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애거사, 미쳤나?”
“글쎄요, 전하. 미친 게 저인지 전하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요.”
하데스가 끼어들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백작부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받 아쳤다.
“근본도 족보도 없는 것들을 들여 루버몬트의 피를 더럽히려 하시니.”
“하……. 역시 작정하고 왔군. 입다물고 있겠다는 말을 믿은 내가 바보였어. 영애, 일어나. 식사는 방에서 따로 하는 게 좋겠어.”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하데스가 서 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내게 싫은 소리 안 하겠다는 조건으로 자리를 마련한 듯한데, 이건 믿은 하데스가 바보였다. 제 누나 성질올 모르 지도 않으면서.
애거사 가스펠.
깜빡이도 없이 들어온 칼을 문 독설을 곱씹고 있으려니, 어렴풋이 그녀 가 어떤 여자였는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벨에게 눈치 주는 건 기본이었고 독설은 옵션.
전부 루버몬트를 향한 지극한 애정 과 집착에서 비롯되었다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가스펠 백작부인은 작중에서 하데스가 유일하게 못 이겨먹는 캐릭터 로,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그녀였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아벨도 후에 하데스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백작부인 앞에서 떳떳 하지 못했고.
다시 말해 이 자리의 1인자가 바로 백작부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듯한 하데스는 안중에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가진 거라곤 사내를 품을 몸뿐이 니 작정하고 천박하게 굴었던 모양이 지요. 용케도 전하를 휘두른 솜씨가 참으로 궁금하군요.”
쾅—!
결국 하데스가 주먹을 들어 테이블을 크게 한 번 내려쳤다.
아벨도, 나도 화들짝 놀라 움찔했다. 태연한 건 백작부인뿐이었다.
하데스는 악문 턱을 부들거리며 백작부인을 한참 노려보다가, 내게 말 했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지, 영애. 아벨, 너도 일어나라. 여기 더 있을 필 요 없어.”
아벨은 어찌할 바 모르고 우물쭈물 하며 나와 하데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자, 침착하자. 여기서 예비 공작부인의 위치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생각 해봐야 한다.
하데스가 시키는 대로 이 자리를 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 결방안이 아니었다.
그는 가스펠 백작부인이 자신의 친 누나이고, 루버몬트 가문에 헌신했다는 걸 아는 이상 영원히 져줄 수밖에 없었다.
백작부인도 그걸 알고 있기에 이렇 게 막 나오는 것이고.
다시 말해 백작부인이 이 공작가에 쏟아 붓는 입김은 사그라질 일 없다는 것이다. 소설의 종막까지 쭉 그랬다.
나름대로 중재를 해줄 수 있는 하데스까지 죽고 나면, 아벨은 물론이고 나 또한 꽤 오래 그녀에게 시달려야 할 테다.
그야말로 악몽이 따로 없다. 끝나지 않는 시월드라니.
그래,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사람이었고, 나는 평생 가는 시집살 이는 절대 사양이었다.
“전하, 진정하세요.”
나는 우선 하데스를 말리고 생각했다.
독설 만렙이지만 끝까지 악역으로 남지는 않는, 백작부인은 상당히 모 순적인 캐릭터였다.
하데스가 죽은 이후 크나큰 상심에 아벨에게 더 못되게 대하기는 하지만, 종국에는 다정한 어머니처럼 굴 어주긴 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온갖 모진 구박을 받으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아벨의 우직함에 마음을 열었겠지만…….
아벨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뭔 가.
호감도를 최대치까지 올려 엔딩 보는 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나는 초연 해지기로 했다.
“부인께서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대화로 풀어야 하는 게 맞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런 돼먹지 않은 소리 듣고 있을 필요, 없어. 어 서 방으로 가.”
나는 하데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저 어주곤, 백작부인을 향해 웃었다.
사실 웃는 얼굴과 달리 등에서는 식 은땀이 줄줄 흘렀다.
표독스러운 시어머니를 마주한 심 약한 며느리가 된 기분이었다.
“존경하는 백작부인과 오해로 척을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어떤 부분 이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그걸 굳이 물어야 한다니 생각보 다 머리가 안좋은 모양이군요. 에스클리프 영애, 사람은 각자 분수에 맞 게 살 줄 알아야 한답니다. 몸에 맞지 않는 것을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에요.”
백작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건 질 거 하나 없는 독설뿐이었다.
그러나 역시 배운 게 많은 귀족이라 그녀는 그런 독설을 내뱉으면서도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표정과 말투를 고수했다.
참으로 우아한 척 사람을 깔아뭉개는 스킬.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백작부인이 물었다.
“영애는, 영애가 정말로 루버몬트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요?”
“아뇨, 저는 저를 잘 압니다. 저는 결단코 루버몬트의 이름에 욕심낸 적 없어요. 부인의 오해십니다.”
백작부인은 팔짱을 낀 채 픽 코웃음 쳤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부인이 저를 오해하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 니다만, 정말아닙니다.”
나는 최대한 어디서 난데없이 굴러 온 여우 같은 며느리처럼 보이지 않 기 위해 신중하게 굴었다.
“사실 부인께서 루버몬트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래서 루버몬트가 지금처럼 명망 있는 가문이 되었겠지요. 부인께서 애써 가꾸신 가문의 격에 맞는 안주인을 원하시는 마음, 저도 충분히 이해한 답니다.”
내 말에 백작부인은 고개를 기울이 며 다시 픽 웃었다.
일단은 들어볼 테니 어디 더 지껄여 보라는 표정 같았다.
“제가 생각해도 공작부인의 자리는 과분합니다. 여러모로 제 가문은 이 곳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당장 전하께서 없었던 일로 하자 하셔도, 오히려 전 기쁘게 납득할 거랍니다.”
……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이 결혼에서 하데스도 얻어낼 게 있다면 중간에서 알아서 잘 해주겠지?
일단은 욕심 없는 여자처럼 보이는 게 중요했다. 백작부인과 척을 져 내게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
뭐, 그리고 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 내가 하고 싶은 건 하데스와의 부부놀이가 아니라 아벨 덕질이니까.
“제가 북부까지 올라온 건, 그런 불 순한 의도가 결코 아니었어요. 그러 니 그런 오해로 언짢으셨다면 부디 마음을 푸셔요.”
“불순한 의도가 아니었다? 그러면혼기가 찬 나이의 귀족 영애가, 미혼 공작의 영지에 무엇 때문에 찾아오려 고 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조곤조곤 대꾸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백작부인의 웃는 미간에 살 짝 주름이 잡혔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나는 가슴 위에 한 손을 살포시 얹 고, 마주 보고 앉은 백작 내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옆에는 당장이라도 끼어들 것처럼 씩씩대는 하데스도 보였는데, 웬일인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그 또한 이어질 말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벨이.
“하…….”
백작부인은 황당한 듯 헛웃음을 터 뜨리며 한숨지었다.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 라보고 있는 하데스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백작부인께서 공작 전하와 친정 가문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잘 압니다. 부인의 소문을 듣고 얼마 나 대단하신분이라고 생각했던지요. 마음속으로는 깊이 존경하고 있었습 니다. 저는 존경하는 부인과 낯 붉히는 일 없이 지내고 싶어요. 부디 오해 와 노여움을 푸셔요.”
충실한 개처럼 숙이고 들어가는 내 말에도 백작부인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마치 공략 불가 캐릭터를 공략하는 느낌.
대체 아벨은 어떻게 백작부인의 마음을 열었는지 모를 일이다.
“제게 죄가 있다면…….”
아벨을 덕질하려던 죄뿐.
“……보고 싶어 사무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북부행을 결정하여 부인을 오해하게 만든 것이겠지요. 용 서하세요.”
물론 사무치도록 보고 싶은 사람은 공작 전하가 아니 었지만요…….
문득 돌아본 옆에 아벨이 보였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신나게 얻어맞는 내가 안쓰러운지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이었다.
테이블 밑으로 위로하듯 작은 손이 뻗어왔다.
오, 이런. 이렇게 구박받는 것도 나 쁘지 않잖아.
사실 미천한 덕후는 아벨을 위해서 라면 이런 독설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그나마 날 때리는 동안에는 아벨을 구박할 생각 못 할 테니 그것만으로 도 안심이었다.
슬쩍 백작부인의 눈치를 보니 이년 이 개수작을 부리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조금 멋쩍어졌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마 내가 퍽 아니꼬울 테다.
마음에 안 드는 아들의 여자 친구가 돈 봉투를 던져줘도 나가떨어질 기미 없이 치맛자락 붙들고 늘어지는 느낌 이 랄까.
그녀는 금세 표정을 부드럽게 하곤 말했다.
“영애가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 니, 그러면 내가 말이 심했군요. 허면 공작부인의 자리가 아니라도 공작 전하의 곁에는 충분히 머물 수 있을 텐 데요. 확실흐」, 어디서 근본 없는 여자늘 들여오는 것보다는 그래도 귀족이 라고치레는 할 줄 아는 쪽이 정부로 두어도 탈 없을 테니.”
와, 이건 정말 세다.
백작부인의 독설이 정점을 찍었다.
공작부인 자리에 관심 없는 건 사실이었기에 연이은 독설에도 별 타격감 없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좀 놀라고 말았다.
하데스의 생각도 나와 똑같은지, 표 정이 사라져 있었다.
그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진심으로 화가 난 게 느껴졌다.
그는 나를 힘으로라도 데리고 식당을 나서 려는지 테이블을 돌아왔다.
눈치챈 백작부인이 재빨리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왜요? 그것은 또 싫은 모양이지 요?”
“애거사.”
내 옆으로 와 팔을 잡은 하데스가 백작부인을 불렀다.
어금니를 꽉 깨문 채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하는 모습에 오금이 달 달 떨릴 정도였으나 백작부인은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북부까지 와…….”
“애거사!”
하데스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나는 아벨의 귀를 막았다.
나야 조금 기분 나쁘고 말면 될 일이지만, 어린 아벨이 듣기에 심한 소리가 나온다면 그건 조금 곤란했다.
일단 일보 후퇴다.
보스급 캐릭터를 첫 술에 공략하려 고 했던 게 패착이었음을 인정하며.
“그, 그, 그만하세요……!”
하나 아벨을 데리고 황급히 식당을 나서려던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내 치맛자락을 꽉 붙든 아벨이 겨우 눈물을 삼키며 소리치고 있었다.
“여, 영애에게 그, 그렇게 나쁜 말 은…… 제발 그만하세요. 대, 대신 저 에게 하세요, 부인. 영애는, 영애는 나쁜, 나쁜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