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영애, 그대, 따위로 나를 칭하던 하데스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 었다.
하데스는 내 왼쪽 손목을 들어 가볍 게 쥐었다. 그가 엄지로 딱딱한 손목 안쪽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대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물론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이제국에서 감히 날 상처 입힐 수 있는 놈은 없다고 봐도 좋아.”
“…….”
“그건 아벨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이고, 녀석을 지키는 건 내 의무지. 아벨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놈들은 전부, 접근하기도 전에 찾아내 없애 버 릴 거야. 그리고.”
하데스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이었다.
“내 아내가 될 그대를 지키는 것도 내 의무야. 그대에게 도움받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도록 내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 지.”
냉기 폴폴 홑날려야 정상일 북부 공작 전하의 어울리지 않는 낯 뜨거운 진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그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충 분히 강해. 그러니까 내가 다치거나 죽을까 걱정하는 건, 가장 쓸데없는 일이란 얘기야.”
……라고, 일 년 후에 돌아가시는 아벨의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안타깝다.
만약 각성한 여주 데보라가 일 년 후에 있어준다면, 아벨의 폭주도 막을 수 있을 테고 하데스가 죽을 일도 없을 텐데.
아벨보다 네 살이 어리니 지금쯤 고 작 여섯 살 인생을 살고 있을 데보라는, 이 부자의 구원이 되어주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그러니까 그대는, 그대 자신만 걱 정하면 돼.”
그날 하데스와의 대화로 나는, 아벨 이 왜 소설이 끝나갈 때까지 내내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 단번에 이해할수 있었다.
하데스 루버몬트.
그는 자의식 과잉만 빼면 정말이지 멋진 남자였다.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이런 아버지를 자신이 죽음으로 몰 아넣었다는 죄책감은 어느 정도였을 까.
아벨의심정을 감히 가늠해볼 수도 없었다.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아서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전 루버몬트에 어울리는 인재는 아니예요. 」
「만약 제가 조금 더 쓸모 있는 인재였다면, 전하나 아벨 공자님이 어디서 다치고 들어왔을 때 미미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
아이샤가 돌아간 직후로도, 하데스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떠올렸다.
아이샤는 예상했던 대로, 자신이 루버몬트 공작가의 안주인 자리에 어울 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집요하게 뒤를 따라다니면서 도 공작부인이 될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하데스는, 차라리 그녀가 어느 정도 탐욕이 있는 성격이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그녀가 곧 얻게 될 공작부인의 작위를 만족스러워한다든가, 공작가의 재산으로 잔뜩 사치할 꿈이라 도 꾸고 있다든가.
하나 아이샤가 자신의 뒤를 밟은 만큼, 똑같이 그녀에 대해서도 오랜 시 간 조사해왔던 하데스다.
사치하기는커녕 모 귀족에게 후원 받았던 제 몫의 재산을 차곡차곡 모 아 값비싼 보검을 구해 보내는가 하 면,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지 일절 들이대는 일도 없는 여자였다.
그래서인지 하데스는 아이샤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느꼈다.
사생아로 알려진 아벨을 스스럼없 이 대하면서 기꺼이 받아주려는 것 자체가, 보통의 귀족 영애로서는 도 저히 내릴 수 없는 대단한 결단이었을 테니까.
게다가 제국 최고의 능력자라고 일 컬어지는, 어디 다치거나 죽을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운 자신을, 힘이라곤 쥐뿔도 없어 보이는 주제에 염려하는 모습이라니.
‘대체 내 어디에 반했던 거지?’
항상 말하지만 진딧물처럼 불어 따라다니는 여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데스가 심드렁하게 굴었 던 건, 진중한 애정 따위가 전혀 느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아이샤는 좀 많이 달랐다. 멀 리서 지켜만 봐도 소름 돋을 정도로 깊은 참사랑에 절로 몸이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의자에 깊이 등을 묻은 하데스가 찬 손으로 눈을 덮으며 열을 식혔다.
문득, 얼굴이 뜨거워진 탓이었다.
***
저녁 식사가 준비된 식당에 도착했을 때, 나는 혼자 앉아있던 아벨을 만 났다.
식당에서 아벨을 만나는 건 처음이 었다. 나는 비어있는 자리들을 힐끔거리다가 모른 척 아벨의 옆을 차지 하고 앉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벨이 반겨주었다.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네?! 아니, 저는 영광이죠…….”
아벨은 수줍게 빰을 붉히며 웅얼거 렸다.
미천한 내가 옆자리에 앉음이 최애의 영광이 되다니.
전생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두 번째 삶, 좋아.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 보이나요? 내 착각인가?”
물으면서도 나는 아벨에게 어떤 대 단한 걱정이 있다고 확신했다.
최애의 표정 변화 하나 눈치 못 챌 내가 아니다.
“가스펠 백작부인이오시기로 했잖아요. 제가 백작부인께 교육을 받기로 했는데, 조금 걱정이 돼요. 아 무래도 전 많이 부족하니까…….”
“음,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공자 님만큼 완벽한 어린이는 없을 거예요.”
“네에?! 여, 영애……. 전혀 아니예요. 어제 산책할 때도 그렇고, 왜 영애가 저를 그렇게까지 좋게 봐주시는 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버지께 폐만 끼치고 있는 걸요.”
시무룩해진 아벨의 표정을 보며 나는 착잡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주변에서 얼마나 아벨을 구박해대는지 그의 자존감은 마치 내 능력치처럼 0에 수렴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곧 이 자리에 나타날 가스펠 백작부인이나, 그의 남편인 가스펠백작 또한 어린 아벨에게 수도 없이 눈치 주었을 것이다.
이 어린 아이가 벌써부터 벌벌 떨고 있는 걸 보면 말 다 했지.
아벨이 안쓰러워진 나는 순간적으 로 테이블 아래에서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흠칫한 아벨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벨은 한참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 라보다가, 곧 크게 한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꼼지락거리던 작은 손이 힘주어 내손을 꽉 붙들었다.
긴장했는지 땀으로 촉촉해진 작은 손은, 꼭 내 손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꽉 얽어 쥐었다.
“영애. 저는요. 영애가 꼭…….”
살풋 웃으며 아벨이 말했다.
“아버지와 결혼하셨으면 좋겠어요.”
“네?”
“사실 저는 아버지의 자리에 하나 도 관심 없어요. 만약 나중에 아버지 와 영애 사이에서 제 동생이 태어난 다면…….”
뭐가 태어나?
당황스러운 주제였지만, 진지해 보 이는 아벨의 말을 끊을 수가 없어서 얌전히 경청했다.
“그 동생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달 라고 꼭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그 러니까 떠나지 마시고, 여기 계속 있 어주세요.”
아벨은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 렇게 말했다.
“저 때문에 아버지가 평생 혼자 사 시게 된다면 슬플 거예요. 제가 영애 에게 부담을 드리고 있다면 죄송하지만, 영애처럼 상냥하고 다정하고 아 름다운 분이 아버지 곁에 있어주신다 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러니까 아벨의 ‘계속 있어주세요. ’라는 말의 요는, 내가 좋아서라기 보다 홀아비로 늙어 죽을 하데스가 걱정된다는 거였지만.
“……그래요.”
아벨 덕후인 나는 그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뭐, 하데스에게 질투가 나지 않는 건 아니 었지만…… 둘의 유대가 그런 알량한 감정을 들이밀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내 대답에 기분 좋아진 아벨의 싱글 벙글한 얼굴을 마주하고 웃고 있길 한참.
몇 분 지나지 않아 식당으로 낯선 얼굴들이 들어왔다.
키가 훤칠하고 자세가 곧은 노장 하 나와, 세월의 흔적이 깊은 얼굴에서 부터 꼬장꼬장함이 잔뜩 묻어나는 중 년 여성. 두 사람 뒤로는 하데스가 들 어섰다.
내가 일어서려고 하기가 무섭게 옆에 앉아있던 아벨이 그들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식당을 쩌렁쩌렁 울리는 아벨의 목소리에 나는 놀랐다.
마치 막 입대한 이등병만큼이나 군 기가 쫙 들어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가스펠 백작과 백작 부인은 아벨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에 앉았다.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 나는 하데스를 비롯한 백작 내외가 전부 착 석하고 나서야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에스클리프 남작가의 아이샤 에스클리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 이에요. 가스펠 백작, 가스펠 백작부인.”
두 부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관찰했다.
조금 더 무서운 쪽은 백작부인이었다.
드문드문 흰머리가 보이는 흑발을 단단히 틀어 올린 백작부인은 피처럼 붉은 눈으로 나를 품평하듯 훑었다.
그녀는 여장한 하데스가 나이를 먹 으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생김새였다. 이렇게까지 닮을 일인 가.
“만나서 반갑소.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군. 메이슨 가스펠이라 하오.”
가스펠 백작, 메이슨은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적당 히 귀족 영애로서는 대해주었다.
문제는, 그의 아내이자 하데스의 ‘엄마 같은 누나’ 포지션인 가스펠 백작부인이었다.
“애거사 가스펠이에요. 만나서 반 갑습니다, 에스클리프 영애.”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듣자하니 맨몸으로 북부까지 왔다 던데?”
백작부인은 차가운 인상과 달리 상 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나는, 원작의 그녀를 잘 알고 있음에도 실은 꽤 정중하 고 상냥한 사람이 아닌가 착각할 뻔했다.
“네. 그…….”
그러나 그 상냥함은, 딱 한 순간이 었다.
“북부까지 올라와 사내를 꾀어낼 마음을 먹었다니 어떤 의미로는 참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수치를 아는 여 인이었다면 조금쯤은 신중 하게 행동했을 터인데 말이지요.”
이어지는 발언에 식당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예고도 없이 얻어맞고 만 내 머릿속 은 순간 백지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못된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저 멍청하니 눈만 깜빡이기를 여러 번.
하데스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애거사, 미쳤나?”