지 야무지게 참아왔던 눈물을, 아벨은 기어코 보이고 말았다.

그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연신 닦아내며 웅얼거렸다.

와중에도 내가 가버릴까 걱정되는 지 젖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쥐었다 놓길 여러 번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작중에서는 갖은 구박에도 한 마디 반항 없었던 아벨이다.

그런 아벨이 얼마나 큰 용기를 내어 나를 감싸주었는지 알고 있었다.

아직 친해질 시간도 별로 없었던 우 린데, 무슨 유대감에 나를 이렇게까 지 생각해주는지…….

“공자님.”

나는 아벨과 눈높이를 맞추고 쭈그 려 앉았다.

우느라 달아오른 뺨과 붉어진 눈시 울로 훌쩍거리는 아벨은, 안쓰러워보였지만 귀여웠다.

미처 못 닦은 눈물이 흐른 빰을 쓸 어주면서 내가 말했다.

“안 가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그치만…… 그치만……. 상처, 받 으셨잖아요.”

백작부인의 폭언에 내가 적잖이 충 격 받았을 거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글쎄,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그보 다는 아벨이 더 걱정되었다.

백작부인과 만날 때마다 이렇게 험 한독설을 들어왔다면…….

나보다 훨씬 어린 아벨이 받았을 상 처가 가늠이 안 돼서, 조금 화가 났다.

이게…… 나중에 갱생한다고 한들 용서가 되는 종류인가?

아이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다가 나 중에라도 죄를 뉘우치면 그걸로 되는 거야?

조금 헷갈렸다. 백작부인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저는 괜찮아요. 공자님은? 백작부인이 매번 이렇게 말했죠?”

문득 아벨이 안쓰러워져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아벨은 고개를 크게 한 번 가로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전 아무렇지도 않 아요. 그런데 영애는…….”

“으음. 저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상 처 받아서 도망갈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아직 공자님이랑 별로 친해지지 도 못했는데 내가 어딜 가요.”

“……정말요?”

“웅, 정말.”

“영애!”

“어머!”

아벨이, 갑자기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왔다.

쪼그려 앉은 나를 덥석 끌어안는 아벨 때문에 한 번 휘청했다가 겨우 중 심을 잡았다.

세상에…….

이게 무슨.

“고, 공자님?”

작고 소중한 몸을 마주 끌어안으려는 팔이 드릉드릉 움직이려 했는데, 아벨이 더 놀라 금세 몸을 떼었다.

“……죄, 죄, 죄송해요. 제가 또 무 례했어요.”

“아니예요!”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물쭈물 서 있는 아벨을 살포시 끌 어안자 그도 약간 망설이다가 나를 마주 안았다.

마음이 울컥했다.

“영애는 제가 밉지 않아요?”

밉지 않냐니? 이게 미움 받을 짓이 라곤 하나도 한 적 없는 조숙한 어린아이 입에서 나올 말인가?

“왜 미워요? 공자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예요. 공자님처럼 사랑스러운 어린이는 처음 봤는 걸요. 안 미워요, 좋아요, 예뻐요.”

“……감사합니다.”

아벨은 울먹이며 나를 더 꽉 끌어안 았다.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그의 유년시절은 퍽 불우했다. ’라는 문장 한 줄로 대강 서술되었던 그 시간들의심각성을.

소설 속에서는 아벨의 어린 시절이 비교적 길게 다루어지지 않았기에 몰 랐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소설처럼 흐르지 않는다.

아벨은 무시당하고 구박받는 암담 한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겪어내야 할 테다.

백작부인의 폭언에 적응한 듯 퍽 익 숙해 보이는 아벨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내가 이곳에서 아벨을 위해 해줄 일 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식사도 못 했는데, 배는 안 고파요?”

아벨은 내 목을 더 꽉 끌어안으며 고개 저었다.

펑펑 운 데다가 긴장이 풀려 그런지 축 늘어진 몸이 피로해 보였다.

작은 몸을 다독여주며 내가 말했다.

“그럼 자고 일어나서 먹기로 해요. 들어가 봐요.”

“여, 영애!”

아벨은 일어나려는 나를 덥석 잡고 달라붙어선, 울상 지은 얼굴로 올려 다보았다.

“정말…… 어디, 안가는 거죠?”

아, 마음 아파라.

“아유, 정말로 어디 안 가요. 정 그 렇게 걱정되면, 공자님이 잠들 때까 지 옆에 있어드릴까요?”

코 자는 소중한 아벨의 모습을 보고 싶은 사심을 담아 묻자, 그는 한껏 밝 아진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

하데스는 당장 아이샤의 얼굴을 보 기가 미안했다.

면구한 마음에 변명을 준비하고 찾 아갔지만 그녀는 방에 없었다.

아벨과 나갔던 것이 뒤늦게 떠올라 그의 방을 찾아가보니, 아이샤는 생 각대로 거기 있었다.

달빛이 어스름히 비쳐 들어오는 침 대 위, 세상모르고 잠든 아벨과 그 곁의 아이샤.

잠든 아벨의 침대 옆에 의자를 놓 고,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앉아 눈을 붙이는 아이샤를 본 순간.

하데스는 왜인지 약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영애.”

불편한 자세로도 곤히 잠들었는지 아이샤는 답이 없었다.

난처한 듯 눈썹 끝을 문지르던 하데스가 겉옷을 벗어 조심스럽게 아이샤의 어깨를 덮었다.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문득 식당에서 애거사의 얼굴을 똑 바로 바라보며 말하던 아이샤가 떠올 라 얼굴이 화끈해졌다.

자기를 보고 싶어서 북부까지 올라왔다는 걸 알고야 있었지만…….

푹 한숨 쉰 하데스가 가까이 놓여있 던 빈 의자를 조용히 끌어와 아이샤의 옆에 앉았다.

엎드린 채 색색 숨을 고르며 자는 모습이 열 살짜리 아벨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데스가 픽 웃음 지었다.

애거사에게 모진 소리를 들었어도 마냥 고개를 조아리던 모습은 퍽 안 타까뭤다.

아마 애거사와 원만히 지내야 자신에게 걱정 끼치지 않을 거라 여겨서, 상처받았음에도 꼭 참았을 게 분명 했다.

어찌 보면 조금 바보 같은 여자다.

이렇게 아벨을 챙겨주는 것도 그렇 고…….

침대 위에 턱을 괴고 앉은 하데스가 무심코 아이샤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게다가 정말 이상한 여자.

부끄러운 것도 없는지 그런 말을 잘 도…….

되레 부끄러운 건 하데스였다. 괜히 코끝을 홈치는 손까지 빨개져 있었다.

“으음…….”

그때였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리는 듯하 더니, 작은 신음과 함께 아이샤가 눈을 떴다.

색이 옅은 벽안은 꼭 보석처럼 예뻐 서 눈을 흘렸다.

하데스는 시선을 뺏긴 채 한참, 달 빛을 받아 빛나는 그것을 들여다봤다.

두 사람의 얼굴이, 코끝이 닿을 만 큼 가까운 거리라는 것도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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